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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130)화 (130/218)

130화

황태자궁의 깊은 곳, 백금의 정원에서 은밀한 개싸움이 끝난 뒤.

카밀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며 정식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날 통신 기구가 쏜 영상을 보며 알아 버렸죠. 오필리어 양이…… 바로 내 오필리어였다는 거.”

“아…….”

카밀은 병아리인 나를 참 좋아했다. 납치 소동까지 벌였으니 말 다 했지. 그리고 인간 상태인 내게 역시 호의를 베풀었다.

그런데 둘이 같은 존재라는 걸 그런 식으로 알아 버렸다. 나야 비밀을 지켜야 했지만, 카밀 입장에선 충분히 상처받을 만했다.

“사실은 그 전부터 알았지만…….”

그녀가 중얼거렸다.

“네?”

“……아니야, 아무 것도.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내게 조금의 티는 내 주지 그랬니, 나의 오필리어.”

나는 충분히 평범한 병아리에서 벗어난 행동을 많이 했다고 생각하지만…….

처연하게 웃는 그녀를 보니 그저 양심이 세게 아파 왔다.

“미, 미안해요.”

“어, 아냐, 아니에요. 오필리어에게도 사정이 있었겠죠. 얼마나 고민이 깊었겠어요.”

“……!”

알아주는구나. 인간도 동물도 되지 못한 상태에서 휘둘리던 나의 고뇌를 도리어 카밀이 알아주다니. 자기도 서운했을 텐데.

감격해서 손을 맞잡으니, 카밀이 나머지 한쪽 손도 올려 붙잡았다. ……뭐지? 왠지 병아리 대 인간으로 마주했을 때와 느낌이 비슷하다.

“따지자면 무도회에서 만나기 전부터 우린 아는 사이였으니까.”

“……!”

“원래대로 말 놓을게. 그래도 되겠니, 오필리어?”

“응!”

이렇게 원작 여주에 이어 악녀와도 친구가 되어 버리는 건가? 이래도 괜찮은가?

뭐, 안 괜찮을 이유가 어디 있겠어. 이미 그렇게 되었는걸.

“그럼, 오필리어. 너 괜찮은 거야?”

카밀은 관계가 정립되고도 여전히 뭔가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응? 뭐가?”

“황태자 그노…… 아니, 전하 말이야. 연인이 되었다면서.”

“아.”

그러고 보면 카밀은 클레멘츠를 좋아했었다. 지금은 마음을 접긴 했지만. 그래도 그가 누군가와 좋은 사이가 되었다면 충분히 신경이 쓰일 수도, 기분이 별로 안 좋을 수도 있다.

“뭔가 협박받았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

“어? 아니야.”

“마음을 받아 주지 않으면 가문을 풍비박산 내겠다거나, 새장에 가두고 물과 모이만 주겠다거나……!”

카밀 머릿속에선 도대체 클레멘츠가 얼마나 악당인 거지?

“솔직히 얘기해. 내가 구해 줄 수 있어.”

“아니, 그러지 않으셨어! 아무 협박도 받지 않았어. 정말이야.”

“……정말?”

“응.”

‘하지만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라고 눈빛으로 말하고 있군. 한 인간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이 느껴졌다.

낯 뜨겁지만 조금은 말해 둬야겠다.

“저기, 내가 먼저 고백했어.”

“……?!”

그 말을 들은 카밀은 더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세뇌당했나?”

“아니야…….”

어디가 어떻게 좋은 건지 말이라도 해야 납득할 건가? 하지만 저쪽 세상에서부터 좋아했다고, 곱게 돌아 버린 모습에서부터 살짝 끌리고 있었다고 어떻게 말해. 낯 뜨겁게.

“그래. 너도 좋다면…….”

다행히도 혼자서 뭔가 납득한 카밀이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카밀이야말로, 괜찮은 거야?”

“내가 안 괜찮을 일이 뭐가 있지?”

“너도 예전엔 황태자 전하를 좋…… 아니, 알았어. 미안해.”

말을 꺼내자마자 표정이 하도 썩어서 헐레벌떡 취소해야 했다. 정말로 나의 기우였구나.

“모나한 백작의 말이 옳아. 네 귀여운 눈에서 눈물이 나는 그 순간부터 황태자 전하께선 자격이 없는 거야.”

“에이, 걱정하지 마. 내가 울 일이 뭐가 있겠어? 지금도 이렇게 행복한데.”

“지금이야 한창 좋을 때니까. ……됐어. 혹시라도 그 인간이 못 미더운 짓을 하진 않는지 철저히 감시할 테니까.”

이젠 양파라도 함부로 깠다간 그대로 헤어지는 수도 있겠구나.

“그, 음. 저……!”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라고 했다간, 열정이 폭발하고 있는 저 분위기에 역풍을 맞아 버릴 것 같았다. 나는 양손으로 꼭 쥐었던 주먹을 내리며 항복했다.

“고마워…….”

“으응. 내게 맡겨. 나만 믿어.”

미안해요, 클레멘츠.

자꾸만 급발진하는 카밀을 진정시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사교계를 주름잡은 카밀의 면모는 양날의 검이었다.

그녀는 우아한 말솜씨로 공론을 만들고, 감각적인 취향으로 유행을 만들었다.

그런 한편 자신의 위세와 인기를 이용해 죄 없는 이들을 짓누르고는 했다.

하지만 나를 만나고 나서 카밀은 변했다. 악랄했던 과거를 반성한다고, 병아리인 내게 털어놓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 결심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예전에 내가 쓸데없는 짓들에 열을 올렸던 거, 너도 기억하지.”

아무리 과거라도 떠올리기만 하면 몸서리가 쳐지는 모양이었다. 치를 떠는 모습에 웃으며 말했다.

“과거의 일인걸 뭐.”

“크흠. ……아무튼. 그런 짓을 안 해서 남아도는 시간과 기력으로 뭘 할지 곰곰이 생각해 봤거든.”

“오, 정말?”

카밀은 부끄러운 듯 말하기를 망설였다. 나는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기대했다.

카밀이라면 그녀의 이름을 건 브랜드 사업을 해도 괜찮을 것이다.

어쩌면 새로운 취미를 배워 볼 수도 있겠다. 그게 베이킹은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그런데 정작 그녀가 꺼내 놓은 말은 이러했다.

“나는 너처럼 귀여운 동물이 좋아, 오필리어.”

“응?”

예상을 아득히 벗어났다.

“그, 그래서?”

“세상엔 또 어떤 귀여운 아이들이 있는지, 천천히 충분히 알아내고 싶어.”

“……!”

“…우선은, 조류 쪽부터.”

그러면…… 소동물 애호가 겸 연구가가 되겠다는 뜻인가? 대충 비슷한 소리로 들렸다.

생각보다 본격적인 취미였다. 그리고 심지어 공부하는 취미 아닌가. 역시 카밀은 남달랐다.

“멋있다!”

“…! 정말?”

카밀은 수줍게 웃다가 덧붙였다.

“다른 지역이나 외국에만 사는 동물도 보러 갈 생각이야.”

“오오…….”

말하자면 현지답사도 계획에 있는 모양이었다. 실로 귀족적이면서도 건전한 취미 활동 계획이 아닐 수 없었다.

“혹시 괜찮으면 같이 갈래?”

“뭐? 엄청 좋지! 꼭 데려가 줘.”

생각해 보면 해외여행은커녕 혼우드를 벗어나기도 까마득했는데. 공부하는 카밀을 따라다니며 사리사욕-지역 맛집 기행-을 채울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신났다.

내가 긍정하자, 카밀은 신이 나서 생각해 둔 답사 장소들을 늘어놓았다. 나는 은근슬쩍 그 주변에서 유명하다고 들은 요리를 먹어 보자고 했다. 그러자 카밀은 함께 느긋하게 맛볼 수 있는 경로를 마련해야겠다며 진지하게 응수했다.

참으로 보람되면서 즐거운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오필리어, 너 같은 친구가 생겨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대화를 마무리하고 일어난 카밀이 말했다.

기쁨이 넘치던 우아한 얼굴엔 금세 그늘이 드리웠다.

“하지만…….”

어깨에 부드러운 손이 살포시 얹어졌다.

“이런 너이기에 위험해.”

“헉, 내가 그 정도야?”

친구 삼기 두려울 정도로 위험한 매력. 마성의 병아리. 그렇지. 그게 바로 나였다. 이젠 나도 알았다.

“……아니, 사람들이 너를 위험하게 할 거야.”

“…….”

그쪽이었구나.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들은 자기가 갖고 싶은 것에 조금이라도 다가가려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파괴하는 것으로 추한 욕심을 달래려고 하지. 그런다고 원하는 걸 얻을 수도 없는데 말이야. 나는 그들의 세계를 잘 알아. 나 역시 그런 사람들의 일부였으니까.”

수심에 잠긴 눈은 다시금 부끄러웠던 과거를 되짚는 듯했다.

“내가 황태자비 후보를 자처할 때도, 어떻게든 깎아내리고 무너뜨리려 힘쓰는 이들이 있었어. 너에겐 더할 거야.”

……그런가?

그저 서로 마음을 확인했다는 기쁨을 만끽하느라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이 옳았다. 카밀과 달리 난 똑 부러진 성격도 아니었고, 나를 지켜 줄 만큼 힘 있는 가문 출신도 아니니까.

카밀은 내 뺨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잘 다듬어진 손톱이 살짝 피부에 닿았다.

“만약 널 무시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녀의 입가에 순간 잔인한 미소가 걸렸다. 개과천선한 이후로 볼 일 없을 거라고 생각한 표정이라 흠칫했지만, 카밀은 깨닫지 못한 것 같았다.

“……그게 나의 일이겠지.”

혼잣말까지 중얼거렸다. 무슨 뜻인지 왠지 짐작이 갔다. 이거…… 그거 아닌가? 뒤에서 슥-삭 하겠다는 거.

“카, 카밀.”

또 카밀이 뭔가 잔인한 짓을 일삼는 건 싫었다. 그것도 본인은 다 그만뒀는데 날 위한다고 그러는 건 더더욱.

“응? 오필리어.”

급히 따라가며 그녀를 불렀는데, 돌아보는 표정이 구김살 하나 없이 맑았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잘못 본 건가? 음, 역시 내 생각이 지나쳤던 거겠지.

“아니, 궁 바깥까지 바래다주겠다고.”

“역시 나의 친절한 오필리어구나.”

내게 내미는 그녀의 손을 쪼르르 걸어가 잡았다.

* * *

오필리어가 걱정하는 대로, 상황은 마냥 낙관적이지 않았다.

국조(國鳥)의 새끼로 변하는 남작 영애. 그녀를 구하기 위해 악마를 소환한 황태자.

요행히도 당장은 그들에 대한 우호 여론이 득세했다. 하지만 여론은 들끓는 솥과도 같았다. 결국 어느 쪽으로 귀결 지어질지는 미지수였다.

그리고 황비 클라우디아가 이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황비가 곧 움직이겠군요.”

“이미 움직였는지도 모르지.”

“2황자 전하의 통신구 말씀이십니까?”

“그래.”

카시스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2황자께서…… 통신구를 통해 이 모든 상황을 유도하셨다고 보십니까?”

“그렇다.”

확언할 순 없으나 그 통신구 하나가 촉발시킨 상황을 생각해 보면, 다분히 고의적이라고 보는 게 타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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