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뭐지?
당황하고 있으니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장난이었구나. 뭐야, 이 인간!
“계약으로 널 묶어 놓을 수 있는 거라면, 연장하도록 할까?”
“……언제까지요?”
“충분히 오랫동안. 아무래도 내 연인께서는 새장이 없으면 홀랑 날아갈 심산인 것 같으니 말이야.”
일단 계약이 끝난 이후에도 만남을 이어 갈 생각은 있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평생 곁에 있어 달라거나 하는 말은 아니었다.
물론 그런 중요한 말을 이렇게 날로 먹듯이 들어 먹을 생각은 없다.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어!
“그건, 아무래도 저는 아직…….”
“오필리어.”
초봄 갓 피어난 제비꽃 같은 그의 눈을 올려다보고 있으니,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가 조곤조곤 내려앉았다.
“너는 그저 내 옆에 있어 주면 돼. 다른 건 미리 염려하지 않아도 괜찮다.”
어라. 클레멘츠는 내가 무슨 걱정을 했는지 아는 눈치다.
“정말요?”
“그래. 마음 편하게 가져.”
나도 당장은 아무 걱정 없이, 결혼이니 입장이니 하는 복잡한 문제에서 벗어나 있고 싶었다. 겨울에는 같이 별궁으로 놀러 가고 싶기도 하고.
“하지만 클레멘츠 같은 위치의 남자랑 연애하면서 저만 뒷일 생각 안 하면 안 될 것 같은데요…….”
그의 손이 내 턱에 와 닿았다. 깃털을 매만지듯 가벼운 손길이었다.
“입 맞춰도 되나?”
입술이 가까워지고, 낮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콩닥거리는 심장의 울림이 온몸으로 퍼져 갔다. 나는 하마터면 몽롱하게 감을 뻔한 눈을 치떴다.
“안 돼요! 생각해 보니까 전하는 할 말이 없어지면 키스하는 경향이 있으시더라고요!”
“…….”
“아주 못된 버릇이에요. 그런 건 어디서 배웠어요?”
“학습이 빠르구나.”
클레멘츠는 한숨을 쉬더니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영 못마땅하다는 시선은 집요하게 나를 향해 있었다.
“저, 잠깐 얘기 좀 해요. 중요한 얘기예요.”
클레멘츠가 내어 준 팔을 붙잡고 걸으니 어느새 내 방 앞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마도 공사가 다망하실 황태자 전하를 방 안으로 끌어다가 앉혔다. 시간을 뺏을 생각이니 내친김에 부엌에 들어가 차도 우려 왔다.
“차에는 설탕만 넣으시죠?”
집무실에서 보내는 시간을 죽 지켜봤으니 그의 차나 간식 취향까지도 훤했다. 설탕 그릇을 클레멘츠 앞에 놓아 주고 내 잔에는 우유를 부었다.
물론 우유보다 먼저 홍차를 부어 두었다. 우유를 차보다 나중에 부으면 붉은 찻물 안에 흰 우유가 구름처럼 퍼지는 모양을 볼 수 있다. 그게 예쁘기 때문에 항상 우유를 차보다 나중에 부어야 한다.
“친애하는 우리 전하.”
“……뭐지?”
바쁠 텐데도 클레멘츠는 순순히 내게 붙잡혀 주었다. 찻잔 손잡이를 쥔 그의 손가락 하나마저도 우아했다.
“지금 세간에는 우리보다도 더 우리 결혼에 관심 가지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아요. 아닌가요?”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그래서 제가 생각을 좀 해 봤어요. 결혼에 앞서, 어느 정도 자립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요.”
사실 그리 오래 생각하진 않았다.
카밀과 이야기하면서 이 점을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단 걸 느꼈고, 같이 걸어오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자립?”
“네. 솔직히 제가 지금 병아리로 변하는 능력 말고 쥐뿔도 없는 건 사실이잖아요. 아니, 이게 능력인가? 당신이 떠안긴 저주죠.”
“……미안하구나.”
어쩐지 괴로워하는 클레멘츠를 두고 의견을 개진했다.
“전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클랏샤에 머물면서, 제 나름대로 자립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봤어요.”
원래 나는 고향으로 돌아가 레오라가를 이을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사업 수완도 경제관념도 영 별로인 남작님, 즉 우리 아버지가 내게 전수해 줄 수 있는 일거리는 별로 없었다. 혼우드 시절 나의 최고 스펙도 백작가 시녀에 그쳤다.
그땐 그게 내 분수에 맞는 삶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곳 수도에 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분명 배울 수 있는 일도, 해 볼 수 있는 일들도 더 많이 있었다. 특히 클레멘츠의 곁에 서려면 내겐 뭔가가 더 필요했다.
예를 들어 저번 연맹일보사 인터뷰를 하며 느낀 건데, 나에겐 실제로 비서관의 자질이 있었다.
수험 서적을 살펴보니 난이도는 만만치 않았지만, 나의 뿌리는 입시를 경험한 한국인. 수험 생활의 기본기는 되어 있으니 도전해 볼 만했다.
내가 자립할 수 있어야만 외부의 압력으로부터 보다 자유로울 것이고, 일을 통해 스스로를 다잡고 일상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누군가와 더 건강하게 맺어질 수 있겠지. 스스로를 책임지고 나아가 서로를 보호할 수 있는 성인 대 성인의 만남. 음, 바람직하여라!
생각을 마친 나는 비장하게 결론부터 던졌다.
“저 공부해서 황궁 비서관 시험 보려고요.”
“큽……!”
“저, 전하! 괜찮으세요?”
다행히 평생 갈고닦아 온 예의범절이 힘을 발휘해, 클레멘츠는 간신히 찻물을 뿜지 않을 수 있었다. 쪼르르 달려가 등을 두드려 주자 숨을 고른 그가 물었다.
“대체 왜 그런 걸 하겠다는 거냐?”
“그야 필요하니까 그렇죠?”
나는 생각해 온 것들을 설명했다.
“황궁 비서실 업무 방식은 수도 사무직의 정석이라, 자격증이 있으면 다른 기관이나 기업에서도 우대한다고 들었어요.”
그뿐인가. 제국의 정치, 경제, 사회를 아우르기 때문에 가문 경영에도 도움이 되니 귀족들 가운데서도 응시하는 자가 많았다.
호오옥여나 내가 나중에 황태자비가 된다고 해도 크게 도움이 될 지식을 쌓을 수 있을 테지만…… 이것까지 말하긴 낯 뜨겁군.
아무튼 나는 스스로 능력을 길러 자립하고 싶다는 기특한 뜻을 충분히 전달했다.
“어때요?”
티 테이블 위로 상체를 기울이고 크게 뜬 눈을 깜빡였다. 잠시 내 눈을 피하던 클레멘츠는 못 이기겠다는 듯 폭 한숨을 내쉬었다.
“건전하고 훌륭한 생각이구나.”
“저니까요!”
“맹랑하고.”
“…….”
그는 야멸차게 노려보는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게 네가 원하는 거라면…….”
긴 침묵이 말을 잘라먹었다.
“……해야지.”
이윽고 그가 입술을 열어 말을 맺었다.
내게 동의한다기보단, 스스로를 납득시키는 듯한 말투였다. 어쨌든 합의는 되었다.
결혼은 내가 자립한 뒤로. 그럼 클레멘츠에게도 입장을 정리할 시간을 벌어 줄 수 있을 것이다.
너무 긴 시간을 잡아먹는 게 아닌가 싶지만, 원래 결혼은 신중히 결정해야 하는 법이니까.
그동안 이 사람의 마음이 변할까? 그러면…… 그때야말로 저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을 다 뽑아 놓고 사라져야지. 아무리 미남이라도 대머리라면 다른 여자들이 눈독 들이지 못할 테니까.
이토록이나 내 계획은 치밀하고 완벽했다.
* * *
복도를 걷던 클레멘츠는 오필리어의 방 쪽을 돌아보았다.
‘자립하겠다고.’
오필리어의 생각은 언제나 허를 찌르는 데가 있었다.
‘하, 결혼하기 전에?’
마음 같아선 당장 그녀에게 황태자비라는 직함을 붙여 버리고 싶었다.
가장 크게 들 수 있는 핑계는 그 지위 자체가 어느 선 이상으로 오필리어를 보호하리란 점. 내밀한 본심은, 그녀가 제 것이라고 온 세상과 오필리어 스스로에게 각인시키고 싶은 욕심이었다.
하지만 황비가 어떻게 움직이고, 상황이 어떻게 요동칠지 모르는 지금으로썬 냅다 청혼할 수도 없었다. 만일 클레멘츠가 패배하게 된다면, 그와 결혼한 상태가 오필리어에겐 더 해로울 수 있었다.
그러니 자립하겠다는 그녀의 결심은 씁쓸하지만 시기적절했다.
그녀는 기지와 과단성이 있었고, 제가 발 뻗을 자리와 파고들 시점을 잘 찾아냈다. 거기다 말재주도 좋으니, 상당히 유능한 사무관이 될 수 있을 터였다.
새로운 모습으로 황궁을 누비는 그녀는 분명 빛이 날 것이다. 궁에 모여든 별 어중이떠중이들이 그 빛에 이끌릴 만큼.
엷은 미소를 띠며 오필리어의 미래를 그려 보던 클레멘츠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역시 안 돼.’
실수했다.
진작 제게 더 의지하게 만들었어야 했다.
네 손으로 굳이 힘겹게 이뤄 내야 하는 일은 없다고. 굳이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지 않아도 된다고. 입 맞추고 어루만지며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게 만들어서라도 그렇게 믿게 만들었어야 했다.
그가 속삭이는 것들을 듣고, 그가 주는 것들로 배를 채우고, 그가 주는 것들을 몸에 걸치고.
그녀가 좋아하는, 달고 부드럽고 밝은 모든 것을 깔아 놓은 새장 속에 살게 해야 했다. 안온함에 취해 거기에 만족하도록. 오로지 그를 향해 작은 포옹과 사랑스러운 웃음을 전할 수 있도록.
그랬으면, 그 역시 더없이 어둡고 진득한 만족감 속에 침잠할 수 있었다. 아무런 거슬릴 것도 없는.
하지만 세상의 그 어느 새장도 아다만티스를 가두지 못한다. 클레멘츠 역시 가두지 못했다. 제 힘으로 움직이고 이리저리 날개를 뻗어 보는 오필리어에게, 그녀의 빛에 누구보다도 눈이 멀어 버렸기에.
그래서 클레멘츠가 할 수 있는 조치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준비 기간은 부족하지만, 내년 봄에 치러지는 시험도 경험 삼아 응시해 보려고요. 스터디 그룹원을 모집해 볼까…….”
클레멘츠는 황궁 비서관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는 귀족 영식들의 면면을 재빨리 떠올렸다.
하나같이 방탕하고 못 미더운 얼굴들이었다.
이왕 오필리어가 시험을 본다면, 빨리 합격해 그의 품으로 돌아오도록 만들어야 했다. 방해만 될 뿐더러 오필리어에게 눈독 들일 위험이 있는 잡초들은 일찍부터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건실한 영애들을 미리 소개해 두어야겠군. 시간을 내어 내가 직접 공부를 봐준다고 하는 것도 좋겠어.’
저 의욕에 갑자기 웬 놈팡이를 선생이랍시고 들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과목은 수업을 짧게 끝낼 수 있지만 자주 점검해야 하는 제국사가 좋을지, 자주 공부하진 않지만 한 번에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논술이 좋을지.
클레멘츠는 진지하게 고민하며 복도를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