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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153)화 (153/218)

153화

플랜 B(자해 협박).

가운 주머니에 미리 넣어 두었던 포장된 쿠키를 꺼냈다.

크고 불안한 눈망울로 날 보고 있던 카렌이 금세 미끼를 물었다.

“오필리어 님, 그건?”

“카밀이 구워 줬어요.”

“……!”

나는 병아리일 때 카밀이 구운 스콘을 먹고 기절한 적이 있었다. 그 일로 카밀은 독살 누명까지 썼었지.

한바탕 난리를 피운 기억이 있으니, 메이드들은 웬만하면 내가 이 쿠키를 먹는 상황은 피하려 할 것이다.

“오, 오필리어 님. 그거 이리 주세요. 그런 위험한 건 저희가 처리할게요.”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시면 안 돼요!”

바스락.

무시하고 포장을 뜯어, 고소한 향이 나는 과자를 입으로 가져갔다.

“아, 안 돼…!”

“국혼! 국혼이에요!”

뭐? 국혼?

설마…… 클레멘츠에게 다른 혼처가 정해진 건가? 심장이 철렁거렸다. 나도 모르게 놓친 쿠키가 바닥에 투둑 떨어졌다.

“네……. 황비 마마와 황제 폐하께서 정식 혼인을 치르게 되신다고 들었어요!”

아, 클레멘츠가 아니구나.

순간적으로 치솟았던 심박수가 서서히 정상 범위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 양반들이 이제 와서 국혼? 물론 황비는 정식 아내가 아니니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지만, 다소 뜬금없었다.

“성녀께서 오신 것도 혼사를 주관하기 위해서라고요.”

유렌이 울먹일 기세로 말했다. 양심에 약간의 가책이 느껴졌다. 사실 이 쿠키는 카밀이 구워 준 게 아니다. 전에 궁 밖으로 나갔을 때 만나긴 했지만, 그때 지나가다가 산 거였다.

카렌이 후다닥 와서 떨어진 쿠키를 수거했다.

“그렇군요. 하지만 그게 별궁으로 가는 것과 무슨 상관일까요?”

“그건 저희도 정말 몰라요!”

“제발요, 오필리어 님! 정말 더는 모른답니다!”

울상이 된 얼굴들을 보니, 주머니 속에 쿠키가 세 개 더 있지만 이제 그만해야 할 듯싶었다.

유렌과 카렌에게서 더 이상 얻을 단서가 없으니, 목표를 바꾸었다.

그를 찾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클레멘츠 못지않은 워커홀릭이었으니.

“오필리어 님?”

막 서류 작업을 마무리하고 자리를 옮기려던 건지, 카시스는 사무실 책상에서 엉거주춤 일어서 있었다.

“저랑 얘기 좀 해요.”

“여행 준비는 모두 마치셨습니까?”

서늘한 인상의 붉은 머리 미남이 정중하게 웃었다.

흥, 너도 그놈의 별궁 이야기를 한다 이거지?

“짐은 유렌과 카렌이 전부 챙겨 주니 제가 신경 쓸 게 없네요. 제 의사와 무관하게 갑작스럽게 떠나는 거기도 하고요.”

“그렇습니까.”

“그건 뭐예요?”

카시스가 챙겨 들고 있는 서류 뭉치를 가리켰다.

“아, 이거 말입니까? 곧 있을 회의에 가져갈 자료입니다.”

“회의요?”

지금은 회의가 곧잘 열리던 시간이 아니었다. 예정에 없던 회의라. 내 생각보다도 사안이 긴급한 모양이었다.

“전하께서 지지 세력을 소집하셨나요?”

“……네. 그렇습니다.”

카시스는 망설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혼우드에서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지만, 카시스는 올곧고 선량했다. 클레멘츠에 대한 굳건한 충성심과 함께 약자에 대한 세심함 역시 갖추고 있었다.

그런 그라면 내 답답함도 헤아려 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타이밍이 좋지 않군.

“후작님께 꼭 여쭈고 싶은 게 있는데, 바로 회의가 있다면 시간이 안 되시겠네요.”

“아닙니다. 레이디께서 만남을 청하셨는데 내어 드릴 시간이야 있지요.”

그는 나를 티 테이블에 앉히고 차까지 한 잔 우려내 주었다.

“저는 언제나 이십 분씩 여유를 두고 출발하니까요.”

크으. 참된 신사.

달리 말하면 내게 주어진 시간은 이십 분이란 뜻이 된다. 그 안에 카시스를 구슬려 원하는 정보를 알아내야 했다.

찻물을 따르며 내리깐 그의 붉은 눈을 바라보다가 불쑥 내뱉었다.

“전하께서 지지 세력까지 소집해서 당장 해결하셔야 하는 문제가 대체 뭐죠?”

“…….”

카시스의 진중한 미간에 주름이 패었다. 그는 침음을 흘릴 뿐 침묵했다. 그러다가 멋쩍게 웃어 보였다.

“죄송합니다, 오필리어 님.”

역시. 유렌과 카렌뿐만 아니라 카시스에게도 함구령이 내려진 모양이었다. 클레멘츠, 이 철저하고 못난 재수탱이.

찻잔을 둥글게 굴리며 생각을 정리해 봤다.

황제와 황비가 국혼을 한다며 성녀를 데려왔다. 클레멘츠는 그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성녀.’

열쇠는 시미크교의 성녀였다. 그녀의 방문이 클레멘츠에겐 불이익이고, 긴급회의까지 소집할 만큼의 위협이었다.

지금의 별궁행도 너무 허겁지겁 결정하고 실행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마치 도망이라도 치는 것처럼…….

“성녀님이 전하를 폐위시키실 셈인가요?”

일단 최악의 가정을 하나 던져 봤다. 카시스는 깜짝 놀라며 손사래 쳤다.

“아니요, 그런……! 그렇게까진 아닙니다. 걱정할 필요 없으십니다.”

이건 아닌가.

“무슨 일인지 모르니까 걱정된단 말이에요.”

“오필리어 님…….”

성녀와 관련은 있되, 폐위까지는 아니라는 거구나.

시미크교단이 클레멘츠를 고깝게 볼 이유를 생각해 보자 금세 답이 나왔다.

“악마 소환…….”

“……!”

그래, 맞아.

시미크교는 악마와 관련된 모든 걸 통째로 부정했다. 그런데 제국의 황태자씩이나 되는 사람이 대악마를 소환했다.

원래대로라면 봉마 의식과는 머나먼 숲속에서 벌어진 일이니 아무도 몰랐어야 하지만……. 하필이면 메디프의 통신구로 연결되어 있던 바람에 전부 들통나 버렸다. 내 변신 형태가 아다만티스라는 사실과 함께.

그땐 그저 실수라고만 여겼는데, 이제 보니 메디프가 내게 통신구를 준 의도도 의심스러웠다.

“그럼…… 저 때문에…….”

“……오필리어 님.”

따뜻한 찻잔을 들고 있던 손끝이 금세 차갑게 식었다.

언제고 트집잡힐 수 있다곤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이렇게 거하게 터져 버리다니.

게다가 내가 아니었다면 클레멘츠가 쓸데없이 크렘시아를 불러다 지옥의 불꽃 쇼를 생중계하는 일 따윈 없었을 것이다.

손가락이, 이어서 몸이 떨려 왔다.

이래서 내게 아무 것도 안 알려 주려고 한 건가? 당당하던 그가 수도 밖으로 도망쳐야만 하게 된 이유가 나 때문이라서?

“듀프레 후작님, 그런 건가요? 저 때문에 상황이 나빠질 대로 나빠진 건가요? 그럼 저는,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카시스는 괴로운 표정을 짓다가 홍차를 한 모금 삼켰다. 그 역시 한마디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답답한 모양이었다.

“후작님의 주군을 방해해서 죄송해요. 하지만 저도 힘이 닿는 대로 수습하고 싶어요. 아시는 걸 말씀해 주세요.”

여차하면, 모나한 저택에서 카시스 때문에 목숨이 위험했던 일까지 빌미로 꺼내 들 생각이었다. 그만큼 간절했다.

다행히도 내가 그만큼 치사해지기 전, 한껏 고뇌하는 표정으로 붉은 머리를 쓸어 넘긴 카시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오필리어 님 탓이 전혀 아닙니다.”

“그럼요……?”

“물론 오필리어 님을 위해 마공작 크렘시아를 소환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이전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게 뭐죠?”

“봉마 의식장에 계셨던 황제 폐하이십니다.”

“폐하요……?”

이제 이야기해 주기로 한 건가?

그러고 보면…….

엔클레이오를 기점으로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워들었다. 그중엔 ‘의식 때 난장판을 수습한 황태자에 비해 황제가 한 일이 너무 없지 않냐.’라는 의견도 충분히 있었다.

물론 궁에서 황제를 욕하는 건 목숨을 걸고서야 가능하기 때문에, 돌리고 돌려 회오리 감자가 되다시피 한 말들이었다.

‘폐하께서는 두 아드님을 잘 두셨으니 어찌나 복받으셨는지.’라든가.

‘근위대와 기사단이 황제 폐하의 신변을 안전하게 지켜서 얼마나 다행인지’ 같은.

언뜻 좋은 말로 넘길 수도 있지만. 비슷한 말들이 너무 많이 나오는 데다 말투도 냉랭했다. 뭔가 이상해서 곱씹고 곱씹어 보니 저런 뜻이었다.

“으음.”

“힐다가드 성녀와 같은 거물이 오는 걸 폐하께서 모르셨을 리 없습니다. 평소라면 전하께 미리 언질이 갔을 겁니다.”

“결국 폐하께선 황태자 전하가 아무런 준비 없이 오늘의 상황을 맞닥뜨리길 바라셨던 거네요.”

“……그렇습니다.”

성녀가 클레멘츠의 뭘 문제 삼았는진 모르지만. 우리의 황제 폐하께선 엔클레이오 날 본인이 아들보다 주목받지 못했단 이유로 이런 짓을 벌였다.

참 대단한 아버지가 아닐 수 없었다.

“아까 전 마주쳤을 때 소매 속으로 손가락 욕을 날려 줄 것을…….”

충직함과 올곧음의 상징인 듀프레의 가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니까 본인의 권위에 위기가 오자 폐하께서는 황비 전하와 손을 잡았고…… 황태자 전하는 아예 놓아 버리신 거군요.”

“불충한 말씀입니다만, 맞습니다.”

온전히 내 탓이 아니라면, 다행인 걸까?

병아리도 사람도 아닌 이상한 여자와 엮여 팔자가 꼬였다면, 해결해 볼 여지라도 있다.

하지만 아버지이자 이 나라의 황제가 ‘아들놈이 나보다 잘나가는 것 같다’고 그의 앞길을 막는다면? 이거 정말 큰일 난 것이다.

지극히 귀한 자.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황제. 그의 눈 밖에 나 버리면 답이 없다. 황태자로서의 권리도 결국 황제로부터 온다.

진짜 뭐 이딴 애비가 다 있어?

우리 앞에 놓인 찻잔은 어느새 비어 있었다. 시간은 대충 20분에 근접하게 흐른 듯했다.

“전하께선 말씀드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만, 언젠가는 오필리어 님께서도 아셔야 할 내용이라 생각했습니다.”

“고마워요. 정말로요.”

막상 카시스를 구슬려 정보를 얻어 내고 나니 눈물이 났다. 카시스는 당황하며 내게 손수건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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