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폰트 남작은 이리스 영애가 그러했듯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도 제게 일어나는 상황을 납득하지 못했다.
“너 누구냐! 워, 원하는 게, 컥!”
벨라는 그가 많은 말을 하게 놔두지 않았다. 하얀 손이 목덜미를 잡아챘다. 잘 다듬어진 손톱은 맹수의 본능으로 경동맥을 짓눌렀다.
“죽여 버리고 싶어…….”
“히, 히익.”
그녀는 마침내 달달 떨며 눈물을 보이는 남작을, 그다지 안 내키는 먹잇감 보듯 못마땅하게 내려다보았다.
세계를 열어 준 사람은 오필리어. 따라서 오필리어는 그녀가 살아가기로 마음먹은 세상 그 자체의 의미였다.
이 하찮은 자는 그런 오필리어를 욕보였으니, 이 세상에서 배제해 버리면 된다. 모든 것이 서툰 벨라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은 보다 간단했다.
‘오필리어라면 어떻게 했을까?’
한없이 무른 그 애라도 화는 낸다. 무릎 꿇고 싹싹 빌게 할지도 모르고, 아마도…….
‘사과하라고 했겠지.’
그런 애니까. 누구든 달라질 거라고 믿고, 자꾸만 기회를 주려고 한다.
하지만 벨라는 달랐다. 그녀는 폰트 남작이 뉘우칠지 말지, 전혀 관심 없었다. 이미 없는 게 나은 사람으로 분류되었으니 없애고 싶을 뿐이었다.
성년이 되기까지 작은 짐승 하나 제 손으로 해친 적 없긴 했지만, 이젠 달랐다. 벨라는 소중한 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손에 피를 묻힐 때도 있어야 함을 뼈저리게 배웠다.
“살려, 윽, 죄, 죄송……! 뭐든. 컥! 뭐든 할 테니……!”
그렇기에 숨넘어가기 직전에야 뭔가 만회해 보려는 그의 태도는 무의미했다. 남작의 목을 쥔 손에서 힘을 푼 것은, ‘이렇게 사람을 죽이면 오필리어가 슬퍼하겠지.’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 모양 이 꼴이라도 어쨌든 사람이니까.
“그만. 베일리스가의 저택에선 살인 금지예요.”
암만 그늘진 골목이라지만 이 난리가 벌어지는데도 쥐 죽은 듯 조용하던 곳에, 카밀 드 베일리스가 우아하게 걸어 들어왔다.
벨라의 손에서 놓여난 폰트 남작은 한바탕 기침을 쏟았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연신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베, 베일리스 영애. 이 여자가 저를…….”
“예?”
“이 마녀 같은 여자가 저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베일리스 영애. 공정하신 영애께서 부디 올바른 판단을…….”
“어머. 어디 많이 편찮으신 모양이군요, 남작님. 안색이 정말 안 좋아요.”
카밀은 폰트 남작의 겉옷에 꽂힌 손수건을 꺼내 그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그는 제 입가가 타액과 거품으로 엉망인 줄도 모르고 있었다.
“저 여자가…….”
“무슨 일 있으셨나요?”
카밀은 생긋 웃었다. 마치 옆에 뻔히 있는 벨라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제야 폰트 남작은 깨달았다.
자신이 이리스 영애와 함께 레오라 남작 영애를 욕보였다는 걸 베일리스 영애는 잊지 않았다. 이건 의도적인 보복이었고, 저 무서운 여자가 가세했다.
카밀 드 베일리스는 원래 잔인하기로 유명했다. 황태자에게 접근했다가 어느 순간 병상에 눕고, 영지로 돌아가고, 심지어 실종된 여성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는 남성이기에 상관없는 일이라고 여겨, 잊고 있었을 뿐.
“가세요. 목숨은 건졌으니 다행인 줄 아시고. 대낮이 아니라 밤이었다면 결과가 어땠을지 모르잖아요?”
이번에야말로 ‘꾀꼬리 같은’ 목소리였지만, 폰트는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 아직 다리에 힘이 돌아오지 않아 네 발로 기어야 했다.
두 여자는 그 한심한 뒷모습을 지켜봤다.
“품위 없어요.”
카밀이 한마디로 평했다.
“내 쪽보다 저놈 쪽이 더 품위 떨어지게 만들어 줬잖아?”
“흥.”
카밀은 더러운 것을 버리듯 손수건을 버리고, 부채를 펼쳐 살랑거렸다.
“자신 있게 말하기에 뭘 어떻게 손봐 줄지 궁금했는데. 거칠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통쾌했다. 꼴사나운 놈이 직접적인 폭력 앞에 무릎 꿇는 것. 좋은 볼거리 가운데 하나임은 부정할 수 없었다.
“인정하죠. 당신, 꽤 쓸 만하네요.”
벨라는 제 앞에 내밀어진 카밀의 손을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공단 장갑을 낀 손이 무안함에 살짝 떨렸다.
“이건 뭡니까?”
“뭐긴요.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는…… 크흠! 당신도 나도 오필리어를 좋아하니까. ……지금 이 카밀 드 베일리스가 먼저 내민 손을 거절하겠다는 건 아니겠죠? 설마?”
심드렁한 눈이었다. 카밀은 그녀의 대답을 미리 깨달았다.
‘이, 이 무례하고 조악한 인간! 오필리어는 어떻게 이런 여잘 제일 친한 친구라고…….’
그럼에도 ‘제일 친한 친구’가 벨라라는 사실에 눈물이 찔끔 나왔다.
“관심 없으니 당신 친구들에게나 가 보세요, 베일리스 후작영애. 당신은 오필리어가 아니라도 친구가 많지만, 나에게는 오직 오필리어뿐이거든.”
무감정하게 내뱉은 벨라가 손을 털고 쌩 멀어져 갔다. 카밀은 멍하니 남겨졌다.
“뭐야. 친구 없다는 게 자랑이야?”
친구가 많다는 건 늘 그녀의 자랑이었다. 사교계에 자신의 편이 많다는 건 그 자체로 매력과 권력의 척도였다.
“근데 왜 진 기분이 들지……?”
* * *
‘참 번거롭게 사는 여자야.’
벨라는 굴러가는 마차 안에서 생각했다.
“그거야 당연히, 오필리어의 진정한 친구는 바로 저라는 걸 확인하시라고 부른 거죠.”
그런 황당한 이유로 사람을 오라 가라 하다니.
하지만 번거로운 짓을 해서라도, 오필리어에게 방해되는 것들을 한 번에 치우겠다는 적극적인 태도는 마음에 들었다.
그뿐.
벨라는 제게 내밀어지던 손의 기억을 훌훌 털어 내 버렸다.
그 여자가 아니더라도 신경 써야 할 일이 있었다. 수도는 번거로운 일투성이였다.
그녀는 황궁으로 가고 있었다.
수상쩍은 황자, 메디프를 만나야 했다.
“사료에 계란 노른자가 들었다고 하는군요. 자기는 그걸 싫어한다고.”
“양옆에 켜 놓은 등 때문에 잠을 못 잔다고 합니다. ……그리고 옆 케이지 녀석이 잠꼬대가 심하다네요. 다 때려 부수고 죽이기 전에 배치를 바꿔 주든지, 풀어 달래요.”
“…….”
“이 아이는 끌려오다가 왼쪽 엉덩이에 가시가 박혔대요. 케이지에선 혼자 빼낼 수 없다네요. ……당신을 포함한 흰 옷 입은 것들은 다 머저리라는 말을 전해 달라는군요.”
메디프는 멍청히 서 있다가 대답했다.
“그렇군요.”
그들은 마수 사육장에 있었다.
하얀 철 우리에 갇혀 통제당하고 있는 마수들을 실제로 보니, 벨라는 메디프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기어이 내가 이런 꼴을 보게 만들다니.’
더더욱 마음에 안 드는 자였다.
하지만 입증해 내야 했다.
“지성이요? 마수에게요?”
그는 마수에게 지능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말해 줘도 믿지조차 못했다.
마탑 출신 마법 생물 연구자라는 그조차 모른다면, 세상 다른 누구도 모르고 있을 터였다.
벨라가 지시하는 대로 처리하자, 이유 없이 소란을 부리던 마수들은 조용해졌다.
“허어…….”
연구용 흰 로브를 덧입은 메디프는 고민에 빠졌다.
마수에게 지성이 있다는, 더 나아가 자신은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황당한 주장에도 근거가 생겼다.
그러고 보면 엔클레이오 때, 그녀는 나타난 마수와 한참 눈을 마주치고 있었더랬다. 그건 어떤 소통이었는지도 몰랐다.
건강하게 그의 멱살을 잡다가 갑자기 쓰러진 것 역시 이 능력과 관련되어 있으리라.
“이런 이야기는 들어 본 적 없는데.”
그의 목소리에 기이한 흥분이 배었다. 증명되지 않은 마도학 명제나,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마법 현상을 볼 때면 들던 기분이었다.
“……전하, 눈빛이 어딘가 소름 끼칩니다.”
“아, 이런. 실례했어요.”
메디프는 눈동자를 감추듯 살살 웃었다.
“그러고 보면, 초대 황제 유스티온은 마수를 통제하기 위해 마녀 랜니스를 유인해 사살했지요.”
“…….”
벨라는 움찔거리며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깊이 파고들어 생각을 정리하는 메디프는 미처 보지 못했다.
“만일 정말 마수에게 지성도 감성도 없다면, 그 마녀만큼은 따랐을 리가 없네요.”
마수 연구가들마저 이 이야길 놓쳤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알고 보니 그녀의 요청은 허황되지 않았고, 충분한 근거도 있었다.
하얀 벽과 철장으로 되어 있는 사육장에서 검은 머리의 벨라는 이질적이었다.
‘길들여지지 않는 야성.’
그녀를 보고 있자니 문득 그런 어구가 떠올랐다.
벨라루시아 모나한은 분명, 온전히 새로운 세계를 향하는 끈이었다. 붙잡으면 그는 지금껏 알지 못하던 것들을 알고 겪게 될 터였다. 그것이 어떤 감정이건, 마수의 세계와 관련된 비밀이건.
연구와 해석을 허락하지 않는 것. 그 심장으로 다가가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신비.
그건 분명 지나칠 수 없는 매혹이었다.
메디프는 마법의 신비를 사랑했다.
이성의 돛을 달고 미지의 바다를 헤쳐 나가는 청마법도. 구도자의 눈으로 현상 너머를 관조하는 적마법도.
심지어는 악마의 힘을 빌리는 흑마법이라도 마냥 알아내고만 싶었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야 했다. 벨라루시아, 저 여자는 오필리어의 죽고 못 사는 친구였다.
오필리어의 편이라는 건, 곧 황태자와 이어졌다는 뜻.
잘라 내야 할 끈이었다. 애당초 가까워지지 않는 편이 가장 좋았다.
오필리어와의 끈을 잘라 내라고 그의 어머니가 뭘 강요하던가? 마수 앞에 그녀를 던지라고 했다.
혼우드의 새 백작과 가까워졌다간 또 어떤 식으로 관계가 어그러져 버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씁쓰레하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하지만 당신도 알겠죠. 엔클레이오에 마수를 이용하는 건 황실의 오랜 전통이에요.”
긴장한 채 그의 입이 열리기만을 지켜보던 벨라는 속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전통이라. 그렇겠죠. 초대 때는 마녀를 죽이고, 뒤를 이어 대대로 마수를 죽이고.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군요.”
힐난하는 목소리는 몸서리 쳐지게 차가웠다. 그러나 메디프는 뻔뻔한 미소를 뒤집어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