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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145)화 (145/218)

145화

아마도 가벽을 둘러치고 한 공사는 저것을 세우기 위한 것이리라. 저 커다랗고 우아한 시계탑을.

견고한 은빛 몸체 위, 금빛 새 아다만티스가 시계에 올라앉아 있었다. 바다의 물결이 시계를 감싸고 부드럽게 떨어져 내렸다.

그 찬란한 아우라에 압도되어 한참을 말없이 서 있었다.

“이, 이게…….”

“마음에 드느냐?”

곁에 다가온 그가 물었다. 뭐? 마음에 드느냐고?

그런 가벼운 말로 넘어갈 수 없는 선물이었다.

시계. 그건 그가 관여하는 원거리 무역에 내가 제시한 해결책의 핵심이었다. 시간, 그리고 시계.

이 세계엔 저디스 백작 같은 사람들이 많았다.

여성의 공은 쉽게도 남자에게 잡아먹힌다. 남편이, 오빠가, 혹은 아버지가 해 주었겠거니. 그렇게 어떤 성과가, 이론이, 저작물이, 주인을 떠나 엉뚱한 사람의 영광이 된다.

클레멘츠 역시 경도 계산법이 자신의 것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모두가 믿었을 테고 나는 아무 반박도 하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는, 나의 공로를 그 누구도 좌시하지 못하도록 수도 한가운데 박제해 버렸다.

시계탑은 전체적으로 아름다웠지만 가장 위의 새가 있어 무시무시한 생명력을 얻었다.

유려한 몸체와 섬세하게 묘사된 날개. 잠시 눈을 떼면 그대로 날아가 버릴 듯했다.

저 새는 제국과 황실을 상징했지만, ‘마스코트’이자 ‘진짜 아다만티스’인 나였다.

그가 가져올 기회와 번영은 언제나 나와 함께 기억될 것이다.

조금만 지나면 황궁, 아카데미, 수도의 북면을 감싼 바다처럼 클랏샤의 상징이 될 이 탑과 함께.

사람의 수명에 해당하는 시간이 수차례 지나가고, 마침내 이 도시가 완전히 무너져 내릴 때까지.

“너는 떠날 곳이 있지만 난 여길 벗어날 수 없어. 그래서 이곳 클랏샤가, 네가 머물고 싶은 곳이 되었으면 했다.”

들을수록 현실감이 사라져 갔다. 나를 위해서 이 도시 전체가 바뀌어 갔다.

“이 시계탑도 마찬가지다. 너로 인해 변화된 세상이니, 너의 모습을 담고 있지. 조만간 사람들 앞에서 이 탑이 어떤 의미인지 공개할 생각이다.”

금빛 솜털과 깃털이 내 안에 꽉 들어차 나를 내리누르고, 두둥실 떠오르게도 했다.

“……너도 함께 자리에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래 주겠느냐?”

그의 눈 색은 보랏빛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바다만큼 깊고 화톳불처럼 따뜻하다고 생각했다.

함께해 주겠느냐고?

그가 원한다면 몇 번이고, 언제라도 함께할 거다. 하지만 나는 내밀어진 손을 잡지 못하고 내려다보았다.

“클레멘츠.”

“그래.”

그냥 그 손을 잡아. 그가 주는 것을 받아. 네가 그저 행복하고 편안하기만을 바라는 남자를 받아들여.

깨고 싶지 않을 만큼 달콤한 꿈이다.

“……클레멘츠.”

“응, 오필리어.”

“궁 밖으로 벨라를 만나러 갔을 때 이상한 말을 들었어요.”

클레멘츠의 표정에 균열이 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금방 달콤한 미소가 덧씌워졌다.

“어떤 말이지?”

“당신이 악마를 소환한 건, 어머니와 같은 부류이기 때문이래요.”

“…….”

“좀 더 악의적인 소문도 있었어요. 저에 대한 것도 있었고.”

내밀어졌던 손이 내려갔다. 그의 얼굴을 온통 수놓던, 손에 잡힐 듯하던 행복감이, 흩어지듯 사라졌다.

얄팍하게 뿌려 둔 설탕 가루 같은 것들이 가볍게 툭툭 털려 나가는 듯한 광경이 슬프게 느껴졌다.

“어느 겁 없는 놈들이 너에 대해 떠들고 다녔지?”

“메디프 황자님께서 소문에 개입하신 듯해요. 그리고 교단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황제나 황태자는 물론, 황실에 적을 두는 것마저도 시미크 교단이 승인해야 가능한 일이에요.”

“……오필리어, 네가 신경 쓸 필요 없는 일들이다.”

“없긴 왜 없어요!”

칼로 자르는 듯한 말이 서운했다.

“전부 대책을 세우고 있어.”

“그럼 왜 저한테는 말 안 했는데요?”

“대응에 성공한다면 굳이 너까지 가슴 졸일 필요 없고, 설령 실패하더라도 너와는 상관없으니.”

“상관없어요? 왜……?”

이 주제를 도마에 던져 놓은 것만으로도 나의 의연함은 바닥을 드러냈다. 거기에 ‘너와 나는 상관없다, 실패할 경우에’라는 말은 허공에 똑 떼어진 듯 아득한 공포를 남겼다.

눈물이 났다.

“오필리어.”

그는 이미 속삭임 하나로 나를 달랠 줄 알았다. 차가운 손가락이 연신 뺨을 훔쳐 냈다.

“나의 영예, 공로, 재보는 모두 너에게 속해. 그런데 왜 우는 거지?”

애타는 입맞춤이 눈물방울을 가져갔다.

“당신이 진다면요?”

“그런 일은 없어야겠지만, 나의 추락은 너와 무관해야지.”

“그게 무슨 소린데요?”

패배했을 경우를 이미 가정했고, 그럴 경우 난 무관하단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에게 닥친 위험은 컸다.

온몸이 차가워졌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의 얼굴을 잡아당겨, 지척에서 물었다.

“당신이 추락해서 모든 것을 잃으면, 나는 어떻게 되죠?”

“너는 아무 것도 잃지 않을 거다.”

도취된 듯 말하는 그의 얼굴엔 다시 행복이 한 조각 떠올라 있었다.

“내가 마지막 힘을 모아 너를 지킬 테니까. 황궁에선 못 살겠지만, 지금처럼 수도에서 좋아하는 걸 먹고, 공부도 하고, 친구들을 만나며 지낼 수 있겠지.”

“…….”

“원한다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거긴 네가 좋아하는 벨라 모나한이 있고 너의 집도 있어. 남작가는 전보다 풍족한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될 거다.”

“…….”

그리고 영영 안녕이라는 얘기였다.

기가 찼다. 온갖 생각이 차오른 머릿속이 오히려 하얗게 비워졌다. 나는 간신히 대답했다.

“왜 저는 다 빼놓으려고 하나요? 제가 못 미더워서?”

“……뭐? 아니야.”

그제야 내 분노를 알아챈 클레멘츠는 허둥거리며 날 달래려고 들었다. 차게 식은 손끝을 꼭 그러쥐는 그의 손도 차가웠다.

“너의 능력과는 상관없다. 오히려 너는 분에 넘치게 훌륭하지. 그저 나는, 내가 힘을 잃자마자 적들이 네게 더러운 손을 뻗치는 건, 그런 꼴은 상상도 할 수 없다.”

내 감정이 일그러진 건 못 견뎌 했지만, 그의 의중은 확고했다.

“……진짜 싫어.”

흔들리는 눈빛이 내게 달라붙었다. 나는 있는 힘껏 그의 손을 뿌리쳤다. 꽉 옭아매던 손가락은 나를 상하게 할세라 황급히 풀어졌다.

가벽에 난 문 쪽으로 빠르게 걸었다. 어디든 좋으니 여길 벗어나고 싶었다.

“오필리어!”

뒤늦게 따라오던 클레멘츠는 내가 우뚝 멈춰 서자 같이 멈췄다.

“시계탑을 공개할 땐 같이 있어 달라고? 이미 다 정해 놓으시고 뭘 물어보나요?”

“……미안해.”

울며불며 소리 지르는 내 얼굴은 사랑스럽지도, 귀엽지도 예쁘지도 않을 것이다. 곧이곧대로 미안하다는 말을 들으니 말도 안 되게 화가 났다.

더 다가오지도 물러서지도 못하고, 뻗지 못한 손이 가늘게 떨리는 모습까지 견딜 수 없었다. 모든 게 내가 느끼는 배신감을 부채질할 뿐이었다.

끼고 있던 팔찌를 빼서 던졌다. 반짝이는 금속이 절그럭대며 땅에 부딪쳤다. 이어서 귀걸이도 마찬가지였다. 초록색 보석의 휘광이 흩뿌려졌다.

클레멘츠는 버려진 장신구들을 내려다보았다. 석상처럼 굳은 모습이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클레멘츠.”

이런 상황에서 이보다 나쁜 말이 있을까? 고개를 들어 나를 보는 그의 눈빛을 보니 스스로가 미워졌다.

“당신은 당신 혼자서 사랑하려고 하네요.”

그대로 눈을 감아 버리고 싶었다.

무작정 뛰어 도망쳤다. 클레멘츠를 보고 싶지 않았고, 본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모든 것을 미리 결정해 버린 그 앞에서 나는 너무 무력했다.

화는 내 버렸지만, 뒷일을 감당할 자신도 없었다. 장신구를 빼 던지자 충격을 받은 클레멘츠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상처받았을 텐데.

오만 정이 다 떨어졌을 수도.

나는…… 좀 더 잘 말해 볼 수 없었나?

언제나 곁에 있고 싶다고. 기쁠 때는 물론이고 힘들 때도 의지가 되고 싶다고.

제대로 말했다가 다시 거절당하는 게 두려웠나?

“레오라 영애!”

마차를 세워 둔 곳을 그대로 지나치려 하니, 허공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그림자 기사였다. 일단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닦았다.

“마차에 타십시오. 날이 춥습니다.”

특색이 지워진 목소리라도 걱정하는 기색은 묻어났다.

“제가 타면, 전하는요?”

“따로 궁으로 돌아가실 겁니다. 영애를 먼저 모시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달리 갈 곳도, 뻗댈 기운도 없었다.

황태자를 타야 할 마차에서 쫓아내고 엉뚱한 사람이 앉아 가다니. 그를 모시는 사람들도 황당할 것이다.

마차 안에선 엉엉 울었다. 황태자궁에 도착하니 유렌과 카렌이 사색이 되어 달려왔다.

“오필리어 님! 세상에, 무슨……!”

“어쩌면 좋아요…….”

그들은 발을 동동 굴렀지만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나를 방으로 부축하고, 씻기고 옷을 갈아입혀 침대에 눕혀 주었다.

양파 수프도 권했지만, 묽게 우러난 국물만 겨우 마셨다.

“푹 쉬세요, 오필리어 님.”

카렌은 눈물을 글썽대며 이불을 덮어 주고 나갔다. 이윽고 방 안에 홀로 남았다.

“바보 같은 클레멘츠.”

목소리는 잔뜩 잠겨 있었다. 중얼대고 나자 더 울컥했다.

“나쁜 놈. 악마. 배신자.”

지칠 대로 지쳐서 그 이상 분풀이할 수도 없었다. 돌아눕자마자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배신자!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래?”

꿈속에서 나는 또다시 기세 좋게 울고 있었다.

“본인이 잘되면 계속 사귀고, 삐끗해서 미끄러지면 집에 가라고? 언제는……! 언제는 몸도 마음도 가져가 놓곤 짐 싸서 떠날 생각이냐고 나한테 그러더니, 지는 뭐!”

못 다 한 소리도 실컷 퍼붓고 있었다.

“나도 딱히 몸을 바쳤다는 건 아니지만!”

누구에겐지 모를 변명도 했다.

“자기가 무슨 슈뢰딩거의 남자 친구야? 미래에도 사귀고 있을지 아닐지는 관측해 봐야 알 수 있다 이거야?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어!”

실컷 화내고 나니 이번엔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그렇게 걱정되면, 나도 자기가 그만큼 걱정된다는 걸 왜 몰라?”

꿈속이라 그런지 더 펑펑 쏟아지는 눈물을 닦고 있자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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