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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134)화 (134/218)

134화

“아니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단지!”

“하지만 당신 말뜻이 그렇잖아요, 로카르나 양.”

쥐 죽은 듯 조용한 연회장 안. 날카로운 세검 같은 카밀의 말만이 우아하게 휘둘러지며 로카르나를 몰아붙였다.

카밀은 다리에서 힘이 풀려 주저앉는 그녀를 따라 몸을 낮췄다. 그리고 눈물이 흘러내리는 턱을 부채로 툭툭 쳤다.

“소신 있게 말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죠. 로카르나 양께선 황족의 권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심중의 본의를 말하셨으니,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베, 베일리스 영애. 제발…….”

“어찌, 로카르나 양 뜻이 황가에까지 전달될 수 있도록- 제가 한번 힘써 볼까요?”

카밀은 말을 마치곤 사근사근 웃었다. 로카르나는 미친 듯이 고개를 젓더니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제가 실언했어요. 영애, 제가…… 혀를 잘못 놀렸어요. 흐엉……!”

“이런…….”

라일라 세인이 가엾다는 듯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래서는 연회를 즐길 수가 없겠군요. 댁으로 돌아가 쉬시는 게 좋겠어요.”

로카르나 데 이리스는 여전히 흐느끼며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참석객 중에 섞여 있던 그녀의 친구가 보다 못해 나와서 부축했다.

패배자가 파티장 밖으로 멀어지는 걸 보며, 나머지는 재빨리 계산을 수정했다.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베일리스 영애는 오필리어 레오라에게 굉장히 적극적인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당사자는 없는 자리에서 이런 짓까지 벌일 정도로.

비록 그들은 오필리어에 대해 부정적이었지만, 대부분은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취한 입장이었다.

이유조차도 별것 없었다.

원래 신분도 낮은데 주목받으니까, 전설의 새랍시고 나타난 게 꼴사나워서, 혹은 그냥 심심해서.

귀족파의 대표인 베일리스. 거기에 황금의 세인과 학문의 레코니아까지 저쪽에 붙은 마당이었다. 꿋꿋하게 고집 부리다가 저 셋과 한 번에 등 돌리고 싶진 않은 게 당연했다.

따라서 그들은 종전의 폰트 남작처럼, 손쉽게 입장을 뒤집었다.

“나의 오필리어를 욕보이다니. 저런 사람과는 공석에서든 사석에서든 마주칠 일 없으면 좋겠네요.”

“맞아. 불쾌한 사람이었어요, 카밀.”

“다음엔 저런 자들이 없는 자리를 만들고 오필리어를 초대할까요? 음, 살롱이 좋겠어요! 오필리어는 노래 실력이 출중하다고 하니, 운 좋으면 청해서 들어 볼 수 있을지도요.”

카밀과 두 날개가 떡밥을 던지자, 뭐라도 받아먹으려고 기다리고 있던 물고기들이 너도나도 헤엄쳐 왔다.

“세상에. 그 살롱에 참여할 수 있다면 정말 영광이겠어요!”

“운이 좋게도 저는 칼로카이리 날 레오라 영애께서 노래하는 모습을 직접 봤답니다! 그 어찌나 사랑스럽고 맑은 목소리였는지…….”

“베일리스 영애께서도 물론 참석하시겠지요?”

오필리어가 노래를 부르는 살롱은 이미 기정사실화된 것 같았다.

카밀은 순식간에 태도를 바꾼 이들을 응대했다. 이런 반응을 의도하긴 했지만, 그들을 보는 눈이 차가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카밀. 그런데 저 사람은…?”

소란이 진정되고 파티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에일린 레코니아가 눈짓으로 가리킨 이는 주변에 섞이지 않은 채 멀뚱히 서 있었다. 샤르도네 와인이 담긴 잔을 들고, 정물처럼. 흡사 파티가 뭐 하는 곳인지, 이 자리엔 왜 있어야 하는지 모르는 듯한 태도였다.

“예쁘긴 예쁘네요.”

라일라 세인이 깜짝 놀라 평했다. 은색과 금색이 적당히 섞인 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카밀과 견줄 만큼 미인이었다.

머리카락은 까마귀의 윤 나는 날개 같고, 묘한 매력의 푸른 눈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카밀은 싱긋 웃으며 다가섰다.

“안녕하세요, 모나한 백작.”

“별일이군요. 이런 쓸데없는 곳에 날 왜 부른 거예요?”

직설적이고 무례한 말투는 여전했다. 그러나 카밀은 꼿꼿한 목을 더욱 오연히 펴 들었다.

“그거야 당연히, 오필리어의 진정한 친구는 바로 저라는 걸 확인하시라고 부른 거죠.”

“……어이가 없네.”

벨라는 와인으로 목을 축인 뒤 빈 잔을 시종의 쟁반 위에 거칠게 올려놓았다. 심드렁한 흑표범 같던 분위기가 변했다. 그녀는 차고 푸른 눈을 카밀에게 고정한 채 또박또박 쏘아붙였다.

“아까 그 여자를 쫓아낸 것? 고작해야 말 몇 마디로 겁을 준 것뿐이잖습니까. 그게 뭐 별거라고, 진정한 우정의 증표씩이나 되죠?”

“지, 지금 뭐라고 하신 거죠?”

“그러는 백작께선 오필리어 양을 위해 뭘 하실 수 있는데요?”

카밀은 저를 위해 나서 주는 친구들을 제지했다. 아마 백작도 제 말을 부정할 수는 없고, 자존심을 세우느라 저리 나오는 것일 테니.

‘오필리어의 진정한 친구는 나야. 고작 몇 년 같이 자랐다고 끼어들게 둘 수는 없지.’

8년 동안이면 열두 살 때부터다. 오필리어의 오동통하고 깜찍한 어린 시절을 저 여자는 매일 보고, 자신은 못 봤다고 생각하니 짜증이 치밀었다.

“그럼 백작님께선 제가 어쨌어야 한다고 보시나요?”

“저 사람.”

벨라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끝에는 폰트 남작이 있었다. 카밀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분수를 모르고 나선 한 명을 압도적으로 짓누르는 광경을 모두에게 보여야 했다. 그 틈에 저 번들거리는 남작 놈은 얄망궂게 빠져나가 버렸다.

“저자도 오필리어를 욕보였는데, 맘 편하게 파티를 즐기고 있군요.”

“알아요. ……하지만 저대로 두진 않을 거예요. 제가 지금 곧 가서…….”

“또 세 치 혀로 좀 몰아가기나 하고 관두려고요?”

“백작, 무슨 말이 그래요?”

카밀은 아무래도 이 촌 사람에게 예의를 좀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입을 다물었다.

벨라루시아 모나한에게서 살기가 뻗어 나왔다. 당장이라도 사람 하나 정돈 파묻어 버릴 만한 눈으로, 폰트 남작 쪽을 곧바로 쏘아보았다.

카밀은 처음으로 벨라가 마음에 들었다.

‘이 사람, 어쩌면 괜찮겠는데?’

파티가 종료되고 귀족들은 하나둘씩 저택을 빠져나갔다. 폰트 남작 역시 와인에 얼큰하게 취해 밖으로 나섰다. 대문 근처에서 마차가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베일리스 저택의 앞마당은 넓고 복잡했다. 폰트 남작은 길을 헤맸다. 왔던 길이 갔던 길 같고 이 건물이 그 건물 같았다.

“에이씨…… 더럽게 복잡하네.”

소박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저택과 달리, 고작 앞마당 따위가 길을 잃을 만큼 넓다는 사실에 자격지심이 들었다.

“과연 베일리스라 이건가? 위세가 대단하군. 그러니까 그깟 새 새끼 하나 체면 살리겠다고 이딴 짓을 하고…….”

후작 영애의 환심을 사려다가 오히려 역풍을 맞을 뻔한 걸 생각하면 아찔했다.

평소라면 그 위세 당당한 베일리스가에서 그런 말을 입 밖에 내진 않았을 것이다. 구시렁거리고 싶어도 가문의 마차에 탄 뒤 문이 닫히기 전까지 기다릴 수 있었다. 하지만 폰트 남작은 취해 있었다.

건물 외벽에 기대선 그에게 그림자가 다가왔다. 얼큰하게 취한 와중에도 굉장한 미인임을 알아본 남작은 웃으며 인사했다.

“아름다우신 레이디! 하하. 당신은 시미크께서 보내 주신 천사가 틀림없군요. 부끄럽지만 길을 잃었는데, 후작저 대문까지 동행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남작은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연회장에서 보았지만 이름은 묻지 못한 레이디였다.

안타깝게도 그는 엔클레이오 때 사냥에 열중하느라 난리가 일어난 의식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따라서 메디프의 통신 기구가 전달한 영상을 보지 못했고, 커다란 둥지에서 마수를 힘껏 욕하는 벨라도 보지 못했다.

그저 처음 보는 얼굴이니 사교계에 갓 데뷔했거나, 지방 출신의 귀족일 것이라 생각했다. 오르지 못할 나무인 베일리스 영애와 달리 어쩌면 말로 꼬여내 호의를 얻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남작은 그녀와 자연스럽게 함께 산책할 빌미를 만들어 낸 스스로를 칭찬했다. 수도 생활에 단련되어 나름대로 겉보기도 그럴싸하고 말투도 세련된 자신이니, 어리고 경험도 부족해 뵈는 영애가 쉽사리 거절하지는 못하리라. 연회장에서도 누구에게 말을 붙이지도 못하고 혼자 우두커니 서 있지 않았나.

그는 벨라의 표정을 제대로 살피지 않았기에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다.

“헛소리하네.”

“아아, 당신은 목소리마저 꾀꼬리처럼…… 뭐라고?”

벨라의 목소리는 낮고 굵은 편이어서 꾀꼬리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다만 폰트 남작이 여성의 목소리에 붙일 줄 아는 수식어의 한계였다.

“네놈의 혀는 헛소리를 하기 위해 만들어진 모양이야. 제대로 된 말을 하는 걸 들어 본 적이 없으니까.”

“뭣이?”

술이 확 깼다. 사교계에서 은근한 멸시는 받아 본 적 있어도, 면전에서 이런 노골적인 모욕은 처음이었다.

“네년, 누구냐! 감히 나에게…….”

“그걸 내가 너에게 알려 줄 리가 없지.”

벨라는 그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섰다. 남작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등에 금세 돌로 지은 건물의 딱딱한 외벽이 맞닿았다. 푸르고 서늘한 눈빛이 그를 꼼짝 못 하게 옭아맸다.

“거, 거기 누구 없느냐!”

폰트는 훨씬 어린 여자에게 겁먹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지 못했다. 고개를 돌려 부르짖었지만 쥐새끼 하나 다가오지 않았다. 주변은 조용했다.

벨라는 강제로 그의 고개를 틀어 자신을 보게 했다. 겁에 질린 눈동자가 볼만했다.

그녀의 본성은 사람도 짐승도 찢어 죽일 맹수였고, 원한이 똘똘 뭉친 마녀였다.

거기다 봉마 의식 때, 아우성치는 마수들과 교감하면서 그동안 벨라가 모르고 있던 어떤 감각이 각성했다. 이제 벨라는 태생부터 자신의 안에 웅크리고 있던 마기며 살기를 꺼내거나 도로 집어넣을 수 있었다.

조금만 꺼내어 펼쳐도 이런 별 볼 일 없는 남자 하나 무릎 꿇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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