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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149)화 (149/218)

149화

“다들 모였군요. ‘그분’께서는…?”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손을 들었다.

“오, 오오.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그러하리니. 시미크의 보살핌이 깃들기를.”

그노시드 대주교가 두 손을 모으자, 자리에 앉아 있던 다른 성직자들도 따라 했다.

“2황자님께 시미크의 가호가 있기를!”

그들이 모인 곳은 교회당 건물이 아닌, 대주교가 소유한 저택이었다.

그러나 내부는 지나치게 세속적이었다.

사치스러운 장식들하며, 고급 목재 테이블 위에 접대용을 빙자한 위스키 병까지.

그러면서도 대주교의 집이란 티는 내야 하겠는지, 벽면엔 커다란 눈송이 조각이 걸려 있었다.

시미크교의 눈송이는 교단의 상징이자, 눈송이처럼 깨끗한 성직자의 청빈을 뜻하기도 했다.

‘겉보기엔 찬란하다만, 안 어울리는군.’

메디프는 속으로 간단히 평했다.

머리가 벗어지고 얼굴빛이 불콰한 사제가 슬그머니 위스키 병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다 슬그머니 메디프의 눈치를 보았다. 그는 다 안다는 듯 싱긋 웃었다.

“마셔요.”

“허헛. 역시 너그러우십니다!”

발렌틴 주교는 안심하며 술을 따랐다.

“과연 이 나라를 이끌어 가실 분답습니다. 꽉 막힌 손위 형제와는 너무나도 다르시지요. 껄껄!”

속 보이는 찬사였다. 메디프는 다만 매끄럽게 웃었다.

“허! 나 원 참.”

좀 더 나이 들고 깡마른 다른 성직자는 발렌틴 주교에 대한 경멸을 숨기지 않았다.

염치없이 술을 탐하는 데다, 대놓고 아첨까지. 어찌 이런 천박한 모습이란 말인가?

그러나 본인은 깨닫지 못했지만, 리베르틴 추기경의 몸에선 술 냄새 대신 또 다른 수상쩍은 냄새가 났다. 통풍이 안 되는 퀴퀴한 실내의 잡내와 싸구려 사향내가 섞인 향이었다.

게다가 메디프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쓰는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디 꽉 막히기만 했답니까? 그 자리에 있어선 안 되는 정체를 숨기고 있으니 더욱 역겨운 꼴이지요!”

“정체라니요?”

“모르셨군요. 사실은…….”

추기경은 쉽사리 밝힐 수 없는 비밀인 듯 메디프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다름 아닌 메디프 본인이 퍼뜨렸던, 황태자와 죽은 황후에 대한 소문들이 흘러들었다.

그것도 견디기 힘들 정도로 저급하게 부풀려진 이야기들이었다. 어디서 듣고 왔는지 알 만했다.

“제가 희귀한 정보통으로부터 특별히 얻어 낸 겁니다.”

추기경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럴 수가.”

메디프는 경멸감을 숨긴 채 성공적으로 놀라는 척을 해 보였다.

“클라티아의 황족으로서 결코 좌시해서는 안 되겠군요.”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교단은 이 문제를 확실히 짚고 넘어갈 것입니다.”

대주교가 선언을 내리듯 엄숙히 말했다.

한 잔을 비우고 두 잔째를 채우고 있던 발렌틴 주교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세 사제는 이미 황태자의 치부에 대해 파악이 끝났다.

“악마와 관련이 있는 자에게 감히 제국의 황태자 자리가 합당하겠습니까?”

대주교의 주도 아래, 클랏샤 소속의 교단은 황태자의 발을 걸어 넘어뜨릴 준비로 분주했다.

“가능한 확실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신성한 국혼을 차질 없이 치를 수 있도록 말입니다.”

국혼이란 당연히 현 황제와 황비의 정식 혼인을 뜻했다.

서로를 애물단지로 여기는 신성 왕국의 본 교단과 제국 사이에서, 클랏샤 소속 교단은 독자적인 생존 수단을 마련했다.

그건 바로 클라우디아 황비 같은, 독실하면서 힘 있는 존재였다.

황비는 소박하게 살아온 지난 세월 내내 교회에 상당한 액수의 기부금을 바쳤다.

그건 성직자이면서 수도에 화려한 저택을 지을 만큼 과시욕이 강한 대주교에겐 절실한 자금원이었다.

술과 도박에 중독돼 민간 기부금에까지 번번이 손을 대는 발렌틴 주교에게도.

석연찮은 업장에 곧잘 방문하는 리베르틴 추기경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황비가 황후가 되고, 2황자가 장래 황위에 오른다면? 그들은 더욱 안락하고 걱정 없는 성직 생활을 누리게 될 터였다.

황비가 원하는 것은 분명했다.

왕관.

그녀가 그간 위선을 떨었느니, 야심을 숨겨 왔느니 하는 건 그들에게 하등 중요치 않았다. 이미 황비의 의사는 절대적이었으며, 굳이 더 따져 볼 필요가 없는 선(善)이었다.

왕관이 필요하시다면, 빼앗아 건네는 수밖에. 그리고 왕관의 주인을 쓰러뜨리기 위해 그들이 가진 최선이자 최고의 무기란 ‘악마로 낙인을 찍는 것’이었다.

“잘됐네요.”

메디프는 대충 대답하고 크리스털 잔에 제 몫의 술을 부었다. 독한 액체를 털어 넣자 목구멍이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저어- 황자님. 그런데 그 여자는 어떻게 할까요? 그 새 말입니다.”

그 새.

메디프는 잔을 내려놓았다. 쇄골 아래 가슴 한쪽이 쓰라렸다.

그 새를 아끼는 어느 흉포하고 못된 짐승이 할퀴고 간 상처였다.

“현시점에서 오필리어를 안전하게 지키려면 반드시 내가 필요해요.”

“…….”

“왜냐하면 제 어머니는 반드시 그녀를 해치려 할 테고, 우리 쪽에서 오필리어의 안전을 걱정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만찬을 빙자한 협박 장소에 초대받은 밤.

흑표범은 마음에 안 드는 듯 그르렁거리더니, 그의 가슴에 발톱을 박아 넣었다. 메디프는 신음을 삼켰다.

치명상이 되지도, 그렇다고 너무 가볍지도 않은 상처였다.

다음 날 그 흑표범은 혼우드로 돌아갔다.

아침이 되어서야 거친 붕대와 직접 만든 듯한 연고를 대충 던져 주고는.

그녀가 발톱을 내어 긁은 건, 어찌 됐건 경고의 의미일 것이다.

네가 한 말을 반드시 지키라는 의미든, 네놈 따위 믿지 않는다는 뜻이든.

“오필리어 양 말이군요.”

“예, 예에.”

성직자들은 메디프의 가라앉은 분위기를 ‘그 거슬리는 여자 말이군.’ 정도로 해석했다.

“전하와 황비 마마께 그 여자가 방해되리란 건 알고 있습니다.”

“얼마나 치워 버리고 싶으시겠습니까? 황태자에게 그 여자가 날개를 달아 준 셈이나 마찬가지니까요. 하지만…….”

그들은 초조한 눈빛을 교환했다.

밤하늘에 성체 아다만티스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다. 그로 인해 오필리어의 인기는 실시간으로 치솟고 있었다.

단순한 조작으로 치부하기엔 목격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평소처럼 병아리였다면, 신수가 아니라 마수 새끼일 거다, 흑마법을 쓴다는 황태자처럼 그 여자도 이단이다, 하고 우겨 대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늘의 새 아다만티스는 시미크교가 정식으로 인정한 신수 중에 하나. 고로 그 여자는 지금 교단조차 건드릴 수 없는 존재였다.

대주교는 안절부절못하며 그 사실을 메디프에게 털어놓았다.

2황자는 뭐가 대수냔 듯 나른히 되물었다.

“그래서요?”

“그, 그러니까…….”

메디프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제국의 신조라는 정체가 밝혀졌다곤 해도 오필리어 레오라는 여전히 작은 여자였다. 조금 엉뚱하고, 용감하고 다정한.

이들은 고위 성직자라는 것들이, 안 그런 척 작은 여자 하나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여자가 황자 전하와 황비 마마의 앞날에 방해가 된다는 건 확실하오니……. 원하신다면 사고로 위장해 보도록 하지요.”

가라앉은 분위기를 보다 못한 추기경이 앞으로 나섰다.

겉으론 골치 아픈 일을 나서서 처리하겠다는 투였으나, 실상은 이로써 공을 세워 장차 황후가 될 황비에게서 더 뜯어내겠다는 의중이었다.

메디프는 그의 비열한 표정에 속으로 질색했다.

‘사고로 위장해 사람을 죽이겠다는 말을 선심 쓴다는 듯 하고 앉았군.’

그가 어떤 업소에 드나드는지 고려하면 놀랍지도 않았다. 고결한 체하는 리베르틴은 뒷골목에선 흑암의 성직자라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우습고 불결했다.

도무지 발을 들이기 싫었지만, 이미 그의 세상이기도 했다.

그리고 메디프는 이 어두운 울타리 안쪽에서 작은 새 한 마리를 빼내야 했다.

“글쎄. 내 생각엔 다른 방법이 있을 것 같군요.”

“황자님, 다른 방법이라면 어떤……?”

“거꾸로 이용하는 거지요. 말씀대로 귀족이고 평민이고 레이디 오필리어를 좋아하는 데다, 황실조차도 제국의 상징인 그녀를 포기하고 있지 않으니.”

차가운 보랏빛 눈이 익숙하게 접혔다.

“차라리 ‘우리’ 편이 될 수 있다면 가장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 여잔 황태자와 사이가 굉장히 좋다고 들었는데…….”

“세상에 둘도 없이 지극하다가도, 돌아서면 남보다도 못한 게 연인 관계 아니던가요.”

차갑게 말한 메디프는 이어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더 머리를 써 보세요.”

대주교, 추기경, 발렌틴 주교. 생긴 것도 제각각인 셋이지만 어리둥절한 표정은 조금 비슷했다.

“흑마법에 빠진 황태자가 순수하고 신령한 새를 붙잡고, 가두었다. 이에 황실과 교단은 신의 뜻과 제국의 정의에 따라 대응함은 물론, 황실의 새 아다만티스를 보호했다.”

차기 황위를 둘러싸고 대립이 이어지면, 아무런 기반이 없는 오필리어는 제일 먼저 나가떨어질 터였다. 불과 방금 전 리베르틴 추기경이 ‘사고사로 위장해 없애 버리겠다.’라고 한 것처럼.

그러느니 이편이 나았다. 어차피 벨라루시아 모나한이 보호하라고 요청한 건 오필리어 레오라뿐이었다.

형제와의 대립은 이미 시작됐고 도무지 피할 수도 없었다.

“오오……!”

“과연! 묘책이십니다!”

메디프의 속을 알 길 없는 성직자들은 박수라도 칠 기세였다.

‘어머니를 닮아 영민하시군!’

한시름 놓은 기분으로, 대주교는 책상 위에 놓인 두루마리를 집어 들었다.

“그럼, 다음은 ‘그분’이 오시고 나면 보고를 올리는 일이군요.”

보고서 두루마리엔 황태자를 참소하는 내용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밤새워 작성한 그 내용을 보고 있노라니 그노시드 대주교의 기분은 다시 나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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