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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143)화 (143/218)

143화

여기서도 여성의 능력은 곧잘 경시당한다. 이 사람처럼 생각하는 이들은 어디든 또 있을 것이다.

“괜찮습니다. 이 계산법을 고안한 건 황태자 전하도, 저도 아니고, 고향에 계신 제 선생님이니까요.”

그래. 진짜 내가 생각해 낸 것도 아니고 뭐.

“혼우드에 은둔한 현자가 있는 모양이군요!”

“레오라 영애 덕분에 아주 유용한 지식이 세상에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불미스러운 사태가 해결되자 기쁜지, 사람들은 앞다퉈 내 앞에 모여들며 찬사를 건넸다. 그 서슬에 저디스 백작은 툭툭 쳐지며 밀려났다.

교수님, 안녕하신가요? 당신은 모르는 사이에 이세계의 현자가 되셨습니다.

“저, 레오라 영애. 레오라 영애!”

“네?”

그대로 퇴장하는가 싶었던 저디스 백작이 나를 외쳐 불렀다. 조금 화기애애해지던 분위기가 다시 가라앉았다.

“저어, 황태자 전하께는……! 잘 말씀드려 주시겠지요? 결코 제게 감히 영애를 무시하려던 뜻은 없었다고! 영애, 영애께서는 친절하고 다정하신 분이니까요! 그렇겠지요?”

미묘하게 비굴해진 말투. 눈빛엔 절박함이 드러났다.

뭘 나한테 친절을 맡겨 놓은 듯 굴고 있어? 어림도 없지.

난 다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으음, 글쎄요!”

딱히 클레멘츠에게 가서 ‘머리가 반질반질한 저디스 백작이란 놈이 절 무시했어요. 복수해 주세요.’라고 일러바칠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나서서 저 인간을 안심시켜 줄 필요도 없었다. 놔두면 알아서 블랙리스트에 오를 자신의 미래를 걱정하게 되고, 내 자비를 바라게 되고, 섣부르게 혀를 놀린 걸 후회하게 될 테니까.

새파래진 얼굴로 초조해하는 그에게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오필리어, 이거 먹어.”

카밀이 사르르 웃으며 카나페 접시를 내밀었다.

나를 대신해 그렇게나 화를 내 주다니 고마웠다.

크래커, 치즈, 토마토로 된 카나페는 도수가 가벼운 술과 함께하자 입에서 사르르 녹았다.

카밀의 단짝 중 하나인 에일린은 오늘 살롱의 주최자로서 이곳저곳 돌아다니느라 바빴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인 라일라 세인은…….

“세인 영애, 안녕하세요.”

“…….”

긴 금발을 늘어뜨리고 석상처럼 같은 자세로 굳어 있었다. 내 인사를 듣지 못한 듯싶었다.

왜 저러고 있지?

“라일라는 생각에 잠기면 이따금 저래. 주로 투자에 대해 결정할 때.”

카밀이 설명해 주었다.

“오필리어 네가 경도 계산법을 설명할 때부터 같은 자세였어.”

“……그때부터? 꽤 오래 되지 않았나?”

학문의 레코니아, 인맥의 벨레이와 함께 여름 무도회 때 카밀 주위에 있던 ‘황금의 세인’ 가문 아가씨.

반질반질 백작과의 소동으로 많이 시끄러웠을 텐데도 주위를 거의 인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이 상태, 괜찮은 걸까?

깜빡.

연한 금빛 속눈썹이 내려앉았다가 올라갔다. 나는 속삭이듯 물었다.

“정신이 들어요……?”

“후후, 오필리어. 꼭 기절했던 사람에게 묻는 말 같잖아!”

카밀이 귀엽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이 정도면 정말 앉은 채로 기절한 거나 마찬가진걸.

그리고 마침내, 옴짝달싹 않고 있던 라일라가 입을 열었다.

“……확실히 이 방법이라면 위험이 많이 줄어들어요.”

“네……?”

“여기에 세인가의 자산을 투자해야겠어요!”

“네?!”

“바다를 통한 원거리 무역에 투자하기. 오필리어는 어떻게 생각하시죠?”

순식간에 주홍빛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과하게 반짝이는 그것은 생기도 활력도 넘어선 무언가였다.

내가 경도 계산에 대해 설명할 때부터 원거리 무역에 투자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가? 한 자세로 굳어서?

집중력이 놀라웠다.

“우리 가문이 투자한 사업들이 연이어 신통치 않았던지라, 돌파구를 간절히 찾고 있었거든요.”

투자로 승한 세인 가문이지만 언제나 좋은 결과를 내는 건 아니었나 보다.

여름 무도회 때도 좋은 투자처를 찾아 헤매고 있었으니, 나름대로 고민이 깊었을 것이다.

마침 이건 내가 아주 잘 대답해 줄 수 있었다.

“아주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해요, 라일라 양. 막 활로가 생긴 원거리 무역은 점차 많이 활성화될 거예요.”

“확실한 정보인가요?”

“네! 아직은 아는 사람이 얼마 없으니, 투자하려면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해요.”

라일라의 주홍빛 눈이 커졌다.

‘황금의 세인’이 남아도는 자금을 투자하기만 하면, 원거리 무역 산업은 더 빨리 날개를 달 것이다.

클레멘츠에게 도움이 될 기회가 이렇게 빨리 올 줄이야!

“황태자 전하의 주도로 클랏샤항의 증축이 예정되어 있어요. 그에 따라 대형 무역선 제작이나, 해상 인력 모집 방면도 크게 성장하겠죠.”

“호오…….”

난데없이 옆에서 굵직한 감탄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언제부터 듣고 있었던 건지, 낯선 귀족이 헛기침을 했다.

“크흠. 커험.”

“뭐죠? 엑스트 남작. 오필리어로부터 너무 가깝군요.”

“아, 죄송합니다.”

카밀이 앙칼지게 말하며 내 어깨를 끌어당겼다.

어느샌가 적지 않은 수가 우리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호화로운 삶을 즐기는 귀족들의 재정은 아무리 확충해도 모자랐다.

재력이라면 3대 가문도 접고 들어가는 세인 가문이 투자처를 정했다는 소식. 게다가 성장이 예정된 블루오션 산업이라니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겠지.

“자, 이제 살롱의 본 목적으로 돌아가 볼까요?”

에일린이 가볍게 손뼉을 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를 낭송하고 책 내용을 토론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돈 얘기에 주의가 쏠렸으니 주제에서 많이 벗어났다.

“죄송해요, 여러분. 제가 레오라 영애의 발표를 듣고 생각에 잠기는 바람에 분위기를 흐렸네요.”

자리에서 일어난 라일라가 가볍게 무릎을 굽혀 사과했다.

“원래대로라면 벌칙 삼아 제가 기예를 선보여야겠지만, 부끄럽게도 제겐 투자 외에 다른 재주가 없군요.”

‘그’ 카밀의 친구가 이런 데서 선보일 장기 하나 없다니. 이 자리의 모두가 그녀의 말이 겸양에 불과하단 걸 알 것이다.

“대신에, 오필리어 양의 노래를 우정에 힘입어 간곡히 청하고자 합니다.”

그렇게 밑밥을 깐 라일라는 대신에 나를 내세웠다. 보란 듯 내 어깨에 손까지 올려 가며.

어라? 왜?

물론 연습해 왔지만, 죽 지켜보니 역시 다른 참여자들 수준이 높았다.

노래 대신 경도 계산법을 발표해서 다행이었지.

“아하하. 저는 그냥…….”

“저도 들었습니다! 레오라 영애께서는 노래 실력이 무척 출중하시다면서요?”

거절하고 빠져나가려던 날 막은 건 로저 햄프였다.

금발을 낮게 묶은 학자의 눈이 반짝거렸다.

이 사람, 아까 나보고 발표하라고 할 때도 그렇고, 반질반질 백작을 상대로도 증언해 줬고.

혹시…… 내 팬인가?

“칼로카이리 노래 대회에서 우승하셨다고. 축제 때 직접 들었다는 귀족들이 어찌나 자랑을 해 대던지!”

“아, 우승은 아니랍니다! 겨우겨우 3등을 했어요.”

“저렇게 겸손하실 수가! 3위 안에 든 것만으로도 굉장합니다.”

“오늘 우리는 사악한 것을 물리친다는 아다만티스의 목소리를 듣겠군요.”

부풀려진 소문을 정정했는데도 기대는 더욱 커져만 갔다.

나는 결국 눈물을 삼키며 에일린을 바라보았다. 주최자인 그녀가 상황을 정리해 주길.

레코니아의 살롱은 모두의 참여를 위해 한 사람이 한 번의 발표를 하도록 권장되었다.

절대적인 룰은 아니었지만, 내가 원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 적당히 넘어가 주겠지.

에일린 레코니아의 갈색 눈이 내 얼굴에 닿았다. 그녀는 입을 열었다.

“규칙대로라면 레오라 영애께서는 이미 경도 계산법을 이야기해 주셨으니, 노래까지 부탁드려선 안 되지요. 하지만…….”

실컷 고개를 끄덕이다가 불길하기 짝이 없는 ‘하지만’에 멍해져 있을 때였다.

“그렇다면 노래는 그만두지.”

의외의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크고 늘씬한 인영이 문간에 서 있었다.

“황태자 전하……?”

클레멘츠는 평소보다도 서리가 낀 듯한 분위기였다. 차디찬 눈으로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쏘아보고 있었다.

내가 서둘러 다가가자, 그는 언제 흉흉한 얼굴을 했냔 듯 부드럽게 웃었다.

“데리러 왔어, 오필리어.”

* * *

클레멘츠 황태자는 워낙 차갑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공식 석상에서 필요할 때를 빼면 도통 누구에게 웃어 주는 법이 없었다.

따라서 레코니아가의 살롱에 갑자기 나타난 그가 차가운 표정으로 귀족들을 일별해도, 평소와 다르단 걸 느끼는 이는 많지 않았다.

그중에 하나는 카밀 드 베일리스였다.

‘하, 어처구니가 없네.’

절절 끓는 질투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오필리어의 주변에 있던 사내들을 잡아먹을 듯 노려본다. 사랑스러운 오필리어에게는 차마 험한 눈을 뜨지도 못하고 사근사근. 할 수 있는 거라곤 남들 보란 듯이 저렇게, 친근한 접촉을 하는 것뿐이었다.

그의 감정이 이토록 선명히 읽히는 건, 카밀 역시 오필리어에 대해 별반 다르지 않게 느끼기 때문이었다. 즉 그녀는 클레멘츠가 오필리어에게 하는 꼴이 무척 배알이 꼴렸다.

“직접 오실 필요는 없었는데요.”

황태자는 조그만 여인의 귀에 대고 뭐라고 속삭였다. 여인이 기겁하며 투정을 부렸다.

“뭐예요……!”

기꺼이 몸을 낮추는 동작, 눈을 반쯤 내려 뜨고 짓는 웃음 따위에서 절절한 애정이 느껴졌다. 그것만큼은 설령 눈이 먼 자라 해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내가 지금 본 게 진짜인가……?’

‘그 얼음 같은 황태자가 저런 표정이라니. 모처럼 와서 좋은 구경을 했군!’

황족의 로맨스란 언제나 제국의 관심사였다. 살롱 초대객들은 만족하여 집으로 돌아갔다.

“어찌나 애정이 지극하신지!”

“레오라 영애의 발표에 이어 이런 광경을 볼 수 있을 줄이야.”

“로맨틱해…….”

에일린과 카밀, 라일라는 저택을 나서는 이들이 두런두런 나누는 말을 들으며 서 있었다.

“순조롭군요.”

“네, 카밀.”

“설마 이 일로 가문의 투자처까지 정할 수 있을 줄은 몰랐네요.”

라일라가 오필리어의 이야기를 듣고 투자처를 결정한 건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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