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황후의 자리에 올랐으면 지고의 영예인데, 무슨 다 죽어 가는 적마법을 해야겠다고 계속 버티다니.”
“실력이 대단하셨다잖아. 몰락 직전인 샹그리아를 일으키고 싶었겠지.”
“그것도 내가 듣기로는…….”
백주 대낮에 탁 트인 장소라는 걸 인식은 한 건지, 그들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
아, 뭔데!
더 이상 들으려면 좀 더 가까이 가야 했다. 그리고 여기서 더 가까이 가면 들킨다.
어떡하지?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나는 거의 들리지 않도록 입술을 움직였다.
“황금색 송이버섯!”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될까 싶었지만, 클레멘츠가 걸어 준 강화 효과 덕분인지 다행히도 변신에 성공했다.
바닥에 붙을 만큼 확 낮아진 시야.
뒷담쟁이들이 있는 바깥과 통로 기둥 사이엔 관목 덤불이 있어서, 그 안에 쏙 들어가 숨을 수 있었다.
“……홀려 있었던 거래. 악마에게 말이야.”
오오, 들린다!
“으, 그때 조금 이상하시긴 했더랬지.”
“정말 무서운 여자로군.”
“헌데 말이야. ……하신 시점에 악마에게 홀려 있었다면…….”
실시간으로 이 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오르면서도, 대체 무슨 소리가 나올지 궁금했다.
그들 역시 긴장한 건지 잔뜩 숨을 죽이는 게 느껴졌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어느 쪽의 핏줄인 거야?”
뭐라고?
조그마해진 심장이 철렁거렸다. 저 사람들이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럴 리 없다. 클레멘츠의 눈동자는 황제와 매우 비슷하다. 또한 그의 얼굴은 동생인 메디프와도 닮아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대악마인 크렘시아가 클레멘츠의 대모인 걸까? 예전부터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황궁에서 태어났고, 정상적인 절차를 밟았다면 시미크 교 사제의 세례를 받았을 텐데.
혼우드에서 보여 준 막강한 능력은? 목덜미의 문신과 때때로 드러나는 요사스러운 분위기는?
“예끼, 이 사람아. 목 달아나고 싶어?”
“맞아. 조용히 해!”
“정도가 있어야지. 닥쳐!”
혼란에 빠진 내 위로 뒷담쟁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고 다니면 되는 거지?”
뭐라고?
예……?
충격에 저절로 부리가 벌어졌다.
시야가 너무 낮아서, 관목의 가지와 잎 사이로 보이는 건 뒷담화쟁이들의 다리뿐이었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고개를 한계까지 들었다. 그러자 한 명이 늘어뜨린 손에 몇 쪽짜리 종이 뭉치를 쥔 게 보였다.
내용은 안 보이지만 대본 같았다. 나머지 세 명도 각자 가지고 있는지, 종이를 팔락팔락 넘기는 소리가 났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황족에 대한 악소문을 퍼뜨리다니.
다들 진짜로 목 아래의 체중을 과감하게 감량한 다음 성문 앞에서 정답게 만나 까마귀 구경하고 싶은가?
하지만, 만약 이들이 들키지 않고 임무를 완수한다면.
아니, 이들을 숨기고 지켜 줄 충분히 힘 있는 뒷배만 있다면, 저 오명을 그대로 뒤집어쓰는 건 다름 아닌 클레멘츠였다.
다리에서 힘이 풀려서 털썩 주저앉았다. 관목 아래 흙바닥에 솜털로 감싸인 엉덩이가 폭 맞닿았다.
“진행 상황은?”
심지어 놀랄 일은 더 남아 있었다. 나는 놀랄 기력이 더 없는데.
“우호 여론이 워낙 막강한 터라, 파고들 틈은 많지 않습니다.”
“부지런히 움직이되, 신중함을 잃지 마라. 정도 이상 몸을 드러내지 말고.”
“알겠습니다. 모든 것은 우리의 목숨인 그분의 뜻대로.”
“흩어져.”
싸늘한 목소리에 덤불 너머의 다리들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절대 잘못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아니, 아니야. 그럴 리가. 목소리가 비슷한 사람도 있잖아.
하지만 그렇게 굵고 낮은 미성은 결단코 흔하지 않다.
살짝 움직여서 그의 모습을 확인하면 간단한 일인데, 그 간단한 일이 너무 무서웠다. 망설이는 사이 명령을 내린 남자는 뚜벅뚜벅 걸어 골목을 벗어났다.
“삐약…….(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기분 같아선 그냥 돌아가 버리고 싶었지만, 아직 가게 안에 벨라와 카밀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높은 확률로 둘이 대치한 채로.
사람이 없는 통로에서 다시 변신하고, 돌아왔는데…….
“이게 누구야.”
그러게, 이게 누구야?
“이런 데서 만나다니 참 반갑네요. 인연이 깊은 걸까요? 벨라.”
방금 전까지 애써 아닐 거라고 부정한 사람이 떡하니 나타나 있으니, 정신이 혼미해졌다.
맑은 하늘을 담은 듯한 머리칼, 매력적인 생김새와 유들유들한 태도.
메디프가 내 자리에 앉아 벨라에게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난 그자가 싫어.”
내게 분명 그리 말했듯이, 벨라의 표정은 착실히 구겨져 있었다. 더불어 카밀의 표정도.
두 여자는 동시에 말했다.
“여기선 그쪽과 볼일 없습니다.”
“저리 좀 가 주시겠어요? 2황자님.”
“너무하네. 둘 다 가끔 저도 상처받는 존재라는 걸 잊는 것 같다니까요.”
카밀은 애타게 주변을 두리번대다 날 발견했다. 그녀의 열띤 손짓에 응해 다가갔다.
“메디프 황자님, 제 자리에서 비켜 주시겠어요?”
그는 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우와. 오필리어까지?”
청보랏빛 눈이 밝게 휘어졌다. 이어 그는 내 머리로 손을 뻗었다. 반사적으로 내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다음 순간, 길고 굵은 손가락 사이에 관목의 나뭇잎이 잡혀 있었다.
아, 젠장.
하필 저게 머리카락에 붙어 있을 건 또 뭐람?
“일부러 붙이고 있던 건가요? 작고 싱그러운 것이라 그런지 당신에게 잘 어울리네요.”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이 지나갔다.
능구렁이 같은 말투. 사람 좋고 순진한 미소. 평소대로의 메디프였다. 그래서 그런지 방금 벌어졌던 일이 거짓말 같았다.
원작에서 메디프는 어떻게 묘사되더라?
한량 같은 둘째. 마법에 살짝 돌아 있는 인싸. 지금껏 내가 알던 모습과 같았다.
그리고 1부 이후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어쩌면 엔클레이오 때 죽거나 실종되었을지도 모르고, 실제로 흑막이었더라도 2부 내용을 모르는 나로선 알 길이 없지.
완전히 뒤통수 맞았다는 소리였다. 흑막 황비의 아들이 그대로 흑막이었을 줄이야.
“오필리어? 무슨 일 있어요?”
잘도 묻는다.
마음 같아선 메디프의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고 싶었다. 당장 모조리 실토하게 만들고, 그 김에 등짝도 몇 대 때리고 발등도 사정없이 밟고 싶었다.
‘방금 그 사람들 뭐예요? 대체 무슨 끔찍한 일을 꾸미고 있는 거죠? 그러고선 여기 들어와서 나와 내 친구들에게 말 걸 낯이 있어요? 믿었는데!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래, 언제 흑화했냐고, 이 서브남아!’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만약 메디프가 정말 흑막을 숨기고 내겐 아무렇지도 않게 구는 거라면, 여기서 모든 걸 알아챈 티를 내면 안 된다.
메디프의 생각이 무엇이든, 들켰다는 걸 알아 버리면 나든 클레멘츠든 더 위험해질 것이다.
짧은 순간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냉정한 판단을 마쳤다.
“아니요. 그냥. 파이가 식었을까 봐요.”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자리에 앉아 접시 위의 파이를 찔러 보았다.
나 지금 자연스러웠지?
“그런데 여긴 어떻게 찾아왔어요?”
“지나가다 봤어요.”
앞으로 다시는 창가 자리에 앉지 말아야겠다.
“오필리어 머리에 붙은 나뭇잎은 내가 떼어 줬어야 하는데……!”
카밀은 엉뚱한 부분에 열을 올리며 장갑 낀 두 주먹을 꼭 쥐었다.
“…….”
벨라는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원래 사람 많은 걸 싫어하는 벨라를 여기까지 끌고 왔는데, 갑자기 인원이 두 배로 늘어나 버렸으니.
“이렇게 다 같이 모인 것도 우연인데, 같이 바깥나들이나 할래요?”
메디프가 해맑게 제안했다.
벨라와 카밀은 한목소리로 되물었다.
“바쁘지 않으십니까?”
“안 바빠요?”
“제가 할 일 없는 거 다들 알고 계시면서.”
거짓말. 흉계를 꾸미고 다니느라 바쁜 주제에.
찻잔 뒤에서 몰래 노려보다가 청보라 색 눈과 딱 마주쳐 버렸다.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면서…….
“와! 좋아요. 다 같이 놀면 재밌죠, 하하!!”
괜한 말을 해 버렸다. 젠장, 이놈의 주둥아리!
“…….”
“역시 그렇죠?”
“하하. 네에.”
정적이 감돌며 벨라와 카밀의 표정이 숙연해졌다. 얘들아, 그렇게 가만있지 말고 좀 말려 줘.
하지만 아무도 내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좀 이상한 그림이 되더라도 내가 직접 번복해야겠다.
“다시 생각해 보니 이렇게 떼로 돌아다니는 게…….”
“네가 원한다면, 좋아.”
벨라였다. 그녀는 씁쓸한 표정으로 남은 홍차를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카밀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련하다 못해 초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필리어 네가 원한다면 저 양…… 2황자 전하와 함께 다니도록 하자.”
메디프는 그렇게 눈치가 없지 않았다. 그는 곱씹다가 내게 속삭여 물었다.
“내가 그 정도예요?”
아마도요.
처음엔 뚱하던 벨라와 카밀은 막상 이것저것 보면서 돌아다니자 기분이 풀린 모습이었다.
붕 떠 있는 건 나였다. 나 혼자만 심각했다.
“너와 같이 이 서점에 오게 되다니! 오필리어, 사실 여기엔 너와 얽힌 소중한 기억이 있단다.”
클랏샤에서 제일 큰 서점에 도착했다.
카밀은 병아리인 나를 독살할 계획을 세우고 왔다가, 여기서 병아리 도감을 한가득 사서 떠났던 이야기를 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향수에 젖어 있었다.
하긴 그 무렵만 해도 나 역시 카밀에게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게 최대 공포였지. 지금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벨라와 대화하는 메디프를 바라보았다.
대체 저놈은 어쩔 생각인 걸까.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그런 뒤 저 서점 문을 나서니깐 글쎄, 너와 관련된 것들이 포인트 조명을 켠 것처럼 반짝이는 거 있지. 연노랑 커튼, 노란 꽃과 보석들이…….”
행복한 표정으로 떠드는 카밀에게 집중할 수 없어서 미안했다. 그녀는 금세 내 상태를 눈치챘다.
“왜 그러니?”
“그냥 조금 어지러워서. 잠시 바깥바람을 쐬고 올게.”
괜찮냐며 안타까워하는 카밀에게 웃어 보이곤 서점 밖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