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예. 그때부터 지금까지, 위대한 뒤싱겐의 정신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으니까.”
벨라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 남자에게 뭘 기대한 걸까?’
못 미덥다고, 미심쩍다고는 했지만, 내심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처음 보는 여자가 멧돼지를 잡다 다칠까 봐 끼어든 모습 탓에. 오필리어를 구하겠다고 서슴없이 나서는 모습을 본 탓에.
그러나 잘못 봤다.
“그러니까 아마도 안 될 공산이 크지만, 정 당신이 원한다면 알맞은 절차에 따라 황실에 탄원서를 접수하도록 하세요.”
“서류 접수……. 그렇군요.”
“예. 이왕 황궁까지 오셨으니 서무과로 데려다 드릴까요?”
그는 친절한 미소를 띠며 나가는 길을 가리켰다.
기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나자 남는 건 수치심이었다.
“도와주지 않을 거라면, 왜 증명하게 했죠?”
“그건…… 미안해요. 제 호기심 탓에.”
“그놈의 위대하신 뒤싱겐이면 흥미롭자고 남의 시간을 뺏어도 되는 건가?”
“물론 아니죠. 마수에 대해 알려 주신 데는 필히 정당한 대가를 치를게요. 나중에…….”
“이거 놔!”
무심코 벨라의 손을 쥐던 메디프는 떨쳐 내는 강한 힘에 뒤로 밀려났다.
그녀가 언성을 높인 순간, 사육장을 가득 채운 마수들이 일시에 함께 울부짖었다.
메디프는 전율했다.
여자는 그를 매섭게 쏘아보더니, 스스로 뒤돌아 출구 쪽으로 걸었다. 드레스의 은빛 뒷자락이 반짝이며 퍼지다가, 급작스러운 움직임에 다시 홱 뒤틀렸다.
“황실에 요청할 것이 있으면 탄원서를 올려라……. 그래, 그게 당연하겠죠. 이런 기본적인 것도 모르는 제가 한심하게 느껴지시겠죠.”
메디프는 대답하지 못했다. 벨라의 말대로여서가 아니라, 전혀 생각해 본 적 없는 걸 들으니 당혹스러워서.
벨라는 그의 침묵을 오해했다.
그가 도와줄 거라 생각했던 자신이 한심했다.
오필리어를 위험에 몰아넣었다고 의심하면서도 그를 의지하려고 했다는 게 부끄러웠다.
그런데 메디프가 자신을 밀어내자, 얄팍한 밑천이 모조리 드러나 버린 느낌이 끔찍했다.
이 끔찍함을 쏟아내 버려야겠단 마음뿐이었다.
“2황자 전하께는 자수에 노래 연습 따윌 줄기차게 시켜 대는 오라비가 없었지 않습니까?”
“저기…….”
“학자와 정치가들이 앞다퉈 가르치려 든 당신들 형제와 달리 나는, 날 포함한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내가 백작이 될 거라 생각하지 않았어.”
못나고 뾰족한 말들이 비어져 나왔다.
돌아가면 괜한 말을 지껄였다는 후회에 사로잡히겠지만, 분노에 눈이 먼 벨라는 아직 몰랐다.
그저 독기 어린 눈으로 메디프를 한차례 더 쏘아보고, 연구동을 나서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벨라루시아…….”
메디프는 망연히 섰다. 인간관계엔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그조차 곤혹스러웠다.
‘이게 아닌데.’
그녀가 오라비의 뒤를 이어 백작이 된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귀족으로서 기본 소양 교육을 받지 못한 줄은 몰랐다. 수도에선 영애든 영식이든 당연히 받는 것이었지만, 혼우드는 사정이 다른 모양이었다.
무엇보다 그런 민감한 가정사는 알고 싶지 않았다. 메디프는 제 하늘색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게…… 아닌데?”
불가해한 능력을 가진 마수의 왕. 금기된 야성이자 마력의 신비.
평소라면 도저히 그냥 둘 수 없는 그녀를, 허락되지 않은 입장이니 밀어내려고 했다. 그러려던 게 아무래도 그녀의 자존심을 한참 잘못 건드려 버린 듯했다.
분명 이대로 돌아서 다시 보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런 식으로 영영 헤어지고 싶지도 않았다.
‘망할.’
생각을 다 마치기도 전 연구동을 뛰어나가고 있었다. 늘어뜨린 검은 머리칼과 은빛 드레스자락이 보였다.
“벨라!”
그는 돌아보지 않고 휘적휘적 걷는 벨라를 멈춰 세웠다.
“가지 마세요, 모나한 백작.”
잔뜩 일그러진 얼굴과 경멸하는 눈빛마저, 새삼 몸서리쳐지도록 아름다웠다.
“또 무슨…….”
“탄원서 작성을 도와 드리죠. 서류 작업이 익숙지 않다 하셨으니……. 그리고 마수의 지성 문제 진술도 제가 있으면 더 편할 거예요.”
어둠에서 태어난 듯한 그녀의 모습 위에 햇빛이 산산이 부서졌다. 메디프의 심장이 느린 속도로 내려앉았다.
“……황실의 권위 문제라서 바꾸기 어렵다면서요?”
“원래는 그렇죠. 하지만 이번에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 황제 폐하께선 엔클레이오 자체에 회의감을 가지셨어요.”
“…….”
벨라는 의심스러운 눈길로 메디프를 훑었다. 유들유들하게 웃는 낯엔 평소와 달리 진땀이 배어 있었다.
엔클레이오 이후, 황제가 며칠씩 방에 틀어박혔다고 들었다. 그 탓에 벨라의 충성 맹세도 늦어졌다.
바깥으로 나온 황제는 생각보다 쾌활해 보였지만, 황태자에게 감정이 안 좋아 보였다. 궁 밖에서야 황태자가 인기를 끌었는지 몰라도, 황실의 구도 안에선 누가 이득을 보았는지 명백했다.
‘메디프 황자, 당신이 통신구를 통해 이 모든 상황을 유도했나?’
꼴사납게 소리 지르고 나왔는데 급히 붙잡으러 나온 것도 수상했다.
‘나는 오필리어와 연결되어 있어. 혹시 그 애에게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건가?’
아무리 감정이 상했다지만 역시 그렇게 성급히 나와 버리는 게 아니었다.
마침 도와주겠다고 스스로 나섰으니, 무슨 속셈인지 알아봐야겠다는 마음이었다.
“선의에 감사드립니다.”
“그, 그리고……. 백작의 오라비에 대한 말은, 난 그저…….”
“아까는 제가 헛소리했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앗, 네…….”
메디프는 풀이 죽어서 따라왔다. 벨라는 헷갈렸다. 웃는 얼굴을 하곤 오필리어를 궁지로 몰아넣은 뱀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면 그냥 바보 같아 보이기도 했다.
‘지켜볼 거야.’
저 모습이 의도적인 거라면 더욱 무서운 자였다.
* * *
황제와 황비가 클레멘츠를 불렀다. 나도 같이.
이번엔 병아리가 아니라, 원래 모습으로 오라는 특별한 전언이 있었다.
“……젠장!”
설마 사람인 게 들통날 줄은 모르고 내가 두 사람 앞에서 어떻게 했더라?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기억이 모두 업보였다.
황제 앞에선 수레국화 꽃을 들고 애교를 부리고, 황비는 대놓고 싫어하는 티를 냈다.
망했군.
대체 왜 나를 보겠다고 하는 걸까? …아니, 생각해 보니 부르는 게 당연한 것 같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황태자가 그런 대형 사고를 쳤고, 원인은 나니까.
“괜찮을 거예요, 오필리어 님.”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이렇게 사랑스러운 분께 심하게 대하실 리 없어요. 그리고 황태자궁은 모두 오필리어님 편이에요!”
유렌과 카렌은 용기를 불어넣으며 드레스를 입혀 주었지만. 영 걱정되었다. 과연 황제 부부는 무슨 말을 할까?
‘우리 아들과 헤어지렴. 섭섭지 않게 넣었다.’
‘받을 수 없어요. 저는 돈을 보고 황태자 전하를 만나는 게 아니에요!’
이건 너무 K-드라마 같은데.
‘너 같은 근본도 모를 것에게 우리 클레멘츠를 맡길 순 없다. 썩 꺼지거라.’
‘폐하! 어떻게 오필리어에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제가 사랑하는 여자입니다. 우리 사이를 허락해 주십시오.’
‘이 한심한 놈! 키워 준 은혜도 모르고!’
‘하, 말이 안 통하는군요. 저희 분가하겠습니다. 오필리어, 가자.’
이것도 너무 K-드라마 같은데.
“오필리어?”
초대 장소인 황제궁까지 가는 길. 머릿속으로 돌린 14번째 시뮬레이션에서 얼굴에 물을 맞는 장면까지 상상했을 때 클레멘츠가 나를 불렀다.
“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너무 긴장하지 말거라.”
내가 긴장했다고?
한 손으로 꼭 쥐고 있던 노란색 드레스 자락을 놓았다. 손바닥은 습했고 몸 곳곳에 어색하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두 분 다 저를 싫어하실 것 같아요. 그렇잖아요. 전하께서 어디가 빠지신다고, 저 같은…….”
나오는 대로 중얼거리다 보니 놀랄 만큼 자신감 없고 볼품없는 소리였다.
왜 항상 클레멘츠 앞에서는 이런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이게 되는 걸까. 그러나 그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살피다가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전에 말했었지. 복잡하게 미리 생각할 필요 없으니, 마음 편하게 가지라고.”
그게 지금도 해당되는 걸까? 황제와 황비까지 만나는 중요한 자린데.
하지만 클레멘츠는 정말로 아무 문제 없다는 듯 잔잔하게 웃었다. 멍하니 그 얼굴을 보고 있으니 갑자기 힘이 났다.
그래! 그가 이렇게 나와 주는데 내가 미리 겁먹고 있으면 안 되겠지!
“좋아요. 가요!”
자고로 귀하게 키운 자식의 짝으로는 누군들 모자라 보이는 법. 다소 반대에 부딪히더라도 정면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겠다.
갑자기 되살아난 나를 보며 클레멘츠는 작게 웃었다.
“황태자 전하와 레오라 영애가 오셨습니다.”
시종의 목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어서 오렴. 편히 앉고.”
예상했던 돈 봉투나 폭언, 물잔 세례는 없었다. 후, 그렇지. 명색이 제국의 황제와 황비인데 그런 상스러운 일이 일어날 리가.
다만 그 모든 것이 없어도 전해지는 압박감이 있었다.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스테이크를 썰고, 포도주를 음미했다. 열두 살부터 받은 귀족 교육은 오늘을 위해 의미가 있었다고 느껴질 만큼.
황족과 어울리는 신분도 아니고, 외모가 뛰어나지도 않았다. 내세울 만한 재주가 있지도 않았다. 그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니 별달리 가리려고 애를 쓸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만이 가진 장점도 있었고, 클레멘츠는 나를 선택했다. 그러니 사서 쪼그라들 이유도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최대한 구김살 없이 환하게 웃었다. 내가 잘하는 것들 중 하나였다.
“어머나, 보기 좋아라. 우중충한 궁 안에 햇살이 내리쬐는 것 같네. 요즘 수도에서는 저렇게 밝게 웃는 아가씨가 얼마나 드물던가요.”
황비가 온화한 목소리로 칭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