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네 노래 듣고 눈 풀린 놈들에게 웃어 주지 마.”
어지간히도 집착하는군.
“후우, 알았어요. 알았어.”
“농담하는 게 아닌데.”
사람들이 내 노래에 홀릴 거라고 클레멘츠가 이렇게까지 굳게 믿으니, 바닥이던 자신감이 어느 순간 충만해졌다.
알았다고 달래며 클레멘츠를 일으켰다. 정신이 없어 까먹었지만, 황태자를 이렇게 오래 무릎 꿇려 두다니. 불경죄였다.
“저기, 클레멘츠.”
“응.”
대답하는 목소리가 유독 달콤했다.
“힘든 일이 있으면 꼭 나에게 얘기해 줘요. 알았죠?”
나에게 사실을 숨긴 건 속상하지만, 처음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를 의지할지 말지 정할 땐 보통 신중해지니까.
그러니 우선은 내 뜻을 충분히 전달해 두자.
“……왜?”
‘힘든 일’이란 말을 듣자 수려한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역시나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태도였다.
“그야 당연하죠. 좋아하는 사람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면 괴롭잖아요. 하물며 그걸 나만 몰랐다고 생각해 보세요. 너무 괴롭죠.”
그를 따라서 일어나니 눈을 맞추기 위해 시선을 꽤 높이 들어야 했다.
“그렇죠?”
“…….”
대답이 없다. 알았어. 바로 납득하기엔 시간이 좀 필요하다는 거겠지. 나는 달래듯이 그를 폭 안아 주었다.
“살롱, 잘 다녀올게요.”
한 박자 늦게 그의 팔이 내 등을 감쌌다.
* * *
베일리스 저택이 최신 유행으로 빈틈없이 덧칠되었다면, 레코니아가는 좀 더 수수하고 중후했다.
그럼에도 촌스럽다거나 초라한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곳곳에 높이를 맞춰 꽂혀 있는 책 때문일까?
손때 묻은 책 냄새가 물씬 풍기는 저택이었다.
“오필리어 레오라 님, 이쪽으로 오십시오.”
초대장을 건네자 사용인이 정중히 안내했다.
“……로써 알아낼 수 있다는 겁니다. 실로 놀라운 발견이었지요.”
어둡고 차분한 느낌의 응접실에선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가 들렸다. 늦게 도착하진 않았는데 이미 뭔가 시작한 모양이었다.
안쪽으로 들어서자 시선이 하나둘씩 내게 쏠렸다.
“오, 원발표자께서 도착하셨군요! 이거야 원. 부끄럽습니다.”
가운데 서 있던 남자가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금발을 길게 길러 묶은 남자의 눈이 왠지 부담스럽게 반짝였다.
“로저 햄프라고 합니다. 클랏샤 항만 사무소에서 놀라운 발표를 하실 때, 저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아, 안녕하세요.”
로저 햄프라면 아카데미에서 촉망받는 학자로 신문에 몇 번 이름이 오르내린 적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낯이 좀 익은 것 같기도 하고.
이런 유명인이 오다니 과연 레코니아의 살롱이었다.
“왔군요, 오필리어.”
고풍스러운 의자에 앉아 있던 에일린 레코니아가 다가왔다.
“로저는 우리 아버지의 애제자랍니다. 그래서 제가 여는 살롱에 종종 와 주곤 하죠.”
담박하면서 고상한 인디 핑크색 드레스가 적갈색 머리카락과 잘 어울렸다.
“먼저 온 사람들끼리 얘기 나누다 보니, 오필리어가 발견했다는 경도 계산법 이야기가 나왔지 뭐예요. 시간이 핵심이 되는 방법이라면서요?”
“앗……! 맞아요.”
시차를 이용하는 나의 경도 계산법은 마침 살롱의 주제와 딱 들어맞았다. 이렇게 공교로울 데가?
아니, 이걸로 발표가 되는 거였다면 굳이 노래 연습 같은 걸 할 필요도 없었잖아!
허탈하다.
“오필리어가 자세히 이야기해 주지 않을래요?”
에일린의 권유에 밀려 앞으로 나아갔다. 로저 햄프가 흐뭇하게 웃으며 교편을 넘겨주었다.
학자이자 교육자 가문인 레코니아의 응접실답게, 고급 가구와 악기 사이에 적당한 크기의 칠판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그러니까…….”
수십 쌍의 눈빛이 날 응시했다.
여기 모인 귀족들은 어쨌든 지식과 소양을 쌓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뭐 하나는 배우고 돌아가게 해 줘야 해!
전생에도 공부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왠지 의무감에 불타게 되었다.
칠판 위에 가상의 경도선이 그어진 로다나 행성과, 클랏샤에서 항구를 떠난 선박을 더 열심히 그렸다.
숨을 죽이고 지켜보던 한 귀족이 물었다.
“레오라 영애, 우측에 그리신 건 도대체……?”
“아, 이거요. 보시다시피 배입니다!”
“……!”
내친 김에 먼 바다로 나가서 시계를 보는 선장의 모습까지 일필휘지로 그렸다.
그동안 숨겨져 있던 재능이 드러나는 것 같군.
“레, 레오라 영애. 지금 그건…….”
“아, 이건 시계를…….”
“원양으로 나가서 바다 괴물을 맞닥뜨린 위험한 상황을 그리신 건가요?”
“호오, 필치에서 사정없는 긴박감이 느껴집니다.”
“…….”
재능은 개뿔 아닌가 보다. 방금 그린 그림은 지웠다.
다행히 많은 그림이 없어도 설명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정오에 클랏샤와의 시차를 비교하면 정확한 경도를 계산할 수 있다는 거예요.”
설명을 마치자, 지켜보고 있던 귀족들의 눈빛이 더 반짝였다.
“오오……!”
항만 사무소 때처럼 종이에 뭔가 적어 내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는 칠판과 허공을 번갈아 보며 중얼거렸다.
잠시 뒤,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이런 방법이!”
“이 천재적인 방법은 직접 고안해 내신 겁니까, 레오라 영애?”
“아, 사실은 고향 스승님께서…….”
또다시 교수님을 팔려고 했는데, 누군가가 내 말을 잘랐다.
“황태자 전하께서 알려 주신 게 아니겠습니까?”
뭐라굽쇼?
둥그런 모양의 넓은 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였다.
하얗게 센 보송보송한 머리카락 사이로 반질반질한 두피가 샹들리에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이미 어린 시절부터 분야를 가리지 않고 학자들의 인정을 받으셨죠. 참으로 촉망받는 분이셨습니다.”
평소라면 클레멘츠의 칭찬이 기쁘겠지만, 이런 식으론 아니다.
어처구니가 없어 침묵하자니, 반질…… 귀족 남성은 다 이해한다는 듯 주절거렸다.
“부끄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영애. 마음으로 이어지신 두 분은 공적도 찬사도 나누실 수 있는 것이지요.”
“아하하…….”
“이토록 대단한 공을 영애께 양보하셨다니. 오오, 오히려 지극한 애정의 증거가 아닙니까!”
내가 뭐라 하든, 주변의 공기가 싸해지든 말든.
이미 스스로의 말을 굳게 믿고 있었다. 감명까지 받는 걸 보니 클레멘츠의 추종자인가?
“저디스 백작…….”
“원래 좀…… 저런 사람이지요.”
조심스러운 수군거림이 공기를 타고 전해졌다.
클레멘츠, 이런 추종자 만들지 마요.
“모르면 조용히 하시지요, 저디스 백작!”
적당히 대답하려는데 별안간 사자후가 들려왔다. 카밀이었다.
눈동자에서 녹색 불길이 타올랐다.
“후, 후작 영애.”
카밀이 움직이자 반질반질…… 저디스 백작은 조금 주춤거렸다. 사교계의 백조에 대한 경외인지, 백작보다 급 높은 후작 작위에 대한 두려움인지.
“처음 경도 계산법이 발표된 항만 사무소의 회의가 상당히 진행될 때까지, 당신이 존경해 마지않는 황태자 전하께서는 침묵하셨어요!”
“그렇습니까……?”
“만일 전하께서 이미 알고 계셨더라면,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다 같이 머리를 쥐어뜯기 전에 언질을 주셨겠지요!”
“흐음, 물론 전하께서는 분명 그러셨을 겁니다만…….”
한때 유명한 악녀였던 카밀이 매섭게 분노하는데도, 저디스 백작은 도리어 의뭉스럽게 굴었다. 언제 겁먹어 멈칫거렸냐는 듯한 반응이었다.
“헌데 그걸 후작 영애께서 어찌 아시는지요?”
“그, 그건……!”
나도 사실 그게 의문이었다. 날 위해 나서 줘서 고맙지만, 회의 장소에 없던 카밀이 어떻게 알지?
카밀은 제 입을 막으며 당황하고 내 눈치를 살피더니, 이윽고 반질맨…… 저디스를 보는 시선에 두 배의 분노가 어렸다.
소설을 읽으며 익히 상상하던 악역 영애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매섭게 외치는 말은…….
“당신이 알 바인가? 휘황찬란한 두피만큼이나 눈에 띄는 걸 좋아하시는군요, 그래. 그렇지 않다면 이리도 주제 모르고 나설 리가 없으니까!”
두피 얘기였다.
“허억…….”
“클랏샤 근교에 가발 잘 만드는 집을 아는데, 소개해 드릴까요? 저디스 백작?”
“으윽…….”
고작해야 두피 얘기지만 아픈 구석을 찔린 듯 반질스 백작의 두 눈이 떨렸다. 카밀은 신경질적으로 부채질을 하며 그를 노려보았다.
“베일리스 영애의 말이 맞습니다, 백작님.”
“뭐, 뭐라고…….”
뒤늦게 달려온 학자, 로저 햄프가 말했다.
“저도 회의 당시 자리에 있었잖습니까. 그때 레오라 영애께선 종이에 필기를 하며 뭔가를 골똘히 떠올리시다가 경도 계산법이 떠올랐다며 모두의 앞에 나서셨지요.”
“아, 그 얘기였나.”
여전히 저디스 백작은 데면데면하게 날 훑어보았다.
명백한 제 잘못에도 사과 한마디 없는 작태에 나도 열 뻗쳤지만, 주변의 수군거림도 심해졌다. 이 인간 혼자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발표 현장에도 레오라 영애의 능력을 무시한 이가 둘 있었습니다. 하나는 상인이고, 하나는 귀족이었지요.”
보다 못한 로저가 잊고 있던 이야길 꺼냈다.
경도 계산법을 알려 주겠단 나에게 ‘여자가 뭘 알아?’ 하고 나오던 녀석들이었지.
“그들은 원거리 무역 관련 사업에서 제외되었을 뿐 아니라, 황태자궁의 블랙리스트에 올랐습니다. 두 번 다시 황태자 전하와 독대할 수 없다는 뜻이지요.”
“그랬어요?”
로저 햄프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웃었다.
사업에서 제외된 것까진 알았는데, 블랙리스트? 그런 것까지 있었구나.
그리고 그 블랙리스트는 사람들의 눈총과 카밀의 비난에도 끄떡없던 반질 백작을 두렵게 한 모양이었다. 혈색 좋은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시더니, 마침내 날 향해 머리를 깊이 숙였다.
“레오라 영애께는, 이 프렛 저디스가 큰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나는 그의 반짝이는 뒤통수를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