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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154)화 (154/218)

154화

“괜찮으십니까?”

클레멘츠에게 있었던 일은 이게 끝이 아닐 텐데, 하나 알아내는 게 이렇게 힘들다니.

달리 생각해 보면, 이런 심각한 일을 연인에게도 꼭꼭 숨겨 두고 그는 얼마나 힘겹게 사는 걸까. 나는 조금의 짐도 덜어 줄 수 없는 존재인가?

“전하께서 이렇게 답답한 사람인 줄은 몰랐어요.”

하긴 원작에서 벨라가 죽인다고 넙죽 죽어 주는 대목에서 알아챘어야 했나?

손수건으로 눈물을 콕콕 눌러 닦았다.

“저는 이런 식으로 배제되고 싶지 않아요. 그 사람을 돕고 싶은 마음은 후작님도…… 아시죠?”

“예. 실은,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기쁩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 사람과는 말이 통할 줄 알았어.

“전하께는 오필리어 님을 지키는 일이 최우선이고 저 또한 그렇습니다만……. 그렇다고 오필리어 님께서 아무 것도 모르셔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의 붉은 눈엔 마치, 내가 무고하고 힘없는 병아리라고 믿던 때처럼 염려가 어려 있었다.

뼛속 깊은 의리로 클레멘츠를 변호하기도 했다.

“그분께선 단지 당신이 너무도 소중하신 것뿐입니다. 처음 느끼는 소중함이라서, 어떻게 지켜야 할지, 어찌할 바를 모르시는 거지요.”

“그야 저도…… 아는데요.”

안다. 제 딴엔 날 위하는 거겠지.

하지만 클레멘츠가 되어 본 것처럼 그의 마음을 이해한다곤 할 수 없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어쩌면 이게 최선인지도.

하지만 나는 동의할 수 없었고, 그렇기에 물러설 수 없었다.

“……아, 맞다. 회의.”

테이블 한쪽에 방치된 회의 자료가 눈에 들어와, 벌떡 일어났다.

“죄송해요. 너무 시간을 빼앗았네요. 어서 가 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카시스는 황태자의 수석 보좌관이니 대충 늦어도 설렁설렁 들어갈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슬슬 가 봐야겠군요.”

회중시계를 확인하는 얼굴을 보니 다행히 지각은 아닌 듯했다. 여유롭게 일어선 카시스는 바로 나가지 않고 날 쳐다봤다.

“……?”

“오필리어 님, 혹시, 회의에 함께 가 보시지 않겠습니까?”

“……!”

* * *

클레멘츠를 지지하는 귀족들이 황태자궁에서 회의를 여는 건 알았지만, 현장을 직접 본 적은 없었다.

회의실은 문밖에서부터 어수선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

카시스의 뒤를 따라 들어서자, 이리저리 오가는 말들은 살벌하기까지 했다.

“황비, 그 여자가 언젠가 일을 낼 줄 알았습니다. 교활하기 짝이 없는 여우가 아닙니까!”

“2황자께선 이러려고 귀국하셨겠군요. 그리 마법에 뜻이 깊으시다더니 사실은 제위에 뜻이 깊으신 게지요.”

“신성 왕국은 지금껏 제국 쪽에 관심도 없더니, 갑자기 덜컥 성녀를 파견한답니까?”

열 올리며 제각기 떠드는 그들은 초조한 모습이었다.

아는 얼굴인 글로리나 부인도 보였다. 부인은 클레멘츠의 집사장인 만큼 측근이고, 귀족 신분이니 회의에 낄 자격이 충분했다.

가운데 앉은 클레멘츠는 굳은 얼굴로 침묵하고 있었다. 이따금 두통이 오는 듯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똑같이 지끈대는 이마를 감싸 쥐고 죽상을 한 귀족도 있었다. 머리 색깔이 클레멘츠와 비슷해서인지 더 눈에 띄는 중년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제 의지로 여기까지 나와서 앉아 있는 게 기적으로 느껴질 만큼 힘없어 보였다. 오묘한 분위기의 붉은 눈에선 의욕이란 게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 무서운 아주머니다.

“듀프레 후작, 드디어 오셨군요. 그 뒤엔…… 어?”

카시스를 따라 들어서자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머쓱하다.

“오필리어 님!”

“레이디 오필리어.”

“안녕하세요.”

어색하게나마 인사를 했다. 이런 식으로 이 회의에 끼게 될 줄은 전혀 몰랐는데.

마스코트 사업으로 클레멘츠의 일을 순조롭게 만든 전적도 있었지만, 반대로 클레멘츠를 위험으로 몰아넣은 원인 중 하나가 나다.

그래서 고깝게 여기려나?

다행히 날 보는 눈빛들은 적대적이기보단 놀란 것에 가까웠다. 그들은 이어서 클레멘츠의 눈치를 살폈다.

“카시스, 어째서 오필리어를 데려온 거지?”

“저의 독단입니다.”

카시스는 면목 없다는 양 고개를 숙여 보였다. 회의장이 조용해졌다.

“회의 시작은 잠시 미루지.”

휴회를 선언한 클레멘츠는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오필리어, 여긴 어떻게 왔느냐? 떠날 준비를 하고 있으라니까.”

“왜요? 저는 오면 안 되는 곳인가요?”

역시 클레멘츠는 화가 난 것 같았다. 끼어들면 안 되는 곳에 억지를 부려 와 버렸나 싶어 주눅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서면 안 되었다.

“듀프레 후작님도 인정하셨어요. 저도 알 건 알아야 한다고요.”

“카시스, 그 녀석이 괜한…….”

“괜한 짓 아니에요!”

클레멘츠는 흠칫 놀랐다.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언제까지 저는 아무 것도 모르게 하려고 하셨어요?”

“가능하면, 오랫동안.”

움켜쥔 주먹이 바르르 떨렸다. 뭐라고 쏘아붙이고 싶어서 입술을 달싹였다.

내가 화가 났단 걸 알았는지, 클레멘츠가 달래듯 중얼거렸다.

“너에겐 좋은 것만 주고 싶고 고생 따윈 시키고 싶지 않아.”

말은 잘한다.

그냥 넘어가고 싶지 않아 눈을 부릅뜨고 노려봤다. 하지만 그 녹진한 목소리에, 이미 빠른 속도로 마음이 풀리고 있었다.

“고뇌하게 하고 싶지도 않다. 뱀 소굴 같은 정계의 진창을 구르는 고민이나, ……나와 얽힌 천박한 말들로 네 귀를 더럽히고, 네 고운 미간에 주름이 잡히게 하고 싶지 않아.”

‘귀’와 ‘미간’을 입에 담으며, 그는 내 한쪽 귓가와 미간에 가벼운 입맞춤을 남겼다.

“할 수만 있다면 너를 가장 안전하고 호화로운 궁에 가두고 싶어. 좋은 소식만 듣고 아름다운 것만 보며 살게 하고 싶다.”

우리 남주님의 머릿속에 있는 저 꽃밭을 어쩌면 좋을까.

클레멘츠와 꽃밭이라니. 가장 어울리지 않는 조합인데, 그는 존재감조차 희박했던 자신 안의 낙원을 온전히 파내어 내게 내밀었다.

안타깝게도 나는 거기에 발붙일 수 없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이니까.

“사랑하는 전하.”

그를 향해 최대한 활짝 웃었다. 어떤 더럽고 슬픈 일도 존재하지 않는 환상 속이 아니라, 실재하는 지금 이곳에서 난 이렇게 밝게 웃을 수 있단 걸, 보여 주고 싶었다.

“그건 불가능해요. 저는 새장 속의 새가 아닌걸요.”

이어서 팔을 뻗어 그의 몸통을 끌어안았다.

“당신의 일이 곧 제 일이라고 하면 제가 주제넘은 건가요?”

돌아온 회의장의 분위기는 엄숙했다. 클레멘츠가 손짓하자, 사람들은 발언을 이어 나갔다.

“황비를 비롯한 2황자파가 성직자들을 소집하고 있습니다. 국혼만 준비한다면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뭔가 도모하고 있는 겁니다.”

그 정보를 이야기한 건 의외로 글로리나 부인이었다. 클레멘츠가 말을 받았다.

“성녀는 내가 시미크의 충실한 종임을 증명해야 할 거라고 하더군. 그 일과 관련이 있겠지.”

자리에 모인 귀족들이 돌아가며 말을 보탰다.

성직자들이 움직였고, 그 뒤엔 2황자파와 황비가 있다. 성녀는 그들에게 동조하는 건지, 아니면 그저 황비의 말로 이용당하고 있는 건지 확실하지 않았다.

현 상황에 대한 이야기가 대강 추려지고 있을 때, 한 사람이 느릿하게 일어났다. 아까 전에 조금 섬뜩한 느낌을 풍겼던 은발의 중년 여인이었다.

수런대는 말소리 속에서 ‘샹그리아 공작’이라는 이름이 들려왔다. 그녀가 바로 샹그리아 공작이라면, 클레멘츠의 이모가 된다.

“클라우디아 페리윙클은, 24년 전의 일을 알고 있으면서 지금까지 침묵해 왔습니다.”

느릿한 동작만큼이나 힘 빠지는 목소리였다. 그럼에도 그녀의 말에 회의실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발을 떼는 순간 터져 버리는 지뢰를 밟은 것처럼, 모두가 극도로 긴장해 있었다.

24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예로부터 영악했던 그자가 가만히 있는 게 이상했어요. 그 기나긴 침묵은 바로 이번 한 방을 위해서였던 겁니다.”

의미심장한 첫마디에 비하면 평범한 내용이었다.

말을 마친 그녀는 모든 기력을 소진해 버린 것처럼 풀썩 자리에 앉았다.

그 뒤로 24년 전의 일에 대해 입을 여는 귀족은 없었지만, 대책의 방향은 이견 없이 정해졌다.

‘저들이 꾸며 둔 무대에서 벗어나야 한다.’

국혼이 이뤄질 황궁. 대주교와 추기경을 비롯한 고위 성직자들이 위치한 시미크교회.

일이 하나 터지면 장작을 넣듯 말을 덧붙이고 옮길 수도민들.

이 모든 것이 있는 수도로부터 아예 이탈해 버려야 했다.

클레멘츠가 별궁행 준비를 지시한 건, 성녀의 통보를 받은 즉시 거기까지 계산한 결과였다.

“허흠. 그럼 정리하겠소. 이번 외유에 따라가는 건 황태자궁 식솔들 외에 듀프레 후작, 카나리 백작, 로탄잘라 남작…….”

한 귀족이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명단을 읽었다. 저 인원이 다 함께 수도를 나서면 제법 복작복작하겠다 싶었다.

겨울 별궁에 가자더니 이건 뭐 오붓한 데이트도 아니었잖아.

“……이상이오. 모두들, 특이 사항이 있다면 말씀 바라오.”

“저는 바로 영지로 돌아가겠습니다. 긴급 소집을 받들어 오늘 새벽에 상경한 거고, 어차피 몸이 좋지 않아 외유를 오래 끌 수 없습니다.”

샹그리아 공작이 콜록거리며 말했다.

“전 마무리해야 할 일들이 몇 가지 남았군요. 하루 이틀 즈음 뒤에 합류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어 글로리나 부인이 정중히 허리를 숙이며 양해를 구했다.

성실하고 엄격한 글로리나 부인이라면 일을 미루는 성격도 아니고, 별궁에 갈 준비를 하라는 명령이 내려오자마자 차질 없이 궁의 살림을 정리했을 것이다. 하루 이틀씩이나 더 해야 하는 일이 뭘까?

뭐, 황태자궁 전체의 일을 총괄하니 일이 많을 만하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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