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이날을 기다렸어! 그 풀색 무늬 비단 드레스로 해요, 카렌.”
“좋아요, 유렌. 그 드레스는 흰색과 녹색의 조화가 사랑스럽죠! 구두와 장신구도 걱정 붙들어 매세요.”
‘살롱’이란 두 글자가 나오자마자 유렌과 카렌은 벌써부터 저만치 달려가고 있었다. 아니 잠깐, 기다려 봐.
살롱이란 로판의 단골 행사 중 하나로, 문화 예술계의 교양을 다지는 귀족 사교 모임이었다.
이름난 예술가나 학자를 초청하기도 하고, 귀족들끼리 토론을 하며 소양을 쌓기도 하는.
그중에서도 학자 가문인 레코니아의 살롱은, 매번 한 가지 주제를 정해 참여객들이 돌아가며 발표하는 형식이었다.
이번 살롱의 주제는 ‘시간’이라고 적혀 있었다. 시간에 대해 뭔가 그럴싸한 발표를 해야 하는데……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어머, 왜요?”
“가서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옷장을 열며 수선을 피우던 메이드들은 내 곁에 와서 앉았다.
“노래를 부르시는 건 어때요? 오필리어 님께서는 칼로카이리 대회에서도 상을 받으셨잖아요.”
대회에서 노래로 3등씩이나 한 건 순전히 내게 익숙한 노래방 스타일 채점 시스템 덕이었다.
“그걸로 될까요? 살롱에는 진짜 음악가들도 오는데…….”
“당연히 문제없으시죠!”
“오필리어 님이신데요!”
“암요!”
“…….”
메이드들은 내가 잘 해낼 거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들은 이내 드레스 코디를 구상해야겠다며 사라져 버렸다.
아, 안 간다고 할까?
하지만…….
학문의 레코니아에서 여는 살롱이었다. 이름 있는 자리이니만큼 사람이 꽤 모일 것이다.
에일린과 절친한 카밀도 당연히 참석할 테고. 카밀이 꽉 잡고 있는 귀족파 인사들도 오겠지.
어쩌면 이건, 나도 클레멘츠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걸 입증할 기회인지도.
클레멘츠가 곤란을 겪고 있는 건 평판 문제였다. 그리고 평판이란 건 이런 사교 행사를 통해 퍼졌으며, 가까운 사람이 잘 행동하면 더 나아질 수 있었다.
“결정했어. 간다.”
노래는 어떡하지?
“일단…… 노력은 해 보자!”
마침 칼로카이리 대회 때 불렀던 ‘당신이 있어’는 시간과 관련된 노래였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 뿐 아니라, 허무한 시간을 견디게까지 해 주는 사랑을 노래하는 곡.
주제에도 걸맞고, 상까지 받았다면 다들 납득해 주지 않을까?
일단은 연습을 좀 해야겠다.
쏟아지는 찬사를 받긴 어렵겠지만, 적어도 듣고 욕하지 않을 정도는 되어야 ‘평판에 도움이 될 사교 행사 참석’이라는 취지에 부합할 테니까.
다만 연습할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황태자궁은 클레멘츠의 생활공간이지만 상당히 사람이 많은 공간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선 사람들이 일하고 있었다. 뜬금없이 별로 잘하지도 않는 노랫소리가 들리면 ‘아 씨, 황태자궁 혼자 쓰나.’라고 생각할 만도 했다.
방음 공간을 찾는 하이에나처럼, 악보를 들고 한참이나 서성거렸다.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 걸음을 옮기다 보니 도착한 곳은 백금의 정원이었다.
여기라면 노래 연습을 하기에 적당했다. 후원 쪽으로 깊이 들어온 만큼 집무실과 회의 공간들로부터는 떨어져 있었다. 천장과 벽은 두터운 유리로 막혀 있어 소리가 바깥으로 새어 나가지도 않을 것이다.
글로리나 부인은 이 공간이 뭔가 의미 깊게 쓰이게 되길 기대하신 것 같지만, 죄송합니다. 제 망한 노래 연습실로 좀 쓸게요.
모나한 저택에서 벨라와 함께 들었던 노래 수업 내용을 찬찬히 복기해 보았다. 그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봄이 온기로 나에게 왔을 때. 그리고 겨울이 되어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때. 나도 함께 사라지지 않았던 이유. 그건 당신이었어.”
백금의 정원은 혼자서 노래를 부르기에는 지나치게 아름다웠다. 아침 햇살이 천장을 그대로 투과해 찬란하게 부서졌다.
그래서 나는 해서는 안 되는 짓을 해 버렸다. 그건…… 뮤직 비디오를 찍는 스타 가수에 빙의해 버린 것이다. 망상 속의 시나리오가 절찬리에 돌아갔다.
“무뎌지고 흐려질 모든 날-.”
감정을 잡고 표정 연기를 해 가며, 애절한 바이브레이션을 넣어 가며. 심지어는 분위기에 맞는 손짓까지 시전하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통유리를 사이에 두고 후원에서 날 바라보고 있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친 것은.
“당신도 사라…….”
그대로 굳어 버렸다.
“젠장!”
순발력 있게 쫓아 나가서 목격자의 눈을 찌르고 도망간다면 이 흑역사를 영영 무마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상대는 황태자였다. 눈을 찌르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다.
목숨인가? 명예인가?
명예로운 죽음인가? 수치스러운 삶인가?
치열한 저울질이 이어지는 동안, 클레멘츠는 날 보며 그림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어딘가로 모습을 감췄다.
정원 입구 구조를 생각해 보면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이다.
“젠장…….”
도망치기엔 이미 늦었다. 안 그래도 무반주인데 바깥에서 보기엔 아예 음 소거였을 테니 얼마나 우스워 보였을까.
“레오라 영애께서 열띤 공연 중이시기에 급히 구경하러 왔네만.”
“공연 끝났습니다. 돌아가세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뮤비 소품이었던 긴 소파 위에 축 늘어졌다. 나는 죽음을 택한다. 명예로운 죽음을 달라.
클레멘츠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네가 축제 때 불렀던 노래로구나.”
“레코니아 영애가 여는 살롱에서 또 부르기로 했어요. 그래서 연습 중이었는데…….”
내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대체 왜 거기서 나타나시는 거예요…….”
“일어나, 오필리어.”
소파 팔걸이에 얼굴을 파묻으며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숙녀의 부끄러운 모습을 모른 척 넘어가 주지 않다니. 전하께서는 멋진 남자로 실격이에요.”
“실격이야?”
“네!”
지척에서 클레멘츠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높이와 기척으로 봐서, 그는 소파 옆에 가까이 앉아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럼 이젠 날 안 봐줄 건가? 그건 곤란한데.”
녹진녹진하고 달콤한 목소리가 나를 달랬다.
클레멘츠가 이런 식으로 말할 수도 있었다니.
창피한 것도, 그가 걱정되고 그에게 서운했던 것도 순간 잊어버렸다. 지금 이 순간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곤란했다. 안 그래도 화끈거리던 내 얼굴은, 저 웃음과 목소리로 인해 아주 붉게 달아올라 있을 것이다. 불타는 파프리카처럼.
“놀리러 온 게 아닌데.”
아주 다정하고, 녹아내릴 듯한 목소리.
“너무 사랑스러운 짓을 하고 있으니까, 달려오지 않고 버틸 수가 있어야지.”
나는 그만 고장 나 버렸다. 도대체 맨 정신으로 한 소리가 맞나?
“지금 뭐라고…….”
“얼굴 보여 줘.”
“시, 싫어요.”
“싫어?”
나직한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느껴졌다. 잠시 뒤, 팔걸이에 엎드리느라 뺨에 잔뜩 늘어진 머리카락 위로 작은 온기와 숨결이 느껴졌다. 귀와 가까운 위치였다.
가볍게 닿았다 떨어진 접촉. 잠시 멍해졌던 머릿속이 열기로 가득 차올랐다.
미쳤어! 이 인간은 미쳤어!
마구 몸부림치는 대신 손 안에 들어오는 애꿎은 소파 겉감만 구겼다.
“노래도 안 들려줄 건가?”
당연하지. 고개 드는 것도 창피한데 노래를 들려줄 리가. 고개를 힘주어 끄덕이자 조금 투덜대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코니아와 베일리스에게는 들려줄 거면서?”
“정 듣고 싶으시면 전하께서도 살롱으로 오시든가요.”
그러고 보면 클레멘츠는 노래하는 나를 보면서 좋아하는 마음을 깨달았다고 했다.
칼로카이리 축제 날에는 ‘꼭 다른 사람들 앞에서 노래해야 하냐.’며 재수 없게 말해서, 내 노래를 싫어하는 줄 착각하기도 했지.
“사람들이 내 노래를 듣는 게 싫어요?”
“그래.”
어느샌가 고개를 빼꼼 들어 그를 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선 진득한 감정이 읽혔다.
“다른 놈들이 보거나 듣는 건 싫어. 노래하는 너는 지나치게 매력적이니까.”
으악, 깜빡이 좀 켜고 들어오라고요!
“그럴 리가…….”
“있지.”
기껏 용기 내어 고개를 든 게 무색하게, 다시 얼굴에 피가 몰리는 게 느껴졌다. 심장아, 나대지 마.
바닥에 무릎을 꿇은 클레멘츠가 조금 더 다가왔다. 지척에서 눈이 마주쳤다.
그의 손가락이 내 목을 파고들었다.
“듣는 사람들은 너에게 홀리고, 마력에 홀리겠지. 사실 살롱 따위에도 안 갔으면 좋겠어.”
“…….”
문양을 가린 목걸이의 리본을 건드리던 손가락은, 목을 살짝 덮은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다른 놈들이 네게 매료되는 게 불쾌하다.”
클레멘츠는 마치 내가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혹은 노래만 했다 하면 모든 사람이 내게 반할 거라고 믿는 것 같았다.
그럴 일 없다고 말해도 듣지 않겠지.
목 뒤를 더듬던 손길이 매듭을 풀어냈다. 특정한 의도성 없이 손끝과 살갗이 몇 번씩 스칠 때마다 등골이 오싹했다.
보라색 눈이 드러난 문양을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그의 색이 채워진 곳을 보면서 뭔가를 달래려는 것처럼.
그런데도 그의 눈빛은 점점 초조해졌다.
고작 목일 뿐인데. 보여서는 안 되는 부분을 보이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나는 어색하게 목을 틀었다.
“그래도 가야 해요.”
“그럴 테지.”
이대로 궁 안에 갇혀서 오직 클레멘츠에게만 노래를 들려주는 것보단, 살롱에 나가서 괜찮은 반응을 얻는 게 그에게 더 도움이 될 테니.
그래, 나는 내 존재가 클레멘츠에게 힘이 될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클레멘츠가 어렵고 힘든 일도 내게 털어놓을 수 있게.
“나에게 뭐 할 말 없어요?”
사실 우리 평판에 먹물을 끼얹고 다니는 인간들이 있다든가!
심지어 본인 친동생까지도 연루되어 있다든가!
내 목 근처에 있던 클레멘츠의 손을 꼭 붙잡고 눈을 빛냈지만, 그의 대답은 엉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