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그 뒤로도 새들은 저들끼리 한참 음식 얘기를 했다.
『요즘 먹이 구하기가 힘들어졌어. 숲 남쪽에는 아직 나무 열매가 제법 남아 있다던데.』
『북쪽 항구에 사는 갈매기들은 인간들이 던져 주는 음식을 거저 받아먹는다더라.』
『왕께서는 요즘 뭘 먹고 지내세요?』
어…… 나? 주로 빵과 고기인데. 뭐라고 대답하지?
하지만 내 침묵을 나름의 위엄으로 받아들인 것인지, 새들은 또다시 저들끼리 대화를 시작했다.
『까마귀 말대로 평범한 걸 드시지는 않을 거야.』
『아까 물어보신 걸 들으니 페리윙클? 그건 인간들의 말 같았어.』
『인간들에게 관심이 있으신 거예요? 그럼 좀 아는 놈이 있을 텐데……. 야!』
황조롱이가 부른 건 옆 나무에 앉아 있던 오리였다.
『너 북쪽에서부터 아주 아주 먼 길을 날아온다며? 본 게 많을 텐데 인간에 대해서도 잘 알지 않아? 뭔가 해 드릴 말 없어?』
“꽉꽉!”
『저 녀석 뭐라는 거야…….』
이쪽 나무의 새들이 일제히 오리를 향해 눈을 흘겼다. 북쪽에서 날아왔다는 오리와는 사이가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텃새들이 텃세 부리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는 오리가 뭐라고 하는지 들었다.
『눈송이의 여왕이 움직였어요.』
들어도 무슨 소린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어지러운 새소리 가운데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다. 황태자궁의 후원에 이렇게 깊이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가끔 이 숲에 오는 사람이에요!』
『저는 저렇게 잘생긴 인간은 본 적이 없어요.』
『조용히 해 봐.』
『…….』
새들은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내 주변뿐 아니라 후원 안에 있던 모든 새들이 부리를 다문 듯했다.
기묘한 정적 속에서 클레멘츠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 * *
“……진짜 싫어.”
떠나는 그녀를 잡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뻣뻣하게 굳어 있던 그는 바닥에 떨어진 금붙이를 주워 들었다.
“전하.”
“오필리어는?”
“걸어서 돌아가려 하시기에, 우선 마차로 모셨습니다.”
“그리고?”
“……울고 계셨습니다.”
그는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으며 자신을 책망했다.
제기랄.
“알겠다.”
꿈에 젖은 눈의 오필리어. 따사롭게 미소 짓는 오필리어. 그만을 좋아한다고 말해 주던 오필리어.
떨리는 표정으로 시계탑을 올려다보던 그녀는 울며 뛰쳐나가 버렸다.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클레멘츠.”
그녀의 입술에서 사랑한다는 말이 나오면 기쁠 줄로만 알았다. 그는 내내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얼얼한 느낌으로 황궁에 돌아왔다.
“오필리어는?”
일거리와 서류들을 기계적으로 처리한 뒤 피곤한 낯으로 물었다.
“막 잠드셨어요. 그렇게 슬퍼 보이는 모습은 처음이셨습니다.”
“수프 한 그릇도 겨우 드셨어요.”
“……알겠다. 나가 봐.”
클레멘츠는 메이드들의 눈에서 숨기지 못한 약간의 힐난을 읽어 냈다. 그들은 어째서 그들의 아가씨가 세상을 다 잃은 듯 힘이 없는지 모를 것이다. 아무 것도 묻지 못했으니.
수없이 고민하다가 오필리어의 방문을 열었다.
직접 공들여 닦은 장신구를 협탁에 내려놓았다.
곤히 잠든 그녀는 침대에 누워서도 울었는지, 귀여운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전부 자신 때문이었다. 행복해서 날아갈 듯하던 그녀를 그가 순식간에 우울 속으로 처박아 버렸다.
‘네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으면 좋겠어.’
자신은 또다시 숨 쉴 틈 없는 진창에 굴러 떨어지더라도.
차라리 오필리어가 그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그가 원하는 대로 안온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으리라.
그의 손가락이 아주 조심스럽게, 금빛 속눈썹에 맺힌 눈물방울을 닦아 냈다.
“나쁜 자식…….”
클레멘츠는 흠칫 얼어붙었다. 웅얼거리며 베개 속으로 파고드는 그녀가 잠꼬대를 했음을 확인하고 나서도 심장은 여전히 쿵쾅거렸다.
“그래. 내가 나빠.”
정말로 그는 혼자서 사랑하려고 했으니.
클라우디아 페리윙클이든, 메디프든.
혹은 황제든, 귀족들이든, 이 제국 전체라도.
오필리어를 상처 입힐 수 있는 존재는 전부 배제하고 싶었다.
그러지 못한다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대는 저 아이를 그리도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왜 다치도록 내버려 두지?”
“당신은 안 그러겠다고 맹세할 수 있나요?”
벨라루시아 모나한과 한 말들은 옷에 붙은 가시처럼 그를 따라왔다.
“오필리어를 조금이라도 아프게 하거나, 다치게 하거나, 울게 하거나 짜증나게 하면 역시 당신을 죽여 버리겠습니다.”
잘난 척 떠들고도 결국 그녀를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한 데다, 울려 버렸다.
“황태자 전하. 어……?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침 보고 자료를 들고 들어오던 카시스가 놀라서 물었다. 클레멘츠는 이제 아무 것도 아니라며 허세 부릴 처지도 아니었다.
“오필리어는 또 나를 피해 다니겠지.”
“…….”
머릿속이 온통 오필리어로 꽉 차 있었다. 제 잘못인 걸 알았지만 하염없이 그녀의 뒷모습만 볼 생각에 고통스러워졌다.
“저, 그분과 관련된 보고입니다. 전하.”
카시스는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하룻밤 사이 수백 건의 목격담이 범람하는, 전설 속의 신조.
클레멘츠는 그 존재를 바로 눈앞의 나뭇가지 위에서 보고 있었다.
저 도도한 모습이 그의 손바닥 위에서 꼼지락대던 병아리라고, 누가 믿을까.
햇살을 등지고 내려오는 모습에, 빛에 감싸여 사랑스러운 여인으로 변하는 과정까지.
넋이 나가도록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더는 귀여운 병아리가 아니라서 어떡하죠?”
오필리어는 부러 밝은 소리로 운을 떼었다.
클레멘츠는 피곤해 보였다. 눈가에 살짝 그늘이 지자 잘생긴 얼굴에 퇴폐미가 더해졌다.
언제나 그려낸 듯 완벽하던 그가 이만큼이라도 흐트러진 건 마음고생이 심하기 때문일 것이다.
‘속상하게 왜 이런 모습인 거야?’
지금이라도 뭔가 참신한 헛소리를 해서 그를 웃게 만들고 싶었다. 안겨서 울상을 지으며, 화내서 미안하다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단지 감상에 떠밀려 없던 일로 할 거라면 애당초 화를 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전설의 국조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
다행히 클레멘츠도 피식 웃었다. 오필리어는 하얀 드레스 자락을 쥐며 평정심을 붙들었다.
“축복을 청해도 되려나?”
“어떤 축복이요?”
“어느 아가씨에게 늘 잘 보이게 해 달라고 빌고 싶은데.”
‘이 인간이 끝까지 정말.’
오필리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황태자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그런 거에 소원 낭비하지 마세요!”
클레멘츠는 붕붕 휘둘러지는 주먹에 몸을 내어 주곤 그녀를 안아 들었다.
그는 연못가에 불규칙적으로 놓아진 도토리, 나무 열매, 아직 간헐적으로 꿈틀대고 있는 벌레 따위를 황당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곤 조금 떨어진 벤치에 제 겉옷을 깔고 오필리어를 앉혔다.
야무지게 얼굴만큼은 피해서 때리던 오필리어가 씩씩대며 말했다.
“전하 생각이나 하세요. 이제 애매한 병아리도 아니고, 어엿한 아다만티스가 되었잖아요. 당신이 가진 패니까 이용하고 방패로 삼으세요. 잘하실 수 있잖아요?”
“나더러 너를 이용하라는 소린가?”
“하세요. 이제 누가 전하를 함부로 건드리겠어요?”
저를 이용하라 외치면서, 오필리어는 그의 어깨를 꼭 쥐었다. 내쳐질까 두려워하는 새가 횃대를 꼭 붙들듯이.
“아니, 너를 이용하지 않아.”
클레멘츠는 제 손바닥 안에 그녀의 손을 감추었다. 오필리어는 그에게 마주 웃어 줄 수 없었다.
“전하의 생각은 결국 똑같군요.”
“그래. 네게는 조금의 부담도 지울 수 없다.”
오필리어는 다시 주먹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피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모습에 기가 차서 내려놓았다.
‘맞아도 상관없다는 거야, 전혀 안 아프다는 거야?’
어느 쪽이든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기껏 하찮은 병아리가 아니라 멋들어진 새로 변할 수 있게 됐는데, 이래서는 무슨 쓸모가 있는지.
“궁금한데요.”
“무엇이?”
“만약 저를 놓아주시게 되면, 제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돼도 상관없어요?”
“…….”
보석 같은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오필리어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재차 질문했다.
“사랑하고, 아이를 낳고, 함께 살아도 관계없어요?”
“…….”
굳이 더 말하지 않아도, 클레멘츠의 머릿속에는 그런 그림이 그려졌다.
한 남자가 있다. 그는 클레멘츠와 달리 오필리어에게 못된 저주를 걸지도 않고, 계약을 빌미 삼아 발을 묶지 않으며, 덩달아 휩쓸리면 그녀마저 위험해질 만큼 거창한 적을 두고 있지도 않다.
성실하고 자상하며 소박하다. 오필리어가 혼우드에서 계속 살았으면 꿈꿨을 만한 남편감이다.
오필리어는 그자에게 달려들어 안기고, 내리쬐는 햇볕처럼 웃는다. 그에게 그랬듯이. 입맞춤을 나눈다.
각오한 일이었으니 괜찮아야 한다. 허나 그렇지 않았다. 클레멘츠는 존재하지도 않는 그 남자를 찢어 죽이고 싶었다.
오필리어는 그에게서 일렁이는 위험한 감정을 읽었고, 굳게 닫힌 입술도 보았다.
“……아니라고 하지는 않네요.”
목소리가 잠겼다. 침묵하는 그가 미웠다. 무엄하지만 이대로 뺨이라도 갈기고 또다시 도망치고 싶은 욕구가 마구 치밀었다.
하지만 오필리어는 그러지 않았다.
“시계탑을 공개할 땐 같이 갈게요.”
“……고마워.”
얼굴을 붙잡는 작은 두 손에 클레멘츠는 순순히 따라붙어 주었다.
“그리고 그 뒤에도. 그다음에도.”
타오르는 금빛 눈동자가 그를 잡아챘다.
“당신 멋대로 절 떼어 놓고 싶어 한다고 고분고분 그래 주리라는 생각은 버려요. 저는 당신을 좋아하는 제 마음에 책임을 질 거예요. 끝까지, 내가 합당하다고 판단한 대로.”
순간, 영구한 석영질의 보석 같던 클레멘츠의 눈에도 금빛 불티가 튀었다.
“어디 한번 저를 포기해 보세요. 그게 그렇게 쉬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