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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140)화 (140/218)

140화

엔클레이오를 기점으로 가을날의 정점도 지나가고, 슬슬 날이 추워졌다.

찬바람이 부는 골목을 지나는 사람들의 표정은 밝았다.

척 보기엔 황실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거리엔 아직 노란 병아리가 그려진 현수막이 멀쩡하게 붙어 있었다.

어쩌지? 클레멘츠는 이 일을 알고 있을까?

“무슨 생각 해요?”

깜짝이야.

생각에 잠겨 있느라 누가 옆에 온 줄도 몰랐다. 얼굴을 확인하자 반가움이 솟아올랐다.

“엔시?!”

“안녕하세요, 누나.”

올리브 빛 눈을 가진 소년이 씩 웃었다. 전보다 훨씬 멀끔하고 뺨에 살도 붙은 모습이었다.

“너 이 자식……!”

키도 좀 큰 것 같은데?

한마디로 신수가 훤해진 모습을 보자 감격스러웠다.

“네가 왜 여기 있어?”

“클랏샤에 제가 있는 게 뭐가 이상하죠?”

“짜식, 뻐기기는. 이 수도가 통째로 네 구역이라도 되냐?”

“그런 셈이죠.”

팔짱을 끼고 콧대를 높이는 모습을 보자 웃음이 나왔다.

“잘 지내니? 글로리나 부인이 잘해 주셔?”

“그분이야말로 저의 우상이라고 할 수 있죠.”

응? 우상씩이나?

딱히 단어를 잘못 고르진 않은 듯, 소년의 올리브색 눈동자에는 충성심이 넘실거렸다.

글로리나 부인은 물론 좋은 사람이다. 온화하고 성실하고 규율 있다. 하지만 이 아이가 왜 이렇게까지 따르는지 당장 이해되진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녀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글로리나 부인이 일을 주셨다면서. 할 만하니?”

“천직이죠.”

“어떤 일이야?”

“알면 다쳐요.”

“그으래…….”

얘가 왜 고고히 도시를 누비는 한 마리 사연 있는 새끼 늑대가 된 것처럼 행동하는 거지? 슬슬 그럴 나이인가?

“누나야말로 그 못된 마법사 형이 잘해 줘요? 그런 것치고 표정이 안 좋은데.”

“너, 그 형이 누군지 이제 알지 않니? 말이 좀 거침없구나. 불경죄가 무섭단다.”

“누나만 조용히 해 주면 돼요.”

엔시가 눈을 찡긋거렸다. 그러곤 헛웃음 짓는 내게 대답을 재촉했다.

“아무 것도 아니야. 그냥 좀 추워서 그래.”

“마법사 형이 잘못했네. 누나가 나온다는데 털 망토를 둘둘 두르고 온도 조절 마석을 주렁주렁 달아 줬어야죠.”

나는 충분히 따뜻하게 입고 나왔다. 목 끝까지 채워진 드레스는 털이 덧대어져 있고, 정성스럽게 수놓은 부츠가 발목을 따뜻하게 감쌌다. 춥다는 건 핑계였다.

다만 발갛게 달아올라 있는 내 두 손을 엔시가 꼭 붙잡았다.

“기운 내요. 나는 누나 덕분에 이 도시에 남아 살아가고 있어요. 오필리어 누나가 행복해야만 내가 하는 일에도 의미가 있어요.”

여기까지 듣자 묘하게 걱정됐다.

“대체 무슨 일을 하길래 그래? 설마 글로리나 부인이 위험한 일을 시키시는 건 아니지?”

엔시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말끔하게 손질된 갈색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반짝이며 날 살피는 눈은 판잣집에서 밀알을 가져다주던 그때를 떠올리게 했다.

“누나, 혹시 수도에 떠도는 소문을 들은 거예요?”

“……응.”

어떻게 안 걸까? 엔시는 황궁 바깥 클랏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니까, 암암리에 퍼지는 소문도 벌써 들었을 수 있겠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다 해결될 거예요.”

멍하니 고맙다는 말을 중얼거리자, 엔시는 일할 시간이라며 인파에 섞여 사라졌다.

아이의 등 뒤로 휘날리는 코트 자락이라도 보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분명 엔시는 늦가을용 짧은 재킷 차림인데.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다 해결될 거예요.”

아이에게 걱정을 끼치다니, 어른 자격이 없었다.

한편으론 좀 의아했다. 엔시는 문제가 있다고 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생각하는 부류가 아니었다. 아무 대책 없이 ‘다 해결될 것’이라 말하진 않는다.

엔시가 떠난 뒤. 그 아이가 쥐었던 내 손 안에는 알사탕이 하나 들어 있었다.

황태자궁으로 돌아가 글로리나 부인부터 찾았다.

“오필리어 님이시군요. 바깥나들이는 즐거우셨습니까?”

집사장의 방은 그녀처럼 검소하면서 품위 있게 꾸며져 있었다.

짙은 밤색 벨벳을 씌운 의자에 앉아 가만히 말을 골라냈다.

평소라면 파이 맛에 대한 칭찬과 벨라의 근황, 겨울의 수도 모습을 늘어놨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다른 걸 물어야 했다.

“우연히 충격적인 이야길 들었어요, 글로리나 부인.”

나와 클레멘츠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조작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클레멘츠의 유모이자 집사장인 글로리나 부인은 일찍이 세상을 떠난 황후 대신 그를 보살피고, 보필해 왔다. 그와 관련된 일이라면 모를 리 없었다.

내가 말을 끝마칠 때까지도 그녀는 평온한 표정이었다.

“이미 알고 계셨군요.”

“……예, 오필리어 님.”

엔시는 글로리나 부인 밑에서 일하고, 글로리나 부인은 클레멘츠에게 충성도가 높다.

엔시도, 부인도 안다면 분명 클레멘츠도 알고 있으리라.

“전하께서도 알고 계시겠고요. 아마 이미 뭔가 대책까지 세워져 있겠죠.”

그러니까 엔시가 ‘좋게 해결될 것’이라며 낙관적으로 나왔겠지.

“그렇습니다.”

“2황자 전하께서 개입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계신가요?”

부인은 그제야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그건 몰랐습니다만…….”

“아…….”

“그래도 예상 범위네요.”

원숙한 얼굴 위에 나를 향한 미안한 표정이, 뒤이어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쯤 되면 한마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저만 아무 것도 몰랐을 수 있죠?”

나는 그렇다 쳐도, 자기에게 그렇게 부당하고 악의적인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 그걸 알았으면서 아무 일 없는 척, 다 괜찮은 척.

나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나 하고. 마음 편히 가지라는 말이나 하고.

의연하고 당당하게 따져 물으려고 했는데, 목소리가 볼품없게 떨렸다. 책상 뒤에 앉아 있던 글로리나 부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일어나 다가올 만큼.

“오필리어 님, 오필리어 님은 전하께…… 무척 소중하신 분입니다.”

늘 엷은 웃음에 파묻혀 있던 그녀의 갈색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그 안에 담긴 감정은 따뜻하고 조심스럽고, 절박했다.

글로리나 부인은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전하께서 오필리어 님을 위하시는 마음이 너무도 큽니다. 그래서 그러셨지요. 오필리어 님께 조금의 심려라도 끼치는 걸 원치 않으시니까요.”

“……그게 저를 위한 건가요?”

나도 그런 마음을 알고 있다.

누군가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 꽃길만 걷길 바라고, 모든 곤란은 피해 가거나 헛걸음하지 않고 상처 하나 없이 돌파하길 바라는 마음.

이런저런 문제는 내가 대신 미리 해결해 놓고, 그 사람은 모르길 바라는. 나는 그런 마음으로 벨라의 곁을 지켰다.

그 끝에서 벨라는 뭐라고 대답했더라?

“내가 선택하라고 했으면서, 내 선택을 믿지 않는구나.”

“나에 대한 모든 건 속속들이 알면서, 네가 진짜 무슨 생각인지는……. 알려 주지 않아.”

그 말을 하는 벨라는 슬퍼 보였다. 이제 조금, 그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글로리나 부인은 클레멘츠의 뜻을 따랐다. 그의 행복을 위해 나를 소중히 여겨 주었다.

“부인, 저는…….”

고마운 일이었지만, 나는 무력감을 느꼈다. 글로리나 부인은 내 손끝이 작게 떨리는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방으로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따뜻한 저녁을 드시고 푹 쉬시도록 하세요, 오필리어 님.”

언제나처럼 온화한 미소였다.

따뜻한 방 안에 앉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식사를 받고서야, 로메오 글로리나 앞에선 하지 못했던 한마디가 새어 나왔다.

“부인, 저는 보호받고 싶지 않아요.”

스스로 생각해도 좀 이상한 말이었다. 클레멘츠가 날 주웠던 바로 그 순간부터 나는 보호받아 왔다. 사실상 그가 지켜 주지 않으면 연명이 불가능한 개복치였다. 사실 개복치보다 약했지. 병아리니까.

실컷 그래 놓고 이제 와선 클레멘츠의 보호를 사양한다고? 그가 날 좀 의지해 줬으면 한다고?

그게 가능한 이야기인가? 애당초 나에게 그럴 능력은 있을까?

나는 날지도 못하는 신수의 새끼로 변하는 가난한 남작 영애였고. 클레멘츠는 황제의 후계자로서 부와 권력, 명예를 전부 쥐고 있었다.

그런 사람의 옆에 설 수 있도록 자립하겠다는 것부터 이미 말도 안 되는 소리였는지도 모른다. 전부 내 치기며 자기만족이었고 클레멘츠는 그저 어울려 줬을 뿐인지도.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은 이럴 수 없다고 소리쳤다.

전부 혼자 해결하려고 하는 그가 미웠다. 미운 만큼 걱정도 되었다. 클레멘츠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같이 머리를 맞대면 얼마나 좋을까. 나에겐 그럴 능력도 가치도 없나?

식어 가는 음식을 노려보며 내뱉었다.

“내가 필요하다고 했으면서.”

* * *

밤새 생각해 봤지만 역시 납득할 수 없었다.

내가 도움이 안 된다니. 그럴 순 없어!

아무리 내가 보통의 경우 마음만 앞서고, 그럴싸하게 해내는 건 없고, 날지도 못하는 신수라고 해도.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는 있다는데, 나라고 쓸모가 없을 리는 없잖아.

나도 도움이 되는 존재란 걸 어쨌든 증명해 보이겠어. 그러면 클레멘츠도 다시 생각하겠지.

“삐약삐얏!!(두고 봐!)”

기세 좋은 삐약거림이 황태자궁을 가득 채우……지는 못했고. 작은 소리였기 때문에 내 침대 캐노피 안쪽 정도는 울렸다.

마침 맞게도 유렌과 카렌이 초대장을 한 장 들고 왔다.

카밀의 친구인 에일린 레코니아에게서 온 거였다. 원작에서 조무래기 악역이었던 그녀와는 여름 무도회에서 만난 적 있었다.

초대장은 레코니아 저택에서 열리는 살롱에 와서 자리를 빛내 달라는 내용이었다.

“살롱……?”

“어머나! ‘학문의 레코니아’에서 열리는 살롱이라면 나름대로 명망이 높아요.”

“꺄, 오필리어 님의 사교 행사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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