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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147)화 (147/218)

147화

매섭게 다가오는 그녀에게 밀려, 계속 뒷걸음질 쳤다.

“말로 하면 안 돼요?”

“안 돼. 네놈은 영악하니까 말로는 못 이겨.”

요사이 예의를 갖췄던 호칭은 홀랑 원래대로 돌아갔다. 그게 오히려 그녀에겐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이윽고 그의 등 뒤에 벽이 닿았다.

“왜 이래요? 무섭게.”

“아직 덜 무서운 모양이네.”

저질러 온 무례를 제대로 따지고 들면 이 여자는 최소 재판소, 최대 감옥에 있어야 했다. 낮게 쫙 깔린 목소리는 매혹적이었다.

소름이 메디프의 등을 타고 올라왔다.

“네가 황비와 짜고 외가를 거느리고 무슨 헛짓거리를 하든 상관없어. 제국을 팔든, 황제를 암살하든.”

“……컥.”

그녀는 메디프의 목을 짓눌렀다. 하얗고 고우나 자수를 놓기보단 활을 당기는 데 능한 손이었다.

“하지만 오필리어를 건드리면? 난 네놈의 잘난 몸을 갈기갈기 찢어 놓을 수 있어. 그렇게 될 거야. 검은 포식자? 하, 세상의 모든 마수가 네놈을 쫓고 몰아넣게 만들어 줄게.”

저보다 작은 여인이었다. 그럼에도 맹수의 사냥감으로 점 찍혀 버렸다는 직감이 메디프를 지배했다. 그는 저를 오롯이 보는 푸른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압도당해서. 여러 의미로.

“나는 마녀야.”

붉은 입술이 속삭였다.

“너는 마녀가 아니야, 벨라.”

오필리어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그 말이 맞았다.

‘하지만 너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마녀가 될 수 있어.’

“내 목을 치고 매달아, 뒤싱겐. 그깟 것은 이미 당해 봤으니 전혀 두렵지 않아. 오필리어를 괴롭혔다간 수십, 수백 년간 네놈에게 달라붙는 원혼이 될 줄 알아. 그 역시 두렵지 않아.”

메디프는 직관적으로 알아챘다. 저것은 허언이 아니다.

그녀를 둘러싸고 그를 매료시키던 신비의 정체가, 이제 막 모습을 드러내며 그의 목에 발톱을 박아 넣으려 했다.

벨라루시아는 산 채로 그를 집어삼킬 수 있었다. 그럴 마음까진 없었지만, 이제 하나뿐인 친구를 위해 망설임을 없애 버렸다.

전율이 그의 몸을 관통했다.

동시에 겨울 저녁의 마지막 햇살이 사라졌다.

“……벨라루시아 레우니스 모나한.”

대답 대신 포효가 돌아왔다.

“친애하는 레이디께서 나를 먹잇감으로 선택해 주셔서 영광인걸요.”

군데군데서 새어 나온 피가 메디프의 옷을 적시고 있었다.

‘전혀 사정을 봐주질 않네. 무자비한 레이디.’

쓰게 웃는 모습마저도 못 미더운지, 그녀가 다시 한번 으르렁댔다. 기겁스럽거나 무섭긴커녕 아름다웠다.

‘내가 미쳤지.’

메디프는 빠르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변경의 백작이 숨기고 있던 비밀은 그렇다 쳐도, 오필리어를 위한다고 이렇게까지 하다니.

‘목숨을 걸고 그를 비호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면면을 떠올려 보았다. 어쩐지 공허해졌다.

“걱정 말아요.”

푸른 눈이 완고하게 그를 쏘아보았다. 그 색깔과 분위기는 인간일 때와 흡사해서, 메디프는 미소를 지었다.

벨라는 이미 그를 오필리어의 적으로 간주했다. 어떻게 알았을까. 증거는 흘리지 않았다고 자신하는데.

“위험하게는 하지 않을 테니까. 나도 오필리어를 좋아해요. 그녀가 다치는 건 싫고. 그러니까 당신이랑 같이 구하러 갔던 거 아니겠어요?”

그는 발톱에 짓눌리면서도 멀쩡하게 말하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아니, 말을 바꾸죠. 오히려 현 시점에서 오필리어가 안전하려면 반드시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어머니는, 오필리어까지 황태자와 함께 추락시키고 싶어 했다. 단지 너무 가까이 붙어 있었다는 이유로.

그 냉혹한 그물에서 어린 새를 빼내어 둘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어떻게 생각해요? 이것…… 윽, 이것 좀 놓죠?”

흑표범 아가씨는 아까부터 전혀 듣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메디프는 그녀를 따라 창문 쪽으로 고개를 젖혔다.

밤하늘에 금빛 궤적이 지나갔다.

그는 희미하게 흔들리다가 창틀 너머로 사라진 저 꽁지깃을 본 적이 있었다.

* * *

“오필리어니임! 그게 사실인가요? 어젯밤 클랏샤 상공에 상서로운 금빛 새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파다해요!”

“아…….”

“직접 봤다는 사람들도 아주 많고요. 목격자들 말로는 황태자궁 쪽으로 갔다던데…….”

어젯밤 밤하늘을 주유하다가 날아서 황궁으로 되돌아왔다. 다행히 방 창문이 열려 있었다지만, 목격자가 한둘이 아닐 것 같긴 했다. 그리고 역시나였다.

아닌 밤중에 황금빛으로 발광까지 하고 다녔으니 명시성마저 죽여줬겠지.

망할 합체 마녀.

“혹시, 오필리어 님이신가요……?”

“그 모습은 틀림없이 신성한 국조(國鳥)였대요! 오필리어 님은 아직 어린 모습이지만 아다만티스가 맞으시잖아요?”

“성장할 계기가 있으셨던 건가요?”

메이드들의 회색 눈은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어제 저녁만 해도 우는 나를 걱정하고 있었지만, 놀랄 만한 소식에 걱정이 날아가 버린 모양이었다.

그럴 만하다. 나도 그러니까.

“으음, 글쎄요.”

나는 대답을 뭉갰다.

그들의 말이 맞았다. 변신한 나는 그 거창한 새로 성장을 마쳤다.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황급히 인간으로 돌아왔다. 기껏 멋있는 모습을 갖추고 날 수도 있게 되었는데, 막상 이 모습을 남들에게 드러내도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입을 다물자 메이드들도 더는 묻지 못했다.

치장을 마쳐 준 그들이 나간 뒤, 협탁 위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

시계탑 앞에서 클레멘츠에게 던진 팔찌와 귀걸이였다. 먼지와 진흙이 깨끗하게 닦여, 바닥을 구른 흔적이라곤 없었다.

유렌과 카렌이 놓고 간 건 아니었다. 그들은 언제나 뒷정리를 말끔하게 하니까.

그렇다면 이걸 놓고 간 사람은 하나밖에 없었다.

내가 떠난 자리에서 장신구를 주워 들었을 클레멘츠를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상처받은 표정이 계속 생각났다.

“하…….”

일단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바깥 공기라도 쐬면서 생각을 좀 해야 할 것 같았다.

황태자궁의 후원. 클레멘츠에 카시스까지 합세해서 병아리 피크닉을 오던 곳이었다.

계절에 맞춰 심은 붉은 리코리스가 서리를 맞아 조금 시들시들했다.

여전히 인적이 드물었다.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걸 몇 번씩이나 확인하고 나서 모습을 바꾸었다.

“황금색 송이버섯.”

작게 말하기 무섭게 몸이 위로 떠오르고, 빛에 감싸이면서 내려앉았다. 시야는 병아리일 때보다 훨씬 높았다.

『워후.』

기다란 다리와 큰 날개에서 힘이 느껴졌다. 짧은 다리로 종종대던 걸음걸이는 황새의 걸음처럼 저절로 도도해졌다.

뭐야, 이거 뭐야. 같은 새라고 봐도 되는 건가?

기다란 목으로 이곳저곳 둘러보다가 피크닉 때 봤던 대리석 연못을 발견했다.

추위 탓으로 잉어들을 옮겨 뒀는지 연못 안쪽엔 투명한 물뿐이었다.

표면에 살얼음이 낀 연못에 내 모습을 비춰 보았다.

부드러운 금빛 볏이 달린 머리는 정면에서 보면 다이아몬드형이었다. 길어진 목 가운데엔 원래 내 몸에 있는 여섯 꽃잎의 문양이 보였다.

일곱 갈래로 갈라진 꽁지깃이 드레스 뒷자락처럼 길게 늘어졌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희미하게 비친 빛에도 온몸이 화려하게 빛났다.

누가 봐도 평범하지 않은 새였다.

정작 나는 그냥 평범한 사람일 뿐인데. 부서지지 않는 영원함이나 번영을 가져다줄 힘은 없었다.

이제 나는 어떡해야 하는 걸까?

『허억…….』

……뭐야?

진지한 고민 중인데 난데없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낸 소린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내가 지금 꿈꾸나? 헛것을 보나?』

『아니, 나에게도 보여.』

『저기서 뭐 하시는 거지? 물 마시나 봐!』

『멍청아. 우리도 마시는 평범한 물을 저분께서 마시겠니? 수면에 비친 자신의 웅장한 모습을 점검하시는 거겠지.』

……내가 드디어 미쳤나? 이 목소리 어디서 들리는 건데?

『엄마, 저 새는 뭐야?』

『쉿, 말조심하렴. 저분이 바로 우리의 왕이시란다.』

긴 목을 들어 주변을 훑어보자, 수풀에 숨어 있던 기척들이 일시에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잠시 뒤, 멧비둘기 한 마리가 덤불 새에서 쑥 튀어나왔다. 입에는 반질반질 예쁜 도토리가 물려 있었다.

『받아 주세요. 제 정성입니다.』

『……?』

연이어 노간주 열매, 어딘가에 자라난 버섯, 지렁이, 메뚜기 등이 연못가에 바쳐졌다. 나는 얼떨떨하고 조금은 참담한 심경으로 그걸 지켜보았다.

내게 왜 이러는 거지?

『야, 이 바보들아. 천상의 새에게 이따위 것들이 귀해 보이긴 하겠냐? 반짝이는 걸 갖다 드려야지. 반짝이는 걸!』

마지막으로 우쭐대던 까마귀 녀석이 은빛으로 반짝이는 단추를 내려놓았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저 단추는 내 모자 장식에 달려 있었으며, 기껏 만들었는데 어딘가 떨어져 버렸다고 유렌이 무척 찾던 거였다.

그걸 네놈이 가져갔었구나.

『으하하. 영광입니다.』

가늘게 뜬 내 눈빛을 뭐라고 해석했는지. 까마귀가 깃털을 좍 펴며 기뻐했다. 그래 마음대로 생각해라.

새들의 왕. 그저 아다만티스에게 붙는 수식어 중 하나라고만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 말 그대로인 모양이었다.

인간의 것이 아닌 다양한 목소리. 마수들의 목소리를 듣는 벨라도 이런 기분일까?

새들이 많이 앉아 있는 한 아름드리나무의 우듬지에 앉았다.

비행으로 내 몸을 띄우는 건 숨 쉬듯이 쉬웠다.

새들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건 상당한 메리트가 아닐까? 당장 궁금한 걸 물어보았다.

『혹시 황태자에 대해 들은 거 있어? 혹은 제2황자라거나, 페리윙클 가문이라거나.』

『황…… 태……?』

멧비둘기가 꾸룩거리며 대답했다.

『도시 북쪽 바닷가를 날다가 들은 적이 있어요. 어떤 노파가 말려 둔 생선을 가리키면서 그렇게 말했던 것 같은데…….』

『하…… 그게 아니야.』

『히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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