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이 두툼한 보고서를 바쳐야 할 만큼 중요한 인물이었다. 교단의 거두. 교황과도 어깨를 나란히 하는 신의 대리자라니.
클라티아의 최고위 사제인 그로선 다른 이에게 고개 숙여야 하는 상황이 썩 달갑지 않았다. 게다가 상대는 여자가 아니던가.
‘그래 봤자 평범한 노파에 불과할진대…….’
‘그분’, 즉 본 교단의 성녀 힐다가드를 떠올리자 다른 두 성직자의 얼굴도 어두워졌다.
황실이 먼저 화해의 뜻을 비치니, 본 교단 역시 성의를 보였다. 국혼을 직접 주관하도록 성녀를 파견한 거였다.
성녀가 오고 나면 지금껏 본 교단의 눈을 피해 해 왔던 생활은 한동안 안녕이었다.
저택을 살 만큼 짭짤한 사유 재산을 불릴 일도, 잔인하고 말초적인 쾌락을 즐기러 다니는 것도, 마음껏 술고래가 되는 생활도.
불편한 심정들이 훤히 내비쳐 보여, 메디프는 헛웃음을 지었다.
대체 이 자식들은 자신이 신의 대리인이란 자각은 있는 걸까?
* * *
클랏샤의 광장 근처. 사람들은 새로 생긴 구조물 앞으로 모여들었다.
높고 우아하게 솟은, 무척 아름다운 시계탑이었다.
시계를 받치는 은빛 기둥과 흘러내리는 파도. 위에는 그 모두를 굽어 보는 금빛 아다만티스가 있었다.
바로 앞에는 제국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한 쌍이 있었다.
황태자는 얼음 같은 분위기의 미남으로 유명했다. 무척 아름다운 건 확실한데, 차라리 생명이 없는 예술품 같다고.
반면 수도를 뒤집어 놓은 ‘오필리어 양’은 누가 봐도 순수하고 밝아 보였다. 자세히 뜯어보면 병아리일 때의 모습이 보인다고 생각될 만큼 귀염성 있기도 했다.
정반대 분위기인 두 사람이 한데 붙어 있자, 묘하게 조화로웠다.
“……잘 어울리네.”
머리칼과 눈 색 탓인지 온화한 햇살처럼 느껴지는 이가, 고고한 빙산이나 눈밭과 만나 찬란히 빛나는 것 같았다.
클레멘츠가 사람들 앞에 나서기 전, 오필리어는 멀리 하늘에 푸른빛이 반짝이는 걸 보았다.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신비로움이었다. 곰곰 생각하다가, 그것이 워프 포탈이 가동할 때 나타나는 푸른 마력이란 걸 떠올릴 때쯤.
연인을 곁에 세운 황태자가 입을 열었다.
“모두들 알다시피, 우리의 수도 클랏샤는 세계의 요지에 위치해 있다.”
곤드와나의 북단에 위치한 클랏샤는 북 대륙으로도, 동 대륙이나 남 대륙으로도 길이 열려 있었다. 말 그대로, 항해를 할 수만 있다면 세계의 요충지였다.
“하지만 이토록 우월한 위치를 가지고도 제국은 거의 이득을 보지 못했지.”
먼 바다로 나간 배들은 경도를 계산하기 힘들기에 자신의 위치를 알 수 없다. 따라서 대륙을 아우르는 장거리 항해는 제한되고, 안전하게 가는 대신 마탑에 천문학적인 비용을 치르는 텔레포트가 이용되어 왔다.
“현재 클랏샤의 항구는 어선이나 가까운 거리를 오가는 배들만이 오가는 한가한 공간이다.”
청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 대륙과 동 대륙에선 이국적인 토산품과 좋은 연료가 났다. 그중에는 제국민들이 특히 탐내는 품목들도 있었다.
제국에서 나는 물건의 새로운 판로를 개척해야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마탑에서 매긴 운송료 때문에 사실상 교역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질 거다. 내 옆에 있는 오필리어 레오라가 개발한 경도 계산법으로 인해, 대륙 건너 더 먼 바다로의 항해가 가능해졌으니.”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가듯이, 여름에 오필리어가 발표한 계산법은 겨울의 초입에 이르러 대중들에게도 상당히 알려져 있었다.
경외의 시선들이 오필리어에게로 쏟아졌다.
사람들은 선망을 담아 그들을 보고 있었지만, 오필리어는 심란했다.
오는 동안 그는 다정하게 웃어 주었지만, 평소와 달리 장난스러운 농담도, 조금은 뜨거운 눈짓도 없었다.
둘은 아직 의견을 좁히지 못했다.
‘나쁜 클레멘츠.’
그는 모든 위험으로부터 오필리어를 배제하려고 하면서, 제 손으로 벌어들인 영광은 그녀에게 모조리 주려고만 했다.
시계탑을 발표하는 자리에 데려온 것도 그 연장선이었다.
모든 걸 주려고만 하고 전혀 받지는 않으려 하는 그가 답답했다.
이어 옆에 있던 항만 사무소장이 앞으로의 계획을 발표했다.
원거리 항해를 위한 무역선 확충, 대규모 무역에 적합한 형태의 항구 증축 공사, 늘어난 무역량을 관리할 무역 길드 운영 지원 등.
사람들은 앞에 펼쳐진 번영의 길에 환호했다.
마탑이 틀어막고 있던, 세계를 향한 문이 곧 열린다. 그들의 생활은 변하게 될 터였다. 미래가 그들을 기다렸다.
가볍게 입술을 깨물던 그녀는, 이어진 클레멘츠의 말에 멍하니 입을 벌렸다.
“앞으로 펼쳐질 번영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탑을 세웠으니, 이 탑의 이름을 아다만티스의 탑이라 하며 경도의 기준점으로 세울 것이다.”
“와아아!”
눈치 빠른 이들은 시계탑 위쪽의 새 조각상과 오필리어를 번갈아 보았다.
겉으론 제국의 상징을 빙자했지만, 사실 황태자가 저 시계탑의 새 조각상을 저렇게나 공들여 만든 이유는 따로 있을 것이다.
아다만티스는 제국의 상징이자, 레이디 오필리어 그 자체였다.
그들은 얼굴을 붉혔다.
‘가만, 이건 혹시…?’
환호하던 이들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정이 떠올랐다.
황족의 입장에선 값비싼 보석이나 물건 같은 선물이야 거의 무한정 줄 수 있었다.
하지만 황태자는 지금 그녀의 모습과 이름이 붙은 시계탑을 경도와 시차의 기준점으로 만들었다.
세계가 제 연인을 기준으로 돌게 만들다니.
이런 선물은 아무리 제국의 황태자라 하더라도 단 한 번밖에 할 수 없는 선물이었다.
평생 잊지 못할 만큼 멋진 선물을 할 타이밍이 달리 어디 있겠는가.
‘혹시…… 공개 청혼? 드디어 청혼하시려고?’
관습적으로 황족의 연애는 상당히 빠르게 약혼이나 청혼으로 이어지곤 했다. 레오라 남작 영애의 신분이 낮은 데다 긴 시간 병아리 상태로 변해 있었기 때문에 유독 그 기간이 길어진 편이었다.
‘오늘은 정말로 운이 좋군! 이런 귀한 장면을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되다니.’
시계탑 앞으로 모여든 클랏샤 사람들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온 힘을 주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니, 황태자를 마주 본 레오라 영애의 눈은 울망울망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감동하셨나 봐!’
‘황태자 전하! 지금이에요. 어서!’
두 주먹을 불끈 쥐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오필리어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바보가 지금……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거야?’
경도와 시차의 기준점. 세계의 손님으로 와서, 이 세계에 말도 안 되게 존재감이 큰 발자국을 남겨 버렸다.
이렇게 큰 걸 받아 버리면, 도대체 무슨 수로 돌려준단 말인가.
“어떠냐, 오필리어?”
“…….”
어떠냐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묻기는 잘 묻는다.
정말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남들 앞이라 때릴 수도 없고.
이렇게 잔뜩 주기만 해 놓고선, 일이 잘 안 풀리면 헤어질 생각을 하고 있다니.
뭔가 이 상황을 바꿀 방법은, 그의 마음을 바꿀 방법은 정말 없는 걸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기다리다 지친 구경꾼 하나가 불쑥 외쳤다.
“두 분은 언제쯤 혼인하실 생각이신가요?!”
“……?”
“……!”
눈앞의 보랏빛 눈이 놀라서 풀린 걸 보고, 오필리어는 생각했다.
‘혼인이라니, 그래. 젠장! 차라리 청혼해 버릴까?’
결혼으로 묶여 버리면 클레멘츠도 널 위해 헤어져 준다느니 하는 헛소리는 함부로 못 할 것이다.
말도 없이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는 연인을 보고, 또 다른 구경꾼 한 사람이 크게 질문했다.
“밤에 나타나 황태자궁으로 날아갔던 아다만티스는 오필리어 님이신가요?”
“……!”
오필리어의 생각보다도 사람들은 신조의 출현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래, 아다만티스.’
마침 황태자궁의 문장은 아다만티스와 검이었다. 적절한 청혼 멘트도 떠올랐다.
‘어떠세요? 진짜 검은 이미 있으시니, 진짜 아다만티스를 당신의 궁에 늘 두고 사실 생각은 없으세요?’
지금이라면 클레멘츠도 분위기에 취해서 얼떨결에 승낙할지도 몰랐다.
물론 1초 만에 기각당한 생각이지만, 거의 입 밖으로 튀어 나갈 뻔했다.
‘내가 드디어 미친 건가?’
하지만 그 정도로 절박했다. 어떻게든 그의 생각을 바꾸고, 그의 곁에 남아 있을 방법을 찾고 싶었다.
어디 한번 날 버릴 테면 버려 보라고 했지만, 정말 그렇게 될까 봐 두려웠다.
“…….”
클레멘츠의 눈빛 역시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처럼 아름다운 새와 평생을 함께하는 일. 당장 손 뻗으면 닿을 것처럼 느껴지는 고운 환상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를 자신의 미래에 그녀를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실상이야 어쨌든, 다소 떨어진 곳에서 보기에 그들은 다정하기 이를 데 없는 연인이었다.
쾌청한 하늘. 그들 앞에 우뚝 서 있는 시계탑. 달라질 미래에 관한 전망과 환호하는 사람들.
오필리어는 문득 그 모든 것이 불안하다고 생각했다.
왜일까.
그것은 생각 외로 모든 일이 잡음 없이 굴러가는 걸 볼 때에 느껴지는 기이한 불길함과 닮아 있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조금 전 먼 하늘에서 보았던 워프 포탈의 청광을 떠올렸다.
그때, 가볍고 차가운 것이 오필리어의 콧잔등을 스쳤다.
“어?”
그녀도, 그리고 누군가의 놀란 소리와 함께 다른 이들도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부스러기 같은 첫눈이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다.
흩날리는 눈송이가 오필리어의 시야에도 들어왔다. 저를 내려다보는 클레멘츠의 머리카락보다 조금 더 하얀 색깔이었다.
눈이 오는 걸 확인하자 클레멘츠는 시종이 건넨 망토를 오필리어의 어깨에 꼼꼼히 둘러 주었다.
“벌써 눈이 올 때인가요…….”
아무래도 조금 이르지 않나 싶었다.
기다리던 공개 청혼이 없자, 사람들은 조금 실망해서 흩어졌다.
항만 사무소장과 남은 이야기를 나누고, 주변을 정리하고 돌아가려 할 때였다.
“전하!”
둘 모두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카시스였다.
황궁에 있어야 할 그는 말을 타고 급히 달려온 모습이었다.
“속히 환궁하셔야 합니다.”
“어차피 막 돌아갈 참이었다만.”
카시스는 잠시 말을 멈추고 가쁜 숨을 골랐다.
그 말이 맞았다. 기다리면 어차피 돌아오리란 건 카시스도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급히 왔다는 건 황궁에 일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황궁에 중요한 손님이 와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