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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137)화 (137/218)

137화

아니, 사실 저건 칭찬이 아닐 수도 있다. 클라우디아 황비가 어떤 캐릭터던가.

‘감정을 그렇게나 한껏 노출하다니. 황궁에 어울리지도 않거니와 수도에 너처럼 천박한 귀족 영애는 없다. 과연 시골 출신답군.’이라는 뜻일 수도 있다.

젠장, 생각해 놓고 보니 진짜잖아!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벨라를 위해서는 책에 나와 있던 사교계의 눈치 화법을 달달 외워서 해석해 줄 수 있었지만, 나는 겉으로는 웃으면서 이중 삼중으로 감춰진 인신공격을 주고받으며 피곤하게 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니 여기서도 내 방식대로 대답할 수밖에.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황비 전하처럼 우아하게 말하고 싶지만, 아무래도 뱁새가 황새를 당장 따라가기란 무리니까요.”

클레멘츠가 빙그레 웃었다. 아무래도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눈웃음이 걷히자 황비의 눈은 파도치는 북쪽 바다같이 차가웠다.

“사랑스러운 아이지요. 오필리어의 말대로, 수도의 모든 귀족들이 같은 표정을 지으며 살 이유가 없습니다.”

클레멘츠가 내 편을 들어주었다. 그건 기뻤지만, 단둘이 있을 때처럼 간지러운 눈길을 보내오니 부끄러워졌다. 부모님이 보고 계시는데 이래도 되나?

“전, 전하…….”

내가 속삭였고, 드디어 황제가 입을 열었다.

“허.”

…! 저 폭언쟁이 아저씨. 드디어 시동을 건 것인가?

긴장한 채 그의 늙은 얼굴을 마주 보자, 황제는 입을 열려다가 무언가에 가로막힌 듯 헛기침을 했다.

음. 마침 고기에 밴 양념이 조금 칼칼했던 거겠지? 딱히 내 얼굴을 보고 뭔가 망설인 건 아니겠지? 나에게 그런 카리스마가 있을 리 없으니까.

침묵이 내려앉았고, 실컷 헛기침을 한 황제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레오라 남작가의 오필리어! 뻔뻔하고 발칙하기 짝이 없구나.”

그래, 드디어 시작됐군. 이 맛이야.

“네 탓에 수도에 어떤 파란이 일었는지 모르진 않을 터!”

제 죄를 압니다요. 예.

“죄송합니다…….”

“클레멘츠 놈이 꽉 막혔어도 제 처지를 망각하는 놈은 아니었다. 그런데 저놈이 이젠 너에게 눈이 멀어 제정신이 아니구나.”

“……!”

“요망한 것이 감히 가벼운 마음으로 이 나라의 황태자를…….”

“……!!”

상황은 심각했지만, 듣고 있자니 저 대사 ‘순진한 내 아들을 꼬여낸 치명적인 요녀’ 포지션에 나를 넣고 계신 것 같은데.

요망한? 치명적인? 제가요?

그야말로 평생 나와는 상관없을 수식어였다. 두근거리며 귀를 기울이고 있었는데, 더 이상 듣고 있을 수 없다는 듯 클레멘츠가 소리 내어 식기를 내려놓았다.

“폐하, 말씀을 삼가……!”

“폐하!”

그리고 나는 급히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클레멘츠가 황제에게 맞서 봤자 상황은 전혀 좋아지지 않으니까.

또다시 아무도 식사에는 집중하지 않는 가족 식사 현장. 제국의 황제, 황비, 황태자가 일제히 나를 주시했다. 나는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저는 황태자 전하께 진심입니다. 절대 가벼운 마음이 아니에요!”

장내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황제도 황비도, 클레멘츠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듯 완벽하고 차분하게 시중을 들던 사용인들도.

“정말 많이 좋아하거든요!”

“…….”

“세상에 전하보다 좋아할 수 있는 남자가 과연 또 있을까요? 사실 저번 생부터 좋아해 온 것 같아요. 그러니 이 마음은 제 노란 머리가 파뿌리가 되어도 변하지 않을 테죠. 이미 전하 쪽 머리는 파뿌리보다 하얗지만, 그 부분까지 완벽하거든요.”

“…….”

어쩐지 너무 조용했다. 하지만 아무도 내 말을 가로막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황제와 황비는…… 흔들리는 동공으로 날 쳐다보았다.

“맞아. 이 자리를 빌려 황제 폐하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가슴에 손을 얹고 공손히 그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뭐, 뭐냐. 갑자기 왜…….”

“이토록 완벽한 황태자 전하께서 세상 빛을 볼 수 있게 해 주셨으니까요!”

“……허억.”

영 생뚱맞은 곳에서 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용인 한 명이 미처 숨소리를 컨트롤하지 못한 거였다. 본인도 놀라서 다시 입을 다물었는지, 다시 정적이 찾아들었다.

물론 클레멘츠는 돌아가신 어머니 쪽을 더 많이 닮긴 했지만, 셀레네 황후는 존재 자체가 현 황실에서 금기어였다. 대신 황비 쪽을 향해 마저 고개를 숙였다.

“어머니 역할을 훌륭히 해 주신 황비 전하께도 그저 감사드릴 뿐이랍니다.”

“어머, 오호호. 이 아이도.”

원체 본인 친아들처럼 유들유들한 황비는 자연스럽게 인사를 받았다. 그 밖의 인사들은 얼굴에 ‘기겁’이라고 써 놓은 채 할 말을 잃을 뿐이었다. 왜지? 나의 사랑의 표현이 그렇게 놀랄 일인가?

그 뒤로도 나는 열심히 진심을 어필했다. 클레멘츠의 외모를 칭찬했고, 흠잡을 데 없는 능력은 또 어떻냐는 말과, 그럴 줄 몰랐는데 사실 얼마나 다정한지 모른다고 또다시 칭송을 늘어놓았다. 그것은 반전 매력이며, 처음에 재수 없게 굴 때마저 설렜던 것 같다는 자가 고백도 함께.

“……오필리어.”

드디어 클레멘츠가 나를 말렸다.

“제발 그만…….”

“어머나.”

하지만 이미 나는 멈추기엔 너무 멀리 나가 있었다. 나는 제 손으로 얼굴을 가린 클레멘츠의 귀가 발갛게 달아오른 걸 보았고, 입을 틀어막았다.

“심지어 황태자 전하께선 귀엽기까지 하세요…….”

하지만 정말인걸. 폭탄 같은 주접에 고개를 떨어뜨리고 얼굴을 붉히는 클레멘츠는 가히 치명적이었다. 그럴 힘만 충분하다면 당장 들쳐 업고 도망가고 싶었다. 누가 눈독 들이지 못하게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싶었다.

“이분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불구덩이에라도 뛰어들 수 있을 것 같아요. 누가 감히 넘본다면 평생 그 사람을 쫓아다니며 숟가락으로 때릴 거예요.”

“하아…… 오필리어.”

얼굴을 가리지 않은 그의 손이 다가와 내 손목을 꼭 쥐었다. 하지만 내가 애매한 순간에 입을 다문다고 끝날 일이 아니었다. 나는 헤벌쭉 웃으며 황제와 황비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들은 흠칫거렸다. 내 착각이 아니었다. 내가 느끼기에도 지금 내 눈빛은 살짝 맛이 간 것처럼 보일 듯했다.

“이 감정이 사랑일까요?”

심지어는 황비마저도 이 상황을 감당하기 힘들어 보였다. 그녀의 하얗게 분칠한 관자놀이에 식은땀이 맺힌 게 보였다.

“두 분께서도 이런 감정을 가지고 서로 존중하며 오랜 시간 함께해 오신 거겠죠? 정말 존경해요.”

“……후우, 물론이란다, 오필리어.”

“큼. 흐흠,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이번엔 황제도 충격에서 벗어나 긍정했다. 역시, 이런 상황에 ‘아니, 우린 딱히 그렇지가 않다. 황족의 결혼이란 비즈니스니까.’라고 대답할 수도 없는 것이다. 아무리 그게 사실이라도.

나는 처음에 그랬듯 활짝 웃었다.

“그러니까…… 부디 저희 사이를 허락해 주세요!”

“그렇게나 날 좋아하는 줄은 몰랐군.”

한결 후련한 기분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클레멘츠의 손을 꼭 쥐었다. 이번엔 손바닥에 땀이 차지도 않았고, 기분 좋은 온기가 피부를 통해 맞닿아 있었다.

“몰랐다고요?”

“그래. 나 혼자서만 많이 좋아하는 줄 알았지.”

정말?

걸음을 멈추고 올려다본 그의 얼굴에선 홍조가 거의 가라앉아 있었다.

아쉽다. 발갛게 붉힌 얼굴이 참 예뻤는데. 손을 위로 뻗자, 클레멘츠는 허리를 숙여 제 얼굴을 가까이 해 주었다. 내가 만지기 쉽도록.

“이상하네요. 억울해. 고백도 내가 먼저 했고, 분명 있는 대로 티 낸 줄 알았는데, 어떻게 모르고 있을 수 있죠?”

“너에 대한 내 마음을 생각하면…….”

“생각하면?”

은빛 속눈썹이 자수정 같은 눈을 나른하게 가렸다. 그러다 위로 올라가며 우리의 눈이 마주쳤다.

“그보다 큰 건 상상하기 힘드니까.”

“……뭐예요.”

말로는 툴툴댔지만 내심 설레서 눈을 피했다. 아, 얼굴에 이렇게 손을 대면 피부에 안 좋은데. 미의 결정체가 내 손 아래 떡하니 내밀어져 있으니 멈추기가 힘들었다.

그의 얼굴을 계속 지분거리자, 클레멘츠는 아예 나를 들어 올려 걸음을 옮겼다. 포석을 딛고 있던 발이 쉽게도 허공으로 떨어졌다. 내 무게를 받친 팔은 단단하고 안정적이었다.

“그래서 기분은요?”

“기분?”

“저의 지극한 마음을 드디어 아신 소감 말이에요.”

부러 한껏 오만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오롯이 나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세상에 단둘뿐인 것처럼.

“그, 그렇게 웃으면서 넘기려고 하지 말아요. 얼굴로 넘기는 건 반칙이에요.”

“말로 표현하기 힘들어.”

“좀 힘내 봐요. 언어학부도 나오셨잖아요.”

“언어학부는 그런 곳이 아니야.”

참 잘나셨소. 나는 꾸준히 대답을 졸랐다. 열두 걸음을 더 걷기 전, 클레멘츠는 팔을 내려 내 귓가에 속삭였다.

“알면 네가 기겁할 텐데.”

“……?!”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그의 등을 때렸다. 굉장히 무엄한 짓이었지만 클레멘츠는 전혀 아프지 않은 듯 쿡쿡 웃어 댔다.

내가 좋아한다는데, 대체 내가 기겁할 생각이라는 게 뭘까? 궁금했지만 묻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귀를 간지럽히는 낮은 목소리만으로도 충분히 기겁했으니까.

황제와 황비가 나를 불러들인 건 너무 큰 사고를 쳤기 때문이지, 클레멘츠의 결혼 상대로 여겨서는 아닌 듯했다.

‘결혼 얘기는 한마디도 안 꺼냈어.’

그러니 나도 우선은 서로 자립하고 나서 결혼 문제를 고려하기로 했다느니, 굳이 늘어놓지 않았다.

또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황제가 한 말이었다.

클레멘츠가 꽉 막힌 부분은 있어도 처지를 망각하는 놈은 아니라고 했지.

클레멘츠는 나라의 미래를 짊어진 황태자다.

하지만 그 얘기를 하는 거였다면 ‘지위’라든지 ‘신분’, ‘위치’, 하다못해 ‘의무’같은 단어를 썼을 것이다.

처지라니. 그런 말은 클레멘츠가 어떤 부정적인 상황에 놓여 있다는 뉘앙스였다. 나와 무관하게, 처음부터.

그게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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