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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144)화 (144/218)

144화

달리 이야기하면, 그걸 빼면 오늘의 살롱은 오필리어를 위해 세 사람이 치밀하게 설계한 자리였다.

얼마 전 카밀이 열었던 파티는 귀족들에 대한 경고였다.

사교계의 우두머리 백조가 오필리어 레오라의 적은 곧 자신의 적이라 천명했다.

이젠 감히 오필리어에 대해 시끄러운 소리가 나돌진 않을 테지만, 그걸론 부족했다. 카밀은 오필리어를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구름 위로 올리고 싶었다.

다행히 과거 시엘로를 시켜 뒤를 밟았을 때 오필리어가 했던 획기적인 발표가 기억났다. 귀족들 사이에서 이를 강조하면 오필리어의 명성은 높아질 것이 분명했다.

또한 칼로카이리 때 아주 아름다운 노래를 했다는 증언이 곳곳에서 쏟아졌다.

오필리어가 노래를 했다면 예술을 흠모하는 귀족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겠지만, 예정에 없이 들이닥친 황태자가 그녀를 급히 데려가 버렸다.

카밀 역시 오필리어의 노래가 너무나도 듣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황태자의 심경을 이해했다.

“저디스 백작을 초대한 건 실수였어요. 그 구닥다리 노친네…….”

말도 안 되는 편견으로 오필리어에게 무례를 저질렀던 걸 생각하면 다시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황태자의 추종자로 알려진 만큼 오필리어의 비위를 잘 맞출까 싶어 부른 거였는데, 완전히 역효과였다.

“카밀, 황태자파로 돌아설 건가요?”

라일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친구인 그들은 카밀의 뜻을 따랐지만, 외부에 이 행동이 어찌 비쳐질지는 자명했다.

‘그동안 친 2황자 노선을 쌓던 중부 귀족파가 황태자에게로 기울어지고 있다.’라고 하겠지.

“글쎄요…….”

아버지께서 알면 또 노발대발하시겠지. 카밀은 피식 웃었다.

“한 번뿐인 인생이잖아요, 라일라. 가문의 영달이나 잘못된 욕망이 아니라,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예요.”

하고 싶은 것.

카밀은 오필리어를 지키고 싶었다.

* * *

아무래도 좀 이상하다.

카밀이 열띤 배웅을 해 줬던 레코니아 저택 쪽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뭐가 이상했냐면, 모든 것이 너무 순조로웠다.

분명 나와 클레멘츠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그러니 조금은 곱지 못한 시선도 각오하고, 평판을 좋게 해 보려고 간 거였는데.

다들 너무 호의적이었잖아. 경도 계산법에 감탄하고, 원거리 무역 투자에 관심 보이고, 노래해 달라고 하고. 민망할 정도였지.

괜한 생각인가? 내가 걱정을 사서 했던 걸까?

“어딜 그렇게 애타게 보고 있지?”

“아, 미안해요.”

무심코 창밖을 봤을 뿐, 별로 애타게 본 건 아니었다. 그러나 클레멘츠의 얼굴엔 이미 불만이 가득했다.

“레코니아의 살롱에서 관심이 가는 사람이라도 만났나?”

“관심이요?”

그런 사람이 있던가? 흠.

내가 고민하자, 그는 성마르게 덧붙였다.

“……적어도 네게 관심 있어 보이는 것들은 있더군.”

“클레멘츠도 눈치챘어요? 제가 느끼기에도 좀 지나쳤는데요…….”

잘못 대답했단 건 즉시 알 수 있었다. 그의 눈에서 불티가 팍 튀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입술이 겹쳐졌다.

“잠, 잠깐…… 읍.”

탄탄한 팔이 서서히 내 몸을 감아 올렸다. 금세 끝날 줄 알았던 키스는 온몸에 열이 오르도록 집요하게 이어졌다.

밀폐된 마차 안이라 다행…… 다행인 건가?

클레멘츠의 가슴에 기대 숨을 고르고 있으니, 그의 손이 내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미쳐 버리겠군.”

흐트러진 목소리에선 정말로 터질 듯한 감정이 느껴졌다.

갑자기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요?”

“……네가 이러니까.”

그리 밝지는 않은 마차 조명 아래, 보랏빛 눈 안쪽의 동공이 검은 심연처럼 벌어져 있었다. 신비롭고 아름다웠지만, 역시 내가 뭘 어쨌다는 건진 모르겠다.

이럴 땐 말을 돌리자!

“그래도 전하께서 와 주신 덕분에 노래는 안 했네요.”

“늦지 않게 도착해서 다행이었지.”

바로 대답이 나왔다. 놀랍게도 클레멘츠는 툴툴거리고 있었다.

“살롱의 규칙이고 뭐고, 꺼내 오지 않을 수 없었다. 네가 노래하면 사람이든 짐승이든 무생물이든, 다 홀려 버리니까.”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하지? 근거 없는 믿음이 더 강해진 듯했다.

사람까진 그렇다 쳐. 짐승? 무생물? 내가 무슨 오르페우스인가, 나무와 풀잎까지 듣고 기뻐하게.

“그 건방진 학자 놈도 마음에 안 든다. 노래를 듣고 싶다며 네 앞에서 개처럼 꼬리를 흔들더군.”

“……개처럼? 꼬리요?”

대체 누굴 말하는 건가 고민해 보니 로저 햄프 이야기였다.

“하아, 젠장…….”

“…….”

영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다가, 자괴감에 빠진 듯 중얼거리며 은발을 쓸어 올리곤 귀를 발갛게 물들인다.

뒤늦게, 클레멘츠가 빠진 감정이 질투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자 이내 내 얼굴 역시 홧홧해졌다.

레코니아 저택에서 유독 싸늘하게 사람들을 노려본 것도 그래서였나 보다. 내 주변에 있던 남자들이 거슬려서.

단둘만 있게 되자 그렇게 끈질기게 키스한 것도, 소유욕……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갔다.

“어, 어떡해…….”

미쳤나 봐.

입을 틀어막고 중얼거리는 나를 이번엔 클레멘츠가 의문을 담아 쳐다보았다.

“큼, 크흠.”

다수의 로맨스 소설을 통해 접한 바, 남자가 질투심과 소유욕에 휩싸이면 얼마나 괴로운지는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 대상이 내가 되면 짜릿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무엇보다도 클레멘츠가 괴롭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여, 용기를 내어 그의 걱정을 덜어 주기로 했다.

“나는 클레멘츠만 좋아해요.”

실은 ‘저한테 빠져서 정신 못 차리는 남자는 당신뿐이니 걱정 놓으셔도 됩니다.’라고 하면 되지만, 그런 건 안 알려 줄 거지롱.

마차 바퀴 도는 소리가 부드럽게 침묵을 메웠다.

안 그래도 커진 동공은 더 이상은 불가능할 정도로 벌어졌다. 그 모습이 몽환적이라서 한참을 보다가 덧붙였다.

“다른 남자들은 남자라기보단 솔직히…….”

오징어, 꼴뚜기, 가물치, 초롱아귀……. 영 애잔한 생김새의 해양 생물들을 떠올려 보다가 그냥 고개를 저어 버렸다.

다음 순간, 클레멘츠의 얼굴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앗, 키스? 또 키스인가?!

재빨리 눈을 질끈 감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기대했던 접촉은 없었다.

젠장!

죽을 만큼 부끄러워져서 간신히 눈을 떴다. 시야 한가득 클레멘츠가 들어찼다. 새삼, 아무리 가까이에서 봐도 경이로울 만큼 잘생긴 얼굴이었다. 그리고…….

클레멘츠는 내 생김새를 하나하나 응시했다. 새기듯이. 혹은 눈으로 쓰다듬듯이. 턱과 입술, 두 뺨, 콧방울과 콧대, 이마, 그리고 눈을.

숨결과 숨결이 스쳤고, 서로의 감정이 낱낱이 전해져 왔다. 그의 눈빛을 똑바로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그대로 녹아 버릴 것 같았다. 입맞춤은커녕 가벼운 접촉조차 없었는데도 나는 관능에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쪽, 뺨에 찍힌 입술이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한동안 심장의 콩닥거림이 멈추지 않았다.

“살롱은 재미있었느냐?”

“재미…… 없었어요.”

멍하니 대답하니 클레멘츠가 웃었다.

“차라리 로맨스 소설 품평회를 했다면 재미있었을까요?”

살롱은 유익하긴 했지만, 통속 소설에 미칠 만큼 자극적인 걸 좋아하는 내겐 좀 지루했다. 솔직히 난해하기도 하고.

“그래도 저, 원거리 무역에 대해 살롱에서 설명했어요! 세인 영애가 이쪽으로 가문의 자금을 투자하겠다고 했고요.”

“그런가? 놀랍군.”

클레멘츠는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세인 가문의 자금이 들어온다면 많은 도움이 될 거다. 무역의 기반을 갖추기 수월해질 테지.”

“헤헤.”

그와 열띤 재회를 하느라 잊고 있던 걸 떠올렸다.

맞아. 나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살롱에 갔었다. 나도 클레멘츠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증명해서, 나도 의지할 만한 상대라는 걸 인식시키기 위해. 무슨 어려움이든 같이 헤쳐 나갈 수 있게.

그러나 클레멘츠가 꿀처럼 달콤한 목소리로 말한 건 내가 원한 것과는 달랐다.

“잘했어, 오필리어. 이번엔 어떤 것을 해 줄까?”

그런 게 아니에요, 제가 원하는 건.

뭔가를 해내면 과분한 상을 받고, 쏟아 준 모이를 쪼아 먹듯이 제 욕심만 손쉽게 채우고, 그러는 게 아니라, 당신과 함께 서는 거예요.

……라고 해야 하는데.

“네가 좋아하는 작가를 초청하도록 할까?”

“…….”

“혹은 아예 가까이 두고 후원할 수도 있겠지. 신작이 나오면 네가 제일 먼저 읽어 볼 수 있을 거야.”

아, 이런. 아…… 비겁하게 하필이면 그런 끌리는 제안을 하다니.

“생각해 볼게요.”

“의외로군. 바로 수락할 줄 알았는데.”

“생각해 볼 거예요!”

순간 혹하는 바람에, 내 생각을 말할 기회를 놓쳐 버렸다.

간이고 쓸개고 내놓을 듯 구는 클레멘츠가 원망스러웠다. 버럭 소리를 질러도 웃기만 한다.

“그런데요,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들를 곳이 있어.”

아까부터 궁금했던 점이었다. 마차는 황궁 쪽이 아니라 수도 중심가 쪽으로 꺾어졌다.

내려선 곳은 광장 근교의 공터였다.

“전하, 오셨습니까.”

원래 탁 트여 있던 공터는 사방이 가벽으로 막혀 있었다. 안쪽에서 공사를 하는 모양이었다.

작업복을 입고 주변을 정리하던 사람이 다가왔다.

“이쪽은 레오라 남작 영애시군요.”

내게도 깍듯이 인사를 건넨 그는 가벽 한쪽에 달린 문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아직 정리가 끝나지 않아 먼지와 쓰레기가 많습니다. 옷을 더럽히지 않게 조심하십시오.”

드레스 자락을 쥐고 열린 문으로 들어가는 동안 클레멘츠가 손을 잡아 주었다. 그가 눈짓하자 문을 열어 줬던 남자가 꾸벅 인사하고 문을 닫았다. 정리 작업으로 바쁜지 곧장 이쪽에서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여긴 뭔데요?”

드레스 자락을 정돈하고 허리를 펴는 내 눈에 처음 보는 구조물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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