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우후후후후….”
베일리스 후작가의 사용인들은 당황스러웠다.
굵직한 황실 행사인 엔클레이오가 사건 사고로 점철된 이후, 후작 영애의 감정은 널을 뛰었다.
“어떡해, 오필리어가 다쳤어. 무지막지한 마수 손에, 얼마나 무섭고 아팠을까…….”
당일 저녁엔 제가 다치기라도 한 양 속상한 얼굴로 발을 동동 구르며 황궁에서 오는 소식을 기다렸다.
“아니, 사실 오필리어였으면서 오필리어는…… 왜 나에게 오필리어인 걸 숨겼을까? 나름 가까웠다고 생각했는데…….”
허탈한 표정으로 앉아 먼 곳을 바라보다가 훌쩍이기도 했고.
“그 여잔 대체 뭐야! 뭔데 나타나서 나와 오필리어 사이에 끼어들어?”
기껏 문병을 다녀오더니만 돌아오자마자 발을 구르며 화를 내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
어김없이 레이디 오필리어를 만나겠다고 황궁에 다녀왔다. 그러곤 방에 틀어박혀 삼십 분째 웃고 있었다.
아가씨가 걱정되어 문간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사용인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가씨 왜 저러셔?’
‘몰라!’
입 모양으로 건네진 질문에 카밀의 하녀 에밀리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가씨가 이성을 잃으신 걸 보니 평소처럼 그 병아리…… 아니, 병아리 아가씨 오필리어 탓이란 것만 짐작할 뿐.
그때 방에서 새어 나오던 웃음소리가 뚝 그쳤다.
“에밀리!”
에밀리는 긴장한 사용인들과 눈짓을 한 차례 교환하곤 방으로 들어갔다.
“네, 아가씨.”
“파티를 열어야겠으니 준비해. 빠른 시일 내로.”
“좋은 생각이에요, 아가씨! 아가씨께서 여시는 파티는 모두가 오고 싶어 할 거예요.”
“내 말이 그 말이야.”
“예?”
아마 빛 머리카락을 가진 아름다운 아가씨가 오만한 웃음을 지었다.
“가서 곳곳에 소문을 퍼뜨리렴. 카밀이 아주 중요한 파티를 개최할 거라고. 수도에 발붙인 귀족이라면 못 들은 사람이 없어야 해.”
저택에 돌아오는 내내 카밀의 머릿속엔 오필리어뿐이었다.
정체를 숨겼다거나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아졌다. 이제부턴 그 아이와 진정한 친구가 되었으니.
‘후훗.’
함께 동물을 조사하러 떠나고,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을 생각을 하니 행복해졌다. 그리고…….
‘아무라도 오필리어를 건드렸다간 고개를 들고 수도 땅을 못 밟게 만들어 버려야지.’
그건 카밀만이 할 수 있는 임무였다. 황태자는 물론이고, 8년째 주군인지 뭔지 하는 그 모나한 백작도 이렇게 할 수 없었다.
“시엘로.”
시엘로는 에밀리가 떠난 방에 모습을 드러냈다. 역광을 지고 그를 돌아보는 카밀은 예전처럼 표독스럽고 살기 어린 모습이었다.
‘주인님께서 돌아오셨군!’
그는 벅차는 가슴을 안고 무릎을 꿇었다.
“명을 기다리오, 아가씨.”
“귀족들을 조사해. 사석에서 모였을 때를 유심히 보고, 오필리어에 관해 나쁜 말을 하는 것들을 빠짐없이 알아 와. 이번 연회에 초대할 거니까.”
“알겠소.”
옳거니.
역시 암만 순해진 척했어도 아가씨는 용서할 수 없었던 거겠지. 무해한 병아리인 척 아가씨를 속이고 황태자를 가로챈 여자를!
시엘로는 임무를 수행할 생각에 한껏 들떠서 밖으로 나갔다.
헛다리를 제대로 짚긴 했으나 시엘로는 평소대로 일을 완벽히 처리했다.
오필리어를 향한 반감을 퍼뜨리고 다니는 귀족들의 명단이 카밀에게 전달되었다. 그들의 발언은 별도의 문서로 첨부되었고 수위별로 다시 한번 정렬되었다.
시엘로는 문서에서 가장 많은 지분을 자랑하는 이를 짚었다.
“이 로카르나 데 이리스라는 여자야말로 ‘레이디 오필리어’ 반대파의 선봉장이라 할 만합니다.”
“……그래. 그렇군. 꼭 초대해야겠어.”
카밀의 녹안이 이채를 띠었다.
시엘로의 예상과는 달리, 로카르나는 우군으로서가 아닌 사냥감으로서 점 찍혔다.
* * *
파티가 열렸다. 오랜만에 개방된 베일리스 후작 저택으로 젊은 귀족들이 모였다.
“베일리스 영애가 직접 이 파티는 아주 중요하다고 말했다지?”
하지만 중요한 자리치곤 참석한 사람들이 적었다. 귀족들은 티나지 않게 주변을 힐끔거렸다.
“오호라…….”
과연, 다른 이들도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황태자와 레이디 오필리어에 대한 시선이 곱지 못한 쪽이었다.
그렇다면 후작 영애가 원하는 건 뻔했다. 황태자 옆의 그 여자를 치워 버리는 데 필요한 우군들이겠지.
“대세에 맞춰서 귀엽다, 로맨틱하다 떠들지 않길 잘했군.”
모여 있는 수가 적은 만큼, 초대객들은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다. 벌써부터 이름 높은 베일리스 영애의 소수 정예 측근이 된 것만 같았다.
그들 중 하나인 로카르나 데 이리스는 이럴 때 뭘 해야 하는지 특히 잘 알았다.
“참으로 아름다운 파티장이네요. 이런 호사를 누릴 자격은 오로지 진정한 귀족에게만 있는 법이죠.”
목청을 높인 로카르나의 말은 파티장 구석구석까지 잘 퍼졌다. 카밀까지 확실히 저를 보고 있음을 확인한 로카르나는 은은히 미소를 지으며 부채를 살랑거렸다.
“감히 평민이 이런 것을 제 삶인 양 누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날이 갈수록 신분 제한이 사라지곤 있다지만, 여전히 제국의 법도인걸요.”
“맞습니다. 옳아요. 누구더라? 혼우드에서 사용인들과 같은 일을 한 데다 매일 채신머리없이 거리를 나돌아 다녔다는 그 사람…….”
이런 쇼를 할 때엔 누군가 곁에서 맞장구를 쳐 주면 효과가 배가된다. 기꺼이 그 역을 자처한 사람은 폰트 남작이었다.
그는 오필리어가 같은 남작 지위 출신이면서 운이 좋아 황족에 근접하게 되었다며 경멸했다.
즉석에서 동맹을 체결한 로카르나와 남작 사이에 비릿한 눈웃음이 오갔다.
“아아, 역시 평민이라 그런지! 어쩔 수가 없네요. 부디 황실의 위엄까지 그 부리로 쪼아 먹지 않으면 좋을 텐데.”
“세상에나, 이리스 영애. 레오라 양은 평민이 아니랍니다. 먼 변방의 가난한 혈통이긴 해도 호적은 귀족 명부에 올라와 있지요.”
“아차, 이런. 제가 그만 큰 실수를 했군요. 도대체 평민인지 귀족인지 구분이 안 가니 워낙 어려워야죠.”
부끄러운 듯 얼굴을 가렸지만, 로카르나의 입가엔 미소가 가득했다.
그들은 레오라 남작가가 부유한 평민보다도 가난하고, 그런 집에서 자란 오필리어가 어엿한 귀족다운 품위가 없다며 대놓고 비꼬았다.
평소라면 그런 노골적인 비난은 오히려 빈축을 샀다. 하지만 여기는 오필리어를 아니꼽게 여기던 이들이 모인 자리였다.
곧, 여기저기서 풋 웃음이 터져 나왔다.
로카르나는 이쯤에서 고개를 치켜들었다. 파티의 주인인 카밀 쪽을 당당히 건너다보았다.
“로카르나 데 이리스 양이로군요.”
예상대로 그녀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양쪽에는 베일리스 영애의 두 날개나 다름없는 세인 영애와 레코니아 영애가 있었다.
‘됐어. 나도 이제 저기 끼는 거야. 베일리스를 얻었으니 사교계는 나를 위한 무대야.’
로카르나는 미소로 화답했다.
“베일리스 영애를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깟 못생긴 새와는 비교할 수 없는, 사교계의 진정한 백조이시니까요.”
“후훗…….”
로카르나는 그녀의 매력적인 웃음을 긍정적인 신호라고 생각했다. 오필리어를 ‘못생긴 새’라고 칭한 그 순간 카밀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내쳐졌단 것도 모른 채.
그러니 카밀의 붉은 입술에서 나온 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귀족인지 뭔지 당최 구분이 안 가는 쪽은 당신이군요.”
“……예?”
“못생긴 새라느니, 황실의 위엄을 쪼아 먹는다느니. 그게 정녕 이 나라의 국조 아다만티스를 두고 하신 말씀이 맞나요?”
친근하던 목소리는 끝으로 가서는 서리가 뚝뚝 떨어졌다.
저열한 흥분이 피어오르던 장내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음을 끼얹은 듯 가라앉았다.
로카르나의 눈이 흔들렸다.
“국조는 곧 황실의 상징. 이리스 영애께선 지금 황실을 조롱한 것이라 봐도 좋을지요?”
“거기다 황태자 전하는 물론 황실 전체가 레오라 영애를 보호하고 있어요. 엔클레이오로부터 충분히 시일이 흘렀는데 황실의 마스코트 건을 취소하지도 않았죠. 그런 황실의 결정에 정면으로 반박하시는 건가요, 이리스 영애?”
카밀 옆에 두 날개처럼 서 있던 라일라 세인과 에일린 레코니아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예? 아니, 아니요! 제가 어떻게, 그런…….”
분명 호의를 얻을 줄 알았는데. 식은땀을 뻘뻘 흘리던 로카르나는 상황을 파악했다.
이 파티는 베일리스 영애의 우군을 모집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그 반대였다.
누구든 레오라 남작 영애를 적대하는 자, 카밀 드 베일리스의 적이 되리라.
이미 그 메시지를 읽은 이들은 우왕좌왕했다.
그럼 베일리스 영애는 이미 오필리어 레오라의 친구가 되었고, 황태자를 포기했단 말인가? 왜?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상황은 분명했다.
“하하……. 저는 예전부터 지나친 귀족 의식으로 스스로를 평민과 구분 짓는 일은 삼가야 한다고 보는 쪽이었습니다.”
폰트 남작은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꾸며 슬그머니 빠져나갔다. 로카르나는 그를 노려보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본전도 못 건지고 쪽박이었다. 기회를 잡으려 나서다 오히려 본보기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중요한 건 자존심이 아니라 실리였다.
“저어, 방금 제 말뜻은…….”
이리스 가문은 베일리스에게 자존심을 세울 처지가 안 되니, 서둘러 실수를 인정하고 카밀과 척지는 상황을 막아야 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또각거리며 걸어온 카밀이 로카르나의 지척에 섰다.
로카르나는 당당하게 키가 큰 그녀를 올려다보며 바들바들 떨었다.
“로카르나 양, 레오라 남작가는 150년도 더 전에, 테오도시어스 황제께 작위를 인정받고 지금까지 가주의 충성 맹세를 이어 오고 있습니다. 설마 하니…….”
“아, 아뇨. 저는 절대로…….”
“설마 하니, 윗대 황제 폐하의 선택도 잘못되었고, 이후로 십여 대 동안의 선황들과, 심지어는 지금의 지존까지도 귀족조차 아닌 자의 충성 맹세를 받아 오며 헛된 위신을 세우셨다는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