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마브로스 아르팍티카가 날아든 것까지 황비의 계획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메디프와 황제 폐하마저 위험해질 계획을 짜진 않았을 테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은 철저히 황비가 원하는 대로 굴러가고 있었다.
황비는 결코 성급하지 않았다. 페리윙클 가문의 촉새들이 아무리 부추겨 대도 정치와는 거리가 먼 척, 야망 따윈 없는 척 꿈쩍도 않던 그녀였다. 그런 사람이 움직인 지금이야말로 긴장해야 할 시기였다.
클레멘츠 역시 신중했다. 몸을 낮춘 황비의 흉계를 이미 몇 번이나 막아 냈다. 그중 한 번은 오필리어와 함께였다.
그때는 비록 오필리어로 인해 일이 한바탕 꼬였지만, 결국은 모든 것이 그의 예상보다도 바람직한 제자리로 돌아갔었다.
클레멘츠는 창문가에서 밖을 내려다보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카밀 드 베일리스를 배웅하며 해맑게 손을 흔드는 오필리어가 보였다.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아까워 감정이 요동쳤다.
“혹여나 일이 꼬인다면, 절대로 오필리어를 위험하게 만드는 일은 없어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카시스는 엄숙하게 대답했다.
창가에 서서 미소 짓는 주군은 꽤 온화한 피가 흐르는 사람으로 보였다. 지금까지 보였던, 아름답지만 차가운 정물 같은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이 극적인 변화가 어느 병아리 아가씨 덕분이란 점은 말할 것도 없었다.
“전하, 외람되옵니다만…… 저는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습니다.”
“뭐가 말이지?”
“언제 마음을 인정하시나 했습니다. 진작부터 오필리어 님을 아끼시지 않았습니까.”
어릴 적부터 클레멘츠를 지켜봐 온 카시스는 알았다. 서부에서 돌아올 무렵부터 그의 주인은 달라져 있었다.
“저는 오필리어 님께서 전하의 곁에 있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가?”
“예.”
동부 귀족의 대표 가문인 듀프레가 당주로서, 카시스는 어릴 때부터 황태자의 보좌역으로 내정되어 있었다.
열두 살의 나이에 주군과 처음으로 마주쳤을 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또래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어른스럽고 의젓한 황태자.
진정한 황족이란, 지배자란 이런 모습이구나. 어린 마음이 뿌듯하게 벅차올랐다.
기쁘게 따르고 섬기겠다고 다짐했다. 그간 교육을 잘 받은 자신이 그를 보필할 적임자라는 자부심도 생겨났다.
하지만 어린 카시스는 얼마 뒤 알게 되었다. 그보다 세 살 어린 클레멘츠는 단지 아이답기를 허락받지 못했을 뿐임을.
모난 부분은 깎아 내고 다듬는 조각상처럼 그저, 황제를 비롯한 모두가 기대하는 대로 만들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사실을 깨달은 뒤로는 깊은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조금쯤은 사람답게 살아 보면 좋으련만. 행복해지면 좋으련만.
그리고 지금, 마침내 주군은 행복해지려 하고 있었다. 인간으로서. 사내로서.
만년설로 만든 얼음 궁전에 따스한 보금자리가 생겨났다. 황금빛이고, 새콤달콤한 레몬 냄새가 나고, 밝은 목소리가 들리는 곳이었다.
당연히 오필리어 레오라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하는 사람이었다.
카시스는 붉은 눈을 서글서글하게 휘며 웃었다.
“저 카시스 듀프레는 주군께서 행복해지시기를 바랍니다.”
“……고맙군.”
클레멘츠는 어쩐지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카시스가 진작 알아챘다고 할 정도면, 자신은 꽤 예전부터 그 아이를 아끼고 있었던가.
누군가를 애지중지한다는 건 약점이기에, 인정하는 게 더뎠다. 인정한 뒤에는 필사적으로 숨겼다.
모든 게 정면으로 드러난 지금은 차라리 자신의 연심과 비호가 오필리어를 지키길 바랐다.
그걸로 충분치 않다면, 손해를 감수하는 한이 있어도 그녀 한 사람만큼은 지켜 내고자 했다.
‘설령, 모든 걸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한 사람을 위해 모든 걸 버리겠다니.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가 앉은 자리는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가 모든 것을 버리면, 함께 달려온 이들도 모든 것을 잃는다.
그런 와중에 ‘당신이 행복해지시길 바랍니다.’ 같은 소리를 듣다니.
“글로리나 남작 부인 로메오 역시 저와 같은 생각이겠지요. 그리고, 또 다른 이들도…….”
“그 말을 들은 것으로 이미 충분하다.”
낯선 감정이 들었다. 조금은 부끄럽고, 당황스러운 온기가 느껴지는 감정이었다. 세간에서는 그걸 감동이라고 불렀다.
“원하기만 하시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실 수 있잖아요. 멋진 일이라고 생각해요.”
오필리어의 말을 듣고, 그저 의무라고 생각했던 정무들에서 기쁨을 느꼈을 때와 비슷했다. 세간에선 보람이라고 부르는 종류의 감정이었다.
이토록 그녀가 없을 때조차 그녀가 가져다주는 것들에 휩싸이는데, 오필리어가 없는 삶을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클레멘츠는 책상에 놓여 있던 문서 중 하나를 집어 올렸다. 어떤 구조물의 완성된 모습이 그려진 설계도였다. 척 봐도 공을 들인 작품은 아름다웠다.
그의 입가에 또다시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그날은, 오필리어 님을 대동하실 겁니까?”
“물론 같이 가야지.”
모든 빛나는 날에, 모든 아름답고 좋은 날에. 장애물이나 내리막길이란 없고 안온함과 순탄함만이 펼쳐질 듯한 모든 자리에 그녀를 데려다 놓고 싶었다.
거기서 오필리어가 웃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태어난 이유라고, 클레멘츠는 생각했다.
* * *
카밀은 클레멘츠의 곁에 있을 내가 겪을 문제들을 미리 걱정해 주고 있었다.
클레멘츠의 평판을 걱정하느라 정작 내 일을 생각하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들은 자기가 갖고 싶은 것에 조금이라도 다가가려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파괴하는 것으로 추한 욕심을 달래려고 하지.”
“자기가 갖고 싶은 것이라…….”
내가 의지와 무관하게 유명해져 버리긴 했지만, 다들 이런 말 많고 탈 많은 유명세를 원하던가?
약간 납득이 안 된다고 생각하던 나는 우뚝 멈춰 섰다.
“자, 잠깐…….”
세간에서 내 위치는 황태자의 연인이었다. 그리고 연인이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 결혼으로까지 이어지는 게 상식이었다.
“겨, 결…….”
클레멘츠가 좋다. 줄곧 같이 있고 싶다. 빙의한 뒤로 머릿속에 그려 왔던 미래도 그런 모습이었다. 참하고 순종적인 남편을 만나 토끼 같은 아이들을 낳고 오손도손 잘 살기.
클레멘츠가 별로 참하거나 순종적이진 않지만 그보다 더한 문제가 있었다.
그의 부인이면 황태자비였다.
이거였다. 카밀이 그토록 날 걱정한 이유. 다른 사람들이 날 물어뜯을 거라고 믿고 경계하던 이유.
황가의 일원이 되는 건 더없는 영예이니 누군가는 질투할 터. 나에겐 가진 걸 능히 지킬 만한 출신이나 뒷배가 없으니 누군가는 빼앗으려 할 것이다.
아니, 그 전에 나 같은 소시민이 무슨 비……?
보통 황태자비나 황후씩이나 되는 지위는 황제와 서로 주고받을 게 있는 대귀족 가문이 꿰찼다. 소위 3대 가문이라 불리는 페리윙클, 듀프레, 베일리스처럼. 예전엔 페리윙클의 자리에 샹그리아가 있기도 했지만, 아무튼!
물론 제국의 긴 역사를 돌이켜 보면 한미한 가문의, 심지어는 평민 출신의 황후도 간혹 있어 왔다.
그리고 그들은 방패막이를 해 줄 뒷배가 없어 대내외적으로 크고 작은 돌멩이를 맞아 가며 살았지…….
황궁에서 눈을 뜨고 금은보화를 끼고 살며, 일거수일투족이 정치와 연관되는 삶은 내가 꿈꾸던 모습이 아니었다. 그럴 생각조차 해 보지 않았다. 잠깐 머물고 가긴 참 좋은 곳이라고 생각했던 황궁이 갑자기 너무 낯설었다.
거의 머리를 쥐어뜯기 직전인 내 손을 누군가 잡아 왔다. 아름답고 다정한 눈동자에 걱정이 가득했다.
“오필리어, 무슨 일 있느냐?”
클레멘츠였다. 나는 마침 떠오른 의문을 입에 담아야 했다. 이런 건 확실히 하고 넘어가야 하니까.
‘나랑 결혼할 거예요?’
“나랑…….”
“너와?”
“겨, 겨…….”
으악. 못 하겠어.
어째서인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직 결혼 같은 건 먼 일로 느껴져서일까? 아니면, 클레멘츠가 이렇게 답할까 봐 두려워서인가?
‘결혼? 왜 내가 너와 그런 것을……. 혼인은 대가문의 여식과 해야 한다. 미안하지만 이대로 연인의 위치에만 머물러 줬으면 좋겠군.’
젠장. 너무 현실적이라서 내가 상상해 놓고 빈정 상했어.
“겨?”
“겨울엔 어디 같이 가서 놀면 안 될까요…….”
클레멘츠는 흔흔히 웃었다. 웃는 얼굴이 매우 근사하면서도 다정해서, 방금 떠올린 재수 없는 답안이 그의 입에서 나올 일 따윈 영원히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지. 마침 수도를 나서 동쪽으로 가면 별궁이 있는데…….”
하지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 아냐. 아냐! 클레멘츠는 그럴 리 없다. 비록 다소 오만하고, 은밀히 돌아 있고, 변태고, 대체로 재수 없지만 정말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목숨까지도 줄 만큼 진심이니까.
“……도 즐길 수 있다. 네가 좋아할 것 같군.”
망할. 생각에 잠겨 있느라 클레멘츠의 말을 놓쳐 버렸다.
그냥 눈 딱 감고 말해 버리자. 후련하게.
“전하!”
“……!”
하지만 기세와 달리 난 여전히 소심했다. 결국 살짝 돌려서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저는 계약에 따라 여기 있는 거지요. 그럼 계약이 끝나면 어떡하나요? 집으로 가나요?”
“……그런 식으로 날 갖고 놀고, 버리려고 했나?”
“……예?”
흠칫 놀라 올려다본 그의 눈에선 묘한 열기가 느껴졌다.
“몸도 마음도 바쳤더니, 짐 챙겨서 도망가려고 했느냔 말이다.”
“예?”
예?
“무, 무슨 소리, 아니 말씀이세요! 전하께서 언제 몸을……!”
남들이 들으면 엄청나게 오해할 말이었다.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신기하게도 어느샌가 모든 사람들이 반경 50미터 밖으로 떨어져서 애써 이쪽을 외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