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그리고 클레멘츠도, 사람들 앞에서 대악마를 소환했으니 국교가 시미크 교인 나라에서 뭔가 안 좋은 소릴 들었을 텐데. 나에겐 그런 말은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다 생각보다 괜찮으니 걱정 말라고만 했지.
실제로 내 앞으로 도착하는 편지의 수는 오히려 더 많아졌다. 부정적인 내용은 아니었다.
그보단 나와 클레멘츠가 너무 로맨틱하고 보기 좋다는 내용이 다수였다.
소설 같고 연극 같은 이야기를 현실로 만들어 줘서 고맙다나.
하지만 교단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터. 저번에 이 얘길 꺼냈더니 클레멘츠는…… 키스로 내 입을 막으며 넘어갔었다!
이 인간 정말 안 되겠네!
아무래도 내 나름대로 상황을 조사해 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클레멘츠에게 물어봤자 안 좋은 얘긴 입도 뻥긋 안 할 거다.
병아리일 때도 날 과보호하더니. 아예 과보호가 기본 태도가 되어 버린 걸까.
또 어영부영 키스하고 넘어가려고 할 텐데, 거기 넘어가지 않고 똑똑히 원하는 걸 알아 낼 자신이 없었다.
* * *
오늘은 벨라와 만나 추억의 파이를 먹으며 회포를 풀기로 했다.
벨라는 수도의 한 저택을 빌려 묵고 있었으니, 마침 나파르 아주머니의 파이 가게가 황궁과의 중간 지점이었다.
병아리가 아닌 채로 혼자 수도 구경을 하는 건 처음이었다.
마차에서 내려 걸으면, 황궁 바깥의 풍경은 더 분주하고 활기가 넘쳤다.
“오필리어 양! 어서 와요.”
가게 문턱에 발을 들이자마자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나파르 아주머니! 장사는 잘돼요?”
“어머! 당연히 오필리어 덕분에 아주 잘되죠.”
아주머니의 말대로 가게 안은 꽉 차 있었다. 사실 장사가 잘된다는 건 보고서를 통해 알고 있었다. 이미 가게를 확장하여, 파이만 테이크아웃 하는 1호점과 홀에서 음료와 함께 먹고 가는 2호점이 벽 하나를 두고 나뉘어 있었다.
점심 무렵이라 한산해졌을 텐데도 1호점 앞의 줄은 아직 길었다.
흐뭇하군. 세상은 달콤한 디저트가 지배할 것이다.
매장 안쪽의 커다란 병아리 인형을 애써 외면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오필리어.”
“벨라!”
벨라는 먼저 와 있었다. 창가 자리 테이블엔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레몬 크림 파이에, 몇 가지 티 푸드가 더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다.
“이분이 우리 혼우드의 백작님이라면서요? 호호! 오필리어 아가씨까지 오신다기에 알아서 몇 가지 내어 왔어요.”
“최고예요, 아주머니. 감사합니다!”
나파르 아주머니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는 일터로 돌아갔다.
테이블 위에 눈 돌아갈 만큼 맛있는 것들이 많은데도, 정작 벨라는 홍차 몇 모금밖에 마시지 않은 듯했다.
“꼭 너 같은 가게를 차렸구나.”
이 퉁명스러운 목소리! 하마터면 잊어버릴 뻔했다.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받아쳤다.
“그거 마음에 든다는 뜻이지?”
“바보.”
역시 마음에 드는 게 틀림없었다.
“수도에 오면 꼭 너랑 같이, 이런 예쁜 가게에서 디저트를 먹고 싶었어.”
“어련하시겠어?”
주변에 앉아서 파이에 차를 곁들이는 손님들은 대부분 우리와 비슷한 연령대의 소녀들이었다.
사방에 퍼지는 차와 레몬 향. 느긋한 분위기. 드레스와 리본과 구두.
시골에 있을 적 꿈꾸던 ‘본격적인 로판’의 모습 그대로였다. 나의 여주인공과 함께니까 더더욱.
벨라와 수다를 떨며 먹으니 안 그래도 맛 좋은 디저트가 끝도 없이 들어갔다. 역시 좋은 사람과 함께 먹으면 더 맛있는 법. 주로 내가 떠들고 벨라는 한두 마디 받아치는 형국이었지만, 변한 듯 변하지 않은 이 모습이 좋았다.
“좋아 보이네.”
문득 그렇게 말한 벨라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천년의 얼음이 녹는 듯한 장면에 그만 들고 있던 찻잔을 놓칠 뻔했다.
“왜 얼빠져 있어?”
“어…….”
언니가 너무 예뻐서요. 예쁘면 다 언니야!
8년을 곁에서 모셨지만 벨라가 저렇게 명백히 ‘웃음’이라고 분류될 수 있는 표정을 짓는 건 처음이었다.
원작에서도 그녀가 처음으로 미소 짓는 장면에 대략 열여섯 줄 정도의 묘사가 할애되어 있었지. 나까지 심장이 두근거리는데, 남자가 봤다면 인생을 저당 잡혔을지도.
하지만 예전과 달리 ‘이걸 클레멘츠가 봤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젠장!’ 따위의 생각은 들지 않았다.
클레멘츠는 내 거야!
벨라는 날 보다가 픽 웃었다. 하긴 나라도 앞에 있는 사람이 혼자 우물쭈물하다, 곰곰 생각하다, 결연한 표정을 지어 대면 웃길 것이다.
크흠, 헛기침을 하고는 다른 화제를 꺼냈다.
“있지, 물어볼 게 있어.”
오늘 나온 건 벨라를 만나 수다를 떨 목적도 있었지만, 클레멘츠에게 묻지 못했던 걸 알아보기 위해서기도 했다.
“물어볼 것?”
“응. 너는 지금껏 궁 밖에 있었으니까. 황태자 전하나 나에 대해 안 좋게 도는 이야기 들은 적 없어?”
분명 뭔가 있는 것 같긴 한데, 죽 황태자궁 안에만 있으니 객관적인 평판을 접할 수 없었다.
질문을 들은 벨라는 잠시 침묵했다.
“……너 내가 사람들에게 관심 없는 거 몰라?”
“아, 그렇지…….”
“그들이 황태자에 대해 뭐라고 떠드는지 따위…….”
말하던 벨라의 표정이 갑자기 굳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아무 것도 아니야. 난 들은 적 없어. 다들 바보같이 얼이 빠져선 널 찬양하는 거 알잖아?”
벨라치고 한 번에 말을 너무 많이 하는데.
게다가 내 눈도 피하고 있다. 이건 필시 뭔가를 숨기는 거다. 이런 경우 추궁하기는 무척 까다로웠다. 벨라는 고집이 세기 때문이다.
“흐음, 알았어.”
일단 수긍하고 넘어가자.
벨라 말대로, 적어도 이 가게의 손님들은 변함없이 ‘레이디 오필리어’에 애정을 가진 듯했다.
멀리서 날 알아본 듯 이쪽을 가리키는 여자도 있었고, 가게 가운데의 커다란 병아리 인형을 찔러 보는 소녀에, 노란 솜뭉치로 된 병아리를 모자에 장식한 여자…….
“이게 누구람?”
바로 그 여자가 왠지 가까이 온다 싶더라만, 우리 앞에서 모자챙을 살짝 들어 올렸다.
“카밀?”
당신이 왜 여기서 나와?
“지나가다가 봤어. 100키보스 밖에서 봐도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럽게 차를 마시는 생명체는 세상에 너 하나뿐이니까!”
창가 자리에 앉은 게 문제였구나!
카밀의 모자를 다시 보기가 두려웠다.
병아리를 머리 위에 떡하니 얹은 채로 당사자를 만나 웃으며 인사하다니. 어떻게 이게 되는 건데? 모델이 사기 캐릭터라서 그런지 묘하게 세련되긴 했지만, 부끄러움은 나의 몫이었다.
“여긴 오필리어가 낸 가게라고 했지. 나도 와 봤어. 그런데…….”
챙 넓은 모자 아래, 카밀의 녹안이 벨라를 향했다.
두 여자의 시선이 사납게 맞부딪쳤다. 나 없는 사이 또 둘이 무슨 일 있었나?
“이 여자랑 같이 와서 오붓한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구나. 내가 아니라……. 하하하.”
“카밀도 앉을래?”
“어머, 좋지!”
만면에 활짝 미소 띤 카밀이 남은 의자에 앉았다. 종업원이 빠르게 그녀 몫의 찻잔을 가져다주었다.
‘베일리스 영애가 오셨어!’, ‘어디?’ 하는 소곤거림이 들려왔다. 역시 인기인이었다.
즐거워 뵈는 카밀과 달리 벨라의 표정은 별로 안 좋았다.
“바쁘실 텐데?”
“저 말인가요, 모나한 백작?”
“찾는 이들도 친구도 많을 거 아닙니까.”
“그렇다 해도 오필리어를 만나려면 다 취소해야죠.”
턱을 괴고 보란 듯 싱긋거리는 카밀. 장갑의 손목 부분엔 노란색과 연녹색 비즈 장식이 예쁘게 늘어졌다.
차게 헛웃음 지은 벨라는 고개를 휙 돌려 버렸고.
나는 별안간 속이 안 좋아졌다.
“화장실 다녀올게.”
얘들아, 제발 사이좋게 지내.
파이 가게와 화장실은 건물을 깊이 가로지르는 통로로 이어져 있었다. 이 통로는 개방된 구조라, 두텁고 네모진 기둥 사이사이로 바깥과 통했다.
“……야말로 분수에 맞지 않는 대우가 아닐 수 없지.”
“제대로 따지고 들려면 문제 삼는 이들이 한둘이겠나?”
밖에서 나누는 이야기 소리도 들렸다. 매장으로 돌아가던 나는 호기심에 멈추어 섰다.
따, 딱히 남의 이야기를 엿듣고 싶진 않았는데. 분위기가 심상찮아서 저절로 관심이 갔다.
“솔직히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여자잖나. 제가 황태자비인 양 설치고 있지만, 실은 황태자 전하의 정부인 셈이지. 가망이 없다고!”
“그깟 병아리로 변하는 게 뭐라고. 말만 들었지, 누가 아다만티스로 변하는 거 본 적 있나? 다 사기일 거야.”
“아무렴.”
아니, 저거 내 이야기 같은데?
실제 평판을 알아보러 나오긴 했는데, 바로 내 뒷담화 까는 현장을 잡다니. 이러기도 쉽지 않다.
정부라니……. 듣기 좋게 연인이라고 해 줘.
안정되었던 속이 다시 뒤집혀 오며 심장이 쿵쾅거렸다. 혹시나 들킬세라 두터운 기둥 뒤에 조심스레 붙어 섰다.
남자들 목소리였다. 둘 셋, 아니, 서너 명 쯤?
“황태자 전하께선 악마를 소환하셨다지?”
“그냥 악마도 아니고 대악마야. 지옥의 불로 황궁 후원을 잿더미로 만들었대.”
와전도 유분수지! 후원이 다 타긴 개뿔, 크렘시아는 깔끔하게 마수와 마수 둥지만 태웠는데.
황가 이야기가 나오자 좀 조심스러웠는지, 뒷담쟁이들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황태자께선 대체 무슨 일이지? 황가에서 악마를 소환하는 일은 십여 대 동안 없었잖나.”
“그야…… 모후와 같은 종류이신 것 아니겠나.”
클레멘츠의 모후. 셀레네 디 샹그리아.
황제가 말한 클레멘츠의 ‘처지’란 그녀와 관계되어 있을 거란 직감이 들었다.
작아진 목소리를 듣기 위해 좀 더 숨을 죽였다.
“붕어하신 황후 마마, 하긴 엄청난 분이셨지.”
엄청나다고? 뭐가?
“욕심이 말이야.”
“아하핫!”
한바탕 걸걸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고인을 저렇게 조롱하다니. 셀레네 황후와는 만난 적도 없고 원작에조차 직접 등장하지 않지만, 피가 싸늘하게 식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