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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152)화 (152/218)

152화

“원체 극단적이고 모험심이 과한 여자였다.”

아비는 묵인했다. 아니, 동조한 것이다. 24년 전 셀레네 샹그리아가 스스로 파멸에 내몰리도록 방치했고, 이번엔 아들이 그 소용돌이에 휩싸이도록 내쳐 버렸다.

‘왜?’

황제가 원하는 대로 자라났던 클레멘츠는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가 황제이기 때문이었다.

엔클레이오 투 바실리아에서 황제보다 나은 통솔력과 마력을 보여 준 황태자. 황실의 마스코트이자 아다만티스로 밝혀져 인기몰이를 하는 오필리어.

제국의 황제는 유능한 후계자를 원하지만, 후계자가 자신보다 주목받는 건 원하지 않는다.

지배자라면 모름지기 자신의 지배력을 가장 우선시하는 법이다. 그것이 없으면 군주도 황제도, 무엇도 아니니. 친 혈육보다도, 사랑한답시고 들인 아내보다도 당연히 소중히 여겨야 하는 것이다.

딱히 어머니에 대한 정은 없었다. 자신을 낳자마자 죽어 만난 적도 없는 이를 그리워할 순 없을 것이다.

다만 클레멘츠는 구역감을 간신히 참으며 앉아 있었다.

* * *

“레오라 영애께서는 여기서부턴 들어올 수 없으십니다.”

문턱 하나를 두고 황족과 국빈만이 출입할 수 있는 곳이었다.

오필리어는 작은 휴게실에 앉아서 기다렸다. 마침내 문이 열렸다.

‘아, 끝났다.’

기다렸다는 듯 복도로 나가던 오필리어는 비둘기 색 베일을 쓴 성녀와 마주쳤다.

‘저 사람이 성녀. 이 세계에서 가장 신과 가깝다는 사람.’

갑자기 제국으로 와서 황가와 단체 면담을 하다니. 무슨 일이 있길래?

궁금증을 누르며 두 손을 모아 고개를 숙였다. 궁정식 절 대신 시미크교인으로서 경의를 갖추는 인사였다.

그런데 성녀의 인기척이 좀처럼 지나가지 않았다.

‘……?’

조심스럽게 눈을 뜨고 고개를 드니, 전설의 힐다가드 성녀님께서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계셨다.

‘히익…….’

왜 저러지?

어쨌든 곤란하다는 건 확실했다. 성녀의 뒤를 이어 나온 황가 구성원들이 곧 이리 올 테고, 오필리어는 성녀에 이어 황제와 황비의 눈빛까지 한 번에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네가 뭐라고 여기 껴 있느냐.’라고 눈으로 말할 게 뻔했다. 오필리어는 클레멘츠가 걱정될 뿐이었으니 그만 만나면 되었다.

“비, 빛과 사랑과 진리가 하나이니!”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그러하노라.”

뚝 잘라 내듯 딱딱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그러나 오필리어는 자연스레 도망치는 데 실패했다.

“시미크의 가호가 있기를. 영양의 이름은?”

“……레오라 가문의 오필리어가 성녀님께 인사드립니다.”

“오호.”

곱씹는 듯한 침음성은 처음 목소리와 달리 그리 딱딱하지 않았다. 오필리어는 곤란했다.

‘뭐야. 들으면 내 출신이 어디인지 알아듣긴 한다는 거야?’

제국의 귀족이라면 타국보다 유리한 위치였지만, 귀족 중에서도 말석인 레오라였다. 신성 왕국의 성녀가 굳이 알 필요도, 알고 있을 리도 없었다.

성녀는 더 볼일이 없는 듯 몸을 돌렸지만, 불행히도 그녀를 따라 나온 황제와 황비가 오필리어 앞에 멈춰 섰다.

“여기까지 따라오다니…… 쯧쯧. 숫제 제가 황족이라도 된 줄 아는 모양이구나.”

‘젠장!’

오필리어는 황제의 비아냥거림을 미소로 받아넘겼다.

“폐하, 철없는 것에게 너무…….”

마침 황비가 달래 주는 척 은근히 깔아 내리려는 참이었다. 오필리어는 부러 활짝 웃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감히 드높으신 분과 나란히 설 수 없단 걸 안답니다. 하지만 걱정이 되어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어요. 황태자 전하를 은애하니까요!”

“허…… 나 참, 허어…….”

코넬리우스 황제는 이상하게 굳은 얼굴로 연신 ‘허, 참, 나’를 번갈아 반복했다. 그러곤 걸음을 서둘러 오필리어에게서 멀어져 갔다. 소름이 올라온다는 듯 부풀어 오른 소매를 털어 내는 동작도 보였다.

말을 얹으려던 황비는 미소도 찡그림도 아닌 애매한 표정으로 그를 부축했다.

오필리어는 그들을 향해 깊이 허리를 숙였다.

“풉. 크흡. 큭…….”

“…….”

다시 허리를 펴 보니 메디프 황자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성의 없게 참고 있었다.

그녀의 바로 앞에서.

‘내가 위치 선정을 대단히 잘못했구나.’

메디프 황자는 오필리어가 저주를 제어하도록 도와주긴 했지만, 이제 가까이할 인물이 아니었다.

‘뭘 아무렇지도 않게 웃고 있는 거야? 흑막 주제에.’

며칠 전 혼우드로 떠난 벨라마저도 그를 믿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오필리어는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뭐가 그렇게 웃기시죠, 전하?”

“그야 당신이죠, 오필리어. 우리가 아버지를 대하는 방식에 있어 상당히 잘 맞을 것 같단 생각을 해 봤어요.”

“저는 그다지 잘 맞고 싶지 않네요. 클라티아의 지존을 대하는 일도 힘에 부치고요. 용건이 없으시다면 이만 가 보시는 것이?”

적당히 고개만 숙이고 있으면 그들이 지나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한 명 한 명이 죄다 말을 걸고 갔다. 오필리어는 조금 기가 빨린 걸 느끼며 기다리던 이에게 다가갔다.

“전하, 별일 없으셨죠?”

‘전하를 은애하니까요.’ 부분의 성량이 너무 컸는데. 혹시 들어 버린 건 아닐까? 그럼 틀림없이 놀리고 들 텐데.

걱정 반 설렘 반으로 다가서던 오필리어는 멈칫했다. 그의 안색은 안 좋았다.

‘있었구나, 별일.’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손을 올렸다. 제 얼굴을 향해 올라오는 가는 손을 클레멘츠는 가만 감싸 쥐었다.

“그래.”

“아닌 것 같은데요.”

클레멘츠는 웃어 보이려다 관두었다. 광기라면 모를까. 괴로움을 웃음으로 덮는 일은 연습해 본 적 없으니 분명 기괴한 표정이 나올 터였다.

“성녀님이 뭐라고 했는데요, 네?”

황금 호수 같은 눈이 수심을 담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클라티아의 황태자여, 그대는 악마와 무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단은 그대의 후계자 자격을 문제 삼을 걸세.”

그는 대답했다.

“무관합니다.”

“그러나 무관한 자가 대악마를 쉽게 부르겠는가?”

성녀는 곧바로 되물었고, 연녹색 눈에서는 짙은 의혹이 걷히지 않고 있었다.

“그대는 스스로가 시미크의 충실한 종임을 증명해야 할 걸세.”

성녀의 싸늘한 목소리가 다시금 귀에 꽂히는 듯했다.

황비는 그를 막다른 길로 몰아넣었고, 황제는 묵인으로써 그를 심판할 권리를 넘겨주었으며, 교단은 그가 할 수 없는 증명을 요구했다.

이제 시작이었다. 그리고 눈앞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사람이 있었다.

함께 바깥으로 나서자 날씨는 조금 더 추워져 있었다. 클레멘츠는 황태자궁 쪽으로 걸으며 속삭였다.

“전에 수도 바깥에 별궁이 있다는 얘길 했었지. 기억나느냐?”

오필리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 잠시 다녀오자.”

“네?”

휘잉. 차가운 바람이 오필리어의 금색 단발머리를 헤집었다.

별궁이요? 지금요?

* * *

“별궁에 잠시 다녀오자.”

그나마 다행인 점은 ‘다녀오마’나 ‘다녀와라’가 아니라 ‘다녀오자’였다는 것.

왜 그러냐고 묻고 싶었다.

안 그래도 불안해 죽을 지경이니까 제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달라고.

하지만 척 봐도 날 향한 걱정이 흘러넘치는 눈을 보면, 더 떼를 쓸 수가 없었다. 그랬다간 클레멘츠를 더 괴롭게 할 것 같았다.

여전히 혼자서 모든 걸 짊어지려는 모습이 답답했지만 당장은 넘어가 주기로 했다.

“양털 장식을 붙인 이 모자와 털 망토 세트는 꼭 가져가야겠지요?”

“코리오트 별궁은 온천수가 좋기로 유명해요! 온천욕을 즐기고 몸에 바르실 화장품을 챙길게요.”

별궁으로 갈 준비를 하라는 명령은 빠르게 하달되었다. 유렌과 카렌은 짐을 챙기느라 분주했다. 방 곳곳에 있던 물건들이 꺼내어지고 차곡차곡 쌓였다.

클레멘츠와 온천에서 데이트하기. 좋다, 이거야.

갑작스러운 별궁행의 계기가 석연찮지만 않았어도.

아마도 클레멘츠는 별궁에 도착해서도 내게는 별다른 말은 안 해 주고 ‘저길 봐라. 물이 따뜻해 보이지.’, ‘뭘 발랐지? 냄새가 좋구나.’ 같은 태평한 소리만 할 테지. 분명했다.

적어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진 알아야겠다. 그래야 이 과보호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내 눈은 정답게 재잘대며 짐을 싸고 있는 메이드들을 향했다.

높이 올려 묶은 갈색 머리의 유렌, 푸석거리는 더티 블론드의 카렌.

이들은 언제나 날 보살펴 주는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일차적으로 그들의 주인은 클레멘츠였다.

즉, 클레멘츠의 과보호가 메이드들을 통해서도 미치고 있다는 얘기였다.

“유렌, 카렌.”

두 쌍의 잿빛 눈이 나를 향해 반짝였다.

“왜 그러세요, 오필리어 님?”

“전하께서 왜 갑자기 별궁행을 결정하셨는지, 알고 있어?”

“아, 아니요?”

“아하하, 저희 같은 일개 메이드들이 전하의 뜻을 어떻게 알겠어요? 오필리어 님도 참!”

“하하, 그렇죠.”

“아하하!”

역시. 기습적인 질문에 당황하고 있군. 그리고 뭔가 알고 있어.

이 험한 황궁에서 일하면서 거짓말을 이렇게 못하다니……. 안타깝지만 나야 잘됐다.

“전하께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알고 싶어요. 제게는 전혀 알려 주시지 않으니까……. 너무 걱정되고 답답해요.”

메이드들의 입을 열게 만들기. 1단계는 동정심 자극이었다. 다른 말로는 ‘불쌍한 척’.

그러나 이건 나의 진심이기도 했다.

“오필리어 님…….”

눈썹 끝을 뚝 떨어뜨리고 앉아 있자, 그들은 안절부절못하며 다가왔다.

“너무 상심치 마세요. 전하께선 오필리어 님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시니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으신 거예요.”

“알아요. 하지만 저에게도 전하가 소중하니까 걱정되는걸요. 말해 주세요.”

그러자 그들은 더더욱 어쩔 줄 몰라 했지만, 끝내 말해 주진 않았다.

“죄송해요. 저희도 명령을 받은 게 있어서 함부로 입을 놀려선 안 돼요.”

“죄송해요, 오필리어 님…….”

그럴 줄 알았다. 나는 즉시 플랜 B를 가동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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