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황궁에 중요한 손님이 와 계십니다.”
“그게 누구지?”
“신성 왕국의 성녀 힐다가드입니다.”
“……성녀가? 갑자기?”
듀프레 후작이 ‘중요하다’라고 할 만한 귀빈이라면 클레멘츠도 이미 알고 있어야 정상이었다. 황태자의 업무 가운데는 국빈 대접도 있었으므로.
그런데 그렇게 중요한 인물이, 클레멘츠가 전혀 알지 못하게 갑자기 방문했다.
분명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오필리어의 가슴이 또다시 불안함으로 두근거렸다.
알고 있던 소설의 내용은 이미 끝났다.
예전의 여주인공에게 닥치던 고난 역시 제국의 사교계와 궁 안에서의 고립이지, 먼 곳에서 찾아온 손님 같은 게 아니었다.
그러니 어느 때보다도 절박하게 클레멘츠를 돕고 싶은 지금, 그녀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성녀 힐다가드.
북 대륙에 속한 작은 섬나라 출신으로, 정략혼으로 맺어진 남편이 일찍 죽은 후 수도원에 들어가 일생을 조용히 마무리할 예정이었던 여자.
그녀를 성인의 반열에 올린 건, 그녀가 한때 북 대륙 로라시아 일대를 황폐화시켰던 가뭄을 끝낸 일이었다.
나중에야 알려진 사실이지만, 힐다가드의 남편은 친형에게 모살되었다.
뻔하게도 그녀가 보내진 수도원의 원장은 살해자의 끄나풀이었다. 아주버님이 되는 남자는 몰래 힐다가드까지 죽여 후환을 없애려고 했다.
황량한 바위섬 영지. 낡고 폐쇄적인 수도원. 가족 잃은 젊은 여자를 조용히 죽여 없애기 너무도 좋은 환경이었다.
그러나 수도원장이 여러 술수를 썼음에도, 힐다가드는 죽지 않았다.
공모자의 독촉에도 그녀를 죽이지 못한 수도원장이 조바심에 그만 돌아 버릴 무렵, 북 대륙 전체에 몰아친 혹독한 가뭄의 여파가 수도원에 도달했다.
“저 여자는 마녀야! 남편 잡아먹은 마녀 따위를 먹여 살릴 식량은 없다! 저년을 거두었다간 우리 모두 굶어 죽을 거다!”
때는 여름. 북부임에도 타는 듯한 더위가 닥쳤다.
수년째 모자랐던 강수량에 가을밀 산출량은 이미 바닥났고 타작할 보리도 없다시피 했다. 당장에 흐벅진 비가 내리지 않는 이상 곧바로 닥쳐올 가을의 사정도 불 보듯 빤했다.
황야로 쫓겨났을 때에 힐다가드는 이미 퍽 오래 굶은 상태였고, 빈손이었다.
이제야말로 죽게 되었을 때, 힐다가드는 그저 단정히 앉아 기도했다고 전한다.
신이나 가족을 향한 원망이나, 그리움, 귀족으로 누리던 안락함에 대한 아쉬움도 전부 버린 채로.
소문을 들은 농민들은 텅 빈 곳간을 털어 빵 조각이나 물 따윌 들고 찾아왔지만, 힐다가드 수녀는 고개를 저으며 모두 돌려보냈다.
시간이 흘러 여섯째 날. 힐다가드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을 땐, 원망스러울 만큼 푸르던 하늘에 눈구름이 모여들고 있었다.
북 대륙 전체에 여섯 날 동안 눈이 내렸다. 눈은 달궈진 대지에 닿기 전에 단비로 바뀌었다.
기적이라는 말 외에 달리 설명되지 않았다.
여름에 눈이 내린 것도 엄청난 일인데, 여섯 날 동안 내렸다. 6은 시미크교의 신성 수였으며 눈송이는 교의의 상징이었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 어느 쫓겨난 수녀가 황야에서 엿새 동안 기도하여 눈을 내리게 했다는 소문 역시 마찬가지였다.
신성 왕국은 부리나케 찾아와 샛별처럼 나타난 성인을 성전으로 모셔 갔다.
성녀를 마녀라고 몰아 저주한 수도원장은 밤마다 떨다가 미쳐 버렸고, 아주버님이란 작자는 이후에 진실이 밝혀져 처형당했다.
그러나 힐다가드는 오랫동안 살아남았다.
북쪽의 성전에서, 손짓 한 번이면 병자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자연 재해나 외침조차도 번번이 계시로 예지하여 막아 냈다.
신의 사랑을 받는 여인. 긴 세월 명성을 쌓아 온 그녀는 그야말로 시미크교의 살아 있는 상징이었다.
힐다가드는 수많은 기적을 일으켰으나, 그녀를 성인으로 만들어 준 첫 번째 기적의 내용에 따라 눈송이의 성녀라고 불렸다.
성녀는 여든을 바라봄에도 정정했다. 걸음걸이에서 강단이 느껴졌다
비둘기 색 드레스가 통이 굵고 다부진 몸을 빈틈없이 감쌌다. 드레스와 같은 색의 베일이 머리를 감싸고 발목까지 내려왔다. 베일을 고정한 관은 성직자들이 쓰는 모양대로, 육각이었다.
“빛과 사랑과 진리가 하나이니,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그러하노라.”
“눈비가 내리듯 은혜가 내리오소이다.”
하나같이 독실하지 않은 황가의 일원이 한자리에 모여 시미크교의 경구를 읊조리는 일은 일 년에 한 번쯤이나 겨우 있을 일이었다.
자비로운 성녀는 그러나 선선히 축복을 내놓았다.
“신의 섭리가 제국과 황가를 축복하길 바라오.”
“고맙소, 힐다가드 성녀.”
성녀는 주름이 팬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신의 뜻에 따라 자비로웠지만, 연륜에 날카롭게 벼려지지 말란 법은 없었다.
시미크교는 기본적으로 마법과 친하지 않았다. 교세가 워낙 강성하여 국교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지만, 마법의 토대 위에 세워진 클라티아와는 상극이었다.
교단 역시 클라티아 황가를 비판하면서도, 그들이 최강국인 이상 어느 정도 눈치를 보아야 했다.
그렇게 불편한 관계가 서로를 끊지 못하고 어영부영 이어져 왔다.
그러니 성녀의 눈에는 화려한 방 안에 모인 온 가족이 탐탁지 않았다.
마탑에서 수학했다는 2황자는 척 봐도 가벼웠다. 신에 대한 존경심은커녕 다른 어떤 누구를 향한 존경심도 없어 보였다.
영험하게도 성녀의 직감은 사실이었다.
비교적 진중해 보이는 황태자는 더 큰 문제가 있었다. 힐다가드 성녀는 그노시드 대주교가 보내왔던 보고서의 내용을 되짚었다.
장차 황제의 지위에 오르게 될 사람이 숨기기엔 너무도 큰 비밀이었다. 국혼이 치러지기 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다.
다음은 황제 부부.
시미크교는 일부일처제를 상당히 강조했다. 일생을 하나 되어 함께하는 부부야말로 교리에서 강조하는 신과 인간의 결합과 등치되었으며 따라서 신성한 것이었다.
본부인 외에 첩인 황비 따위를 들이는 클라티아 황가의 전통은 교단이 보기에 무척 불순했다.
하여 사실상 일부이처제가 폐지된 지가 언제인데, 코넬리우스 황제는 재혼 상대인 클라우디아를 아직 명목상 남아 있는 황비의 자리에 두었다.
그건 정식 혼인이 아니었고, 교단의 입장에선 엄밀히 말해 불륜이었다.
이 때문에 황실과 교단은 수십 년 동안 냉랭한 사이로 남았다.
하지만 클라우디아 황비를 보는 성녀의 시선은 부드러웠다.
황제궁까지 안내되는 동안, 성녀는 기도실에 앉아 있는 클라우디아를 보았다. 소탈하고 검약하다는 평판이 있는 황비는 황족 전용 기도실이 아닌 곳에서 조용히 기도문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사실 어느 여자가 자신이 원해서 첩의 위치에 머물러 있겠는가. 코넬리우스 황제의 불손함은 오로지 황제의 의지일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성녀가 오늘 이 먼 길을 온 것 또한 그 불온했던 혼인 관계를 정립하기 위해서였다.
“제국의 황제가 드디어 정식 혼인을 올려 시미크 앞에 떳떳하게 되니, 세상의 빛이 더 밝아지리라.”
클레멘츠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성녀가 왔다는 소식을 카시스에게 들었지만, 왜 왔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왜 왔다고 하던가?”
“그것이…… 모르겠습니다. 현재로썬 파악할 수 없습니다.”
클라우디아가 움직였을 거라곤 생각했지만, 이제 와서 정식 혼인을 요청할 줄이야.
“그게 무슨…….”
하기야 황제의 혼인을 주관하려면 그녀 정도의 위치를 가진 사람이어야 했다. 그래야 교단의 확실한 축복과 승인을 보장하는 결혼이라고 알려질 테니까.
클라우디아가 황후가 되면, 아들인 메디프는 더 이상 서자가 아니다. 엄연한 적자로, 클레멘츠와 비교해 정당성에서 전혀 뒤지지 않는다.
그리고 메디프는 수도에 돌아와 있고, 그를 정계 밖으로 내돌리던 학업은 그만뒀으며, 3대 가문인 페리윙클의 비호를 받는다.
그런 일을 황제는 클레멘츠가 모르게 진행했다.
둘러보니 이 일에 대해서 몰랐던 건 자신뿐인 듯했다.
“황태자여, 그대의 부모가 드디어 합당한 관계가 되는 것이 불만인가?”
나이 든 성녀의 서릿발 같은 눈길이 엄하게 내리꽂혔다.
“물론 세속의 정치와 이해관계란 복잡한 것이지. 그로 인해 친족과 척지는 일도 비일비재하고 말이야.”
놓치기 힘든 조소가 섞인 목소리였다.
하지만 더욱 곤혹스러운 건 성녀의 이어지는 말이었다.
“허나 그대가 제국의 정당한 계승자니 이것만큼은 물어야겠군. 클레멘츠 레스타 뒤싱겐, 그대는 악마의 혈통인가?”
“……그게 무슨.”
그러나 그가 대응하기도 전, 클라우디아가 요란을 떨며 외쳤다.
“성녀님……! 성녀님, 오해입니다!”
마치 제가 억울한 오해를 당한 양 호들갑이었다. 그 꼴을 보고 클레멘츠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 자리부터가 그를 노린 함정이었다. 황비는 그를 무대에 던져 놓고 제가 주인공인 연극을 시작했다.
“그건 황가의 비밀인데 어찌 성녀님의 귀에…….”
푸른 눈에서 눈물을 떨구는 모습은 그야말로 배우 못지않았다.
‘아끼는 의붓아들의 치부를 존경하는 성녀에게 들켜 버린, 독실하고 비통한 신자’. 클라우디아는 눈물 몇 방울과 말 몇 마디로 그 배역을 완벽하게 해냈다.
귀하게 모셔 온 관객은 성녀이며, 가만히 그를 외면하는 아비와 동생은 황비가 떠들도록 내버려 두는 조연이었다.
‘네놈의 하자가 맞으니 어쩔 수 없잖으냐. 그러게 조심했어야지.’
황제의 떨떠름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기가 막혔다.
“황태자에겐 전혀 잘못이 없습니다, 성녀님. 모든 것은 전 황후인 셀레네 디 샹그리아, 그 여자의 독단이옵니다.”
클라우디아가 준비한 각본에는 당연하게도, 그를 낳아 준 여자의 이름이 등장했다.
“샹그리아 공작가 말이오?”
“……예.”
샹그리아 공작가는 특히 교단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근본부터가 적마법과 흑마법으로 일어난 가문이었으니.
시미크교의 강성 때문에 샹그리아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전 황후 셀레네가 죽은 뒤로는 중앙 정치에서 그들의 영향력은 거의 없었다.
“셀레네…… 그 영민하던 여자가 어찌 그런 어리석은 짓을 했는지…….”
“아마 말년에 몸이 너무도 아파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었던 게지요.”
셀레네 디 샹그리아의 마지막 몇 년은 타인의 혀에 의해 쉽게도 조각조각 해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