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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155)화 (155/218)

155화

그리하여 대망의 별궁 외유를 떠나는 날이 다가왔다.

“이리로.”

새벽이었다. 겨울옷을 단단히 챙겨 입고 클레멘츠의 손을 붙잡았다. 그를 따라 도착한 곳은 황궁의 마구간이었다.

함께 떠나기로 한 클레멘츠의 지지 세력과는 성 바깥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유렌과 카렌을 비롯한 소수의 식솔들도 이미 짐을 꾸려 궁 밖에서 대기 중이었다.

남은 건 우리뿐이었다.

건초와 뒤섞인 유기물의 꿉꿉한 냄새는 서리 향 나는 겨울바람 덕인지 그다지 심하지 않았다.

클레멘츠는 비교적 온순해 보이는 말들을 둘러보았다. 혹시 날 태울 말이 있는지 보는 모양이었다.

“오필리어, 말을 탈 줄 아느냐?”

“아니요…….”

승마가 귀족의 필수 소양이라지만, 무늬만 귀족인 우리 레오라 가문은 딸에게 그런 연습을 시켜 줄 돈이 없었다.

모나한 가문의 사냥에 따라가며 어깨 너머로 보고, 조랑말을 탄 벨라의 고삐를 끌어 주며 승마 수업 내용을 주워들은 게 전부였다. 실제로 잘 달릴 수 있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게다가 눈이 내리는 바람에 길도 살짝 얼어 있었다.

“와…….”

황실의 마구간은 역시 다르달까. 한눈에도 위풍당당해 보이는 군마도 있었다.

“푸르륵!”

“흐익!”

그러나 덩치만큼 성질이 나쁜 모양이었다. 단지 가까이에서 감탄 좀 했을 뿐인데 말에게 위협당했다.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며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는데, 클레멘츠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날 감싸 안으며 말했다.

“저 녀석이 좋겠군.”

“저 녀석이 방금 저를 농락했다고요.”

“체력만큼이나 기백이 있는 게 좋지. 도망치면서 탈 말이라면 더더욱.”

그 말에 코리오트 별궁을 향하는 목적이 다시 한번 실감 났다.

한쪽 구석에 앉아 있던 마구간지기가 급히 달려 나왔다. 아직 시간이 일러 졸고 있다가 우리의 기척에 깬 것 같았다.

이내 클레멘츠는 말의 고삐를 넘겨받았다. 내게는 까칠하게 굴던 흑마는, 그가 이끄는 대로 순한 양처럼 따라왔다.

뭐야. 이 말이 사람 가리네.

클레멘츠 몰래 말을 노려보면서 얼마나 걸었을까. 황궁 정문을 벗어나기 전, 우리는 불유쾌한 일행과 마주쳤다.

“이런, 여기서 다 마주칠 줄이야.”

황량한 겨울 풍경 가운데 유달리 튀는 하늘빛 머리카락.

메디프는 유들유들한 말투도, 사람 좋게 웃는 얼굴도 그대로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 넉살을 도저히 좋게 봐줄 수 없었다.

그의 뒤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내 눈에 수도 귀족들이 전부 익숙해진 건 아니었지만, 그들 중 상당수는 ‘2황자파’라 불리는 이들 같았다. 메디프 본인이나 클라우디아 황비처럼 푸른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들은 아마 페리윙클 가문 출신일 것이다.

별로 계급은 높아 뵈지 않지만, 육각 관을 쓰고 흰 사제복을 입은 성직자들도 두엇 끼어 있었다.

“어디를 그렇게 가세요? 이 새벽에.”

누굴 마주치지 않고 조용히 나오는 게 상책이었는데, 하필 최악의 상대와 마주쳐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괜찮다. 이럴 때를 대비해 일부러 단출하게 둘이서만 나서는 거니까.

개인적으로 바람이나 쐬고 온다는 양 대답하면 붙잡을 명분은 없다.

“놀러요.”

딱 자르듯 대답하곤, 클레멘츠의 고삐를 잡지 않은 쪽 팔에 단단히 팔짱을 꼈다. 그리고 메디프를 야멸차게 노려보는 걸 잊지 않았다.

이런 제스처는 ‘네가 뭔 상관이셔?’라는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해 준다.

그러나 메디프의 반질거리는 미소는 굴하지 않고 여전히 그의 얼굴에 걸려 있었다.

“이런…… 곤란하게 됐네요. 제 친구들이 황태자 전하를 많이 만나고 싶어 했는데.”

그런 것 같다. 메디프의 뒤쪽으로부터 곱지 않은 눈들이 이쪽을 향해 꽂혔다. 그 꼴을 보자 분이 치밀어 올랐다.

이것들이 누구한테 눈을 부라리는 거야?

나는 최대한 클레멘츠를 가리고 섰다. 몸집 차이 탓에 원하는 그림이 나오진 않았지만. 적어도 메디프 뒤의 무엄한 인간들을 마주 쏘아볼 수는 있었다.

“사람이 의리가 있어야 하지 않나요? 2황자 전하, 저는요, 겉으론 웃으면서 속으로 딴생각하는 인간은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건지 모르겠어요.”

“글쎄, 아마도 당신이 기대할 만한 대답을 해 줘야겠죠.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오필리어.”

“……!”

이 상황에 저 시치미 떼는 화법을 들으니 머리가 띵해져 왔다.

“오필리어.”

메디프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내 뒤에 있던 클레멘츠가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그는 내 어깨 위로 슬며시 팔을 두르고 있었다. 여차하면 즉시 나를 말 위에 태우고 떠날 기세였다.

“황태자 전하는 그렇다 치고. 이렇게 추운데 새벽 댓바람부터 어딜 가겠다는 거예요? 이럴 때일수록 황궁에 있어야죠.”

검은 장갑을 낀 손이 천천히 내밀어졌다.

“자, 따라오지 않을래요? 마탑에서 만드는 법을 배운 마기구들을 구경시켜 줄게요.”

클레멘츠의 팔이 굳어졌다. 내 어깨를 힘주어 잡는 그의 손 위에 가만히 내 손을 올려놓았다.

그대로 고개를 돌려 가던 길을 나서기 직전이었다. 메디프의 눈길은 내게서 클레멘츠에게로 옮겨 갔다.

찰나의 순간 그 청보랏빛 눈이 슬퍼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럼 뭘 어쩐단 말인가. 다음 순간엔 나도 클레멘츠를 쫓아 오로지 앞을 향해, 황궁을 벗어났다.

“……2황자 전하. 저대로 둬도 괜찮겠습니까?”

황자를 따라오던 사제 하나가 물었다. 그들의 계획을 위해서는 황태자가 멀리 떠나는 건 곤란했다. 황태자궁에, 그게 아니면 적어도 수도에는 머물러 있어야 했다.

“안 두면? 무슨 수로 붙잡으려고. 연인끼리 데이트하러 간다는데 쫓아가기라도 할까? 성직자인 당신이?”

메디프 황자는 빙긋 웃으며 되물었다. ‘무슨 소릴 들으려고.’란 뒷말이 생략된 미소는 차가웠다.

순간 비쳐졌던 슬픔은 그의 표정에서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우리는 황궁을 벗어나 말을 탔다.

차가운 새벽 공기 속에 수도는 아직 잠들어 있었다. 클레멘츠와 내가 탄 말이 내는 발굽 소리가 고요 속에 차분히 울려 퍼졌다.

클레멘츠의 팔은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듯 내 허리를 단단히 감고 있었다. 덕분에 떨어질까 하는 불안함은 없었지만, 앞뒤로 밀착된 몸이 어색했다.

안전을 위한 조치일 뿐이니 이상한 생각 하지 말자……라고 다짐했지만, 상황이 상황인데도 얼굴이 눈치도 없이 자꾸만 화끈거려 왔다.

클레멘츠의 시야에 내 얼굴이 들어오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이러니까 꼭 혼우드 때 같지 않아요?”

결국 나는 어색함을 견디지 못하고 나불거렸다.

“절 숲속에서 주워 주셨을 때 얼마나 안도했는지 몰라요. 아, 또 이건 다른 때지만 숲으로 저를 찾아오셔서 말로 태워 가셨잖아요?”

“그랬지.”

“그땐 정신이 없어서 신경 못 썼지만, 저 울고불고 완전 엉망이었죠.”

생각해 보니 부끄러웠다. 하필 그럴 때 찾아온 클레멘츠가 원망스러울 정도였으니.

“그래. 네가 그 모양인 게 걱정돼서 따라갔었다.”

“으응……? 그랬어요?”

“그럼, 마수를 불러낸 널 곧바로 찾아낸 게 우연이라고 생각했나?”

“……!”

그런 거였다니. 나는 또, 로판 남주답게 위험한 일이 있는 곳을 기똥차게 찾아낸 것쯤으로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다.

“그럼 그때부터 저에게 관심이 있으셨던 거예요?”

이번엔 클레멘츠 쪽에서 침묵했다. 작게 헛기침한 그가 말을 돌렸다.

“춥지는 않아?”

날씨 핑계를 대다니. 그렇게 안 봤는데 꽤 고전적인걸?

좀더 캐물으며 반응을 즐기고 싶었지만, 조금쯤 붉어졌을 그의 얼굴을 상상하며 참기로 했다.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머금고 그의 가슴에 좀더 머리를 기댔다.

“네…….” 

바람이 부딪히는 코끝이 시리긴 하지만, 따뜻한 몸이 나를 푹 감싸고 있었다. 클레멘츠가 걸친 두툼한 망토도 한기를 막아 주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우리가 탄 말은 클라티아 성의 동문을 벗어나 비포장도로에 진입했다.

시야를 메우던 크고 작은 건물들은 사라지고, 탁 트인 벌판이 나타났다.

“코리오트 별궁은 어떤 곳이에요?”

“폐하께서 편찮으시거나, 연중 장기 휴가가 있을 때면 가끔 가는 곳이었지.”

옛 기억을 늘어놓는 클레멘츠의 목소리가 나긋나긋해졌다.

“관리인이 차가운 커피를 만들어 내오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딱히 특별할 것은 없는 음료야. 하지만 뜨거운 온천에 들어가서 마시면 유독 맛있었다.”

클레멘츠가 이런, 평범한 어린 시절 이야길 하는 건 처음이었다. 기분이 간질간질해졌다.

그러나 지금은 놀러 가는 게 아니었다.

명목상으론 외유를 떠난 거지만, 도착해서는 2황자파에 대응하기 위해 연신 회의를 하고 계책을 짜고, 소식을 모으느라 바쁘겠지.

거기서 나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클레멘츠의 다음 수는 황비에게 유효타를 먹일 수 있을까?

고민에 빠져 있으면 온천욕도, 맛있는 커피도 즐길 수 없으리라.

들떴던 기분이 금세 가라앉았다.

말발굽 소리가 침묵을 메웠다. 바람이 우리의 옷깃과 머리카락을 헤집어 놓았다. 나는 클레멘츠의 망토 안으로 더 파고들었다.

“……2황자 전하와는, 처음부터 사이가 안 좋았어요?”

메디프는 지금쯤 그 불순한 무리와 함께 해로운 작당을 꾸미고 있을 거다. 알면서도 왠지, 궁을 나서며 봤던 메디프의 표정이 잊히지 않았다.

“그 녀석은 왜.”

“궁금해서요.”

가볍게 한숨을 내쉰 클레멘츠는 의외로 선선히 답했다.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어. 좋지도 않았고. 그 애와 내 입장을 생각하면, 그 정도가 최선이었다.”

그럴 터였다. 암만 친형제라 하더라도, 클레멘츠와 메디프 사이엔 전 황후와 황비, 샹그리아와 페리윙클, 또 차기 황권 경쟁이라는 벽이 있었다. 좋은 사이를 유지해도 결국은 이렇게 갈라지게 됐을 것이다.

그렇지만…….

제 생각엔 2황자님이 전하를 조금은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표정을 지을 수는 없거든요.

……그렇게 말하면 괜한 참견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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