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가을이니까 야외 연회를 준비하는 건 어떨까? 그리고 자연스럽게 활쏘기 시합을 하는 거야.”
벨라가 활을 들면 끝내주게 멋있기 때문에 분명 보는 눈이 달라질 거다.
우리는 인상적인 연회를 여는 방법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했다.
여러 방법을 따져 봤지만 뭔가 부족했다. 무엇이 부족한가?
다름 아닌 뒷배다! 아무리 개인의 매력과 능력이 우수하다 한들, 기본적으로 이쪽 세계는 인맥이 최고 아니던가.
벨라에게 무슨 인맥이 있지? 아무리 생각해도 숲속의 마수들밖에 없다. 물론 마음에 안 드는 놈을 밤길에 덮치기엔 그걸로 충분하지만…….
확, 내 친구는 황태자의 어마어마한 호의를 받고 있다고 해 버려! 그리고 걔는 내 시녀라고까지 해 버려, 벨라!
……라고 하자니, 그 어마어마한 호의의 근거가 무엇인지부터 밝힐 문제 아닌가 싶었다. 그래, 이건 중요하니까 꼭 말해야겠지.
“저기, 벨라. 갑작스럽지만 사실 나…….”
“……?”
“황태자 전하와…… 서, 서로 좋은 감정을 가지고…….”
“……?”
투명한 파란 눈을 보고 있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더더욱 알 수 없어졌다.
“그러니까 사, 사, 사…….”
벨라가 원작 속에서 클레멘츠의 연인이었기에 말하기 어색한 건 아니었다. 그건 이미 예전에 끝난 일이니까. 다만 내 입으로 클레멘츠와 무슨 관계인지 밝혀 말하기가 이렇게 부끄럽다니.
“혀가 굳었니?”
“……사귀고 있어. 연애 중.”
목소리가 기어들어 간다. 민망함을 추스르며 겨우 눈을 마주 봤더니 더 당황스러웠다.
저 표정, 마치…… 당연한 걸 굳이 왜 말하냐는 얼굴이잖아?
아니? 어떻게 알았지? 언제 어디서? 내가 미리 말했었나? 아니면 편지로 그런 얘길 했었나? 자기 충족적인 예언을 해 버렸나?
말없이 물음표만이 마구 오가는데, 뒤에서 뭔가 와르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엥.
돌아보니 카밀이 있었다.
상당히 못 들을 개소리를 들었다는 듯한 황당함과, 민망하고 부끄럽고 서운한 표정이 드러났다.
“카밀?”
“나, 나는…….”
카밀은 자세를 낮추어 앉았다. 와르르 쏟아진 물건을 나름대로 주워 담으려 하는 것 같았다.
바닥 쪽을 보지도 않아서 헛손질만 반복했지만.
“오필리어 양, 쾌차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왔어요.”
“아, 고마워라!”
“아픈 동안 맛있는 걸 못 먹었을 테니 이런저런 간식이랑…… 또 오필리어 양이 좋아할 만한 선물을 사서.”
“정말요?!”
그게 저 물건들의 정체였나 보다.
“찾았지만 방에 없다고 하기에 찾아왔죠. 그, 그런데…….”
원래대로라면 벨라를 만나는 동안 여긴 아무도 오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카밀은 역시 카밀이었다. 눈이 뒤집혀 황태자를 찾아 난입하던 경력이 어디 안 갔다.
“그게 무슨……. 제가 잘못 들은 거겠죠? 황태…… 하하. 누구랑 누가 무슨 관계라는 말을 들은 것 같네.”
애석하게도 그녀의 청력엔 이상이 없었다.
“그리고 대체 왜! 내가 아닌 저 여자에게 먼저 이야길 풀어놓는 거죠? 인정할 수 없어요!”
엉망으로 쏟아진 물건들을 포기한 채 일어선 카밀은 위풍당당한 후작 영애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고 보니 두 분 이미 안면이 있으셨죠? 벨라는 저의 제일 친한 친구예요.”
“제, 제일 친한…… 친구…….”
“열두 살 때부터 제 주군이었거든요!”
“열두 살…….”
카밀이 고운 이마를 짚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세요?”
다행히 쓰러진다거나 할 것 같진 않았다. 나는 벨라 쪽을 돌아보다가 흠칫했다.
뭐야, 너…… 내가 알던 그 벨라가 맞아?
그 뻐기는 듯한 표정 대체 무슨 뜻이야?
“……!”
뭔가 익숙하다, 이 상황. 저들 사이에 오가는 살벌한 눈빛까지.
뭐가 문제야? 나 지금은 병아리도 아니잖아. 왜 또 이런 패턴인 건데?
“이럴 줄 알았다.”
심지어 다른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이번엔 클레멘츠였다.
“아무 데나 주제 모르고 얼굴 내미는 습관을 아직 못 고쳤군, 베일리스.”
“하, 전하께서 지금 그런 말씀을 제게 하실 처지는 아니실 텐데요? 애당초, 오필리어 양과 모나한 백작 둘이서 만나기로 한 자리인데.”
“……알긴 알고 계셨군요?”
머리가 아파 왔다. 나의…… 벨라와 오붓하게 보내려 했던 오후 시간에,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무려 전운이.
“나는 예외지.”
클레멘츠는 피식 웃으며 일축했다. 그리고 내 손을 들어 입맞춤을 했다. 로맨틱한 자세와…… 로맨틱한 얼굴이었다.
“어머나, 헤헤.”
“보다시피 나는 오필리어의 연인이고, 이곳에서 오필리어는 내 손님이며 그러므로 내가 그녀를 보호하고 책임지는 역할이니까.”
“…….”
불과 방금 전까지 서로를 뭐 씹은 듯 쳐다보던 두 여자는, 이제 한결 살벌하게 클레멘츠를 노려보고 있었다.
“클레멘츠 레스타 뒤싱겐.”
벨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필리어를 조금이라도 아프게 하거나, 다치게 하거나, 울게 하거나 짜증 나게 하면 역시 당신을 죽여 버리겠습니다.”
그리고 황태자 시해 예고를 했다. 나는 이마를 짚었지만 클레멘츠는 콧방귀조차 뀌지 않았다.
“그쪽보다야 낫겠지.”
쾅!
벨라가 벌떡 일어나자 의자가 나동그라졌다. 아이고…….
다음은 카밀이었다.
“저는 아직 인정 못 했어요. 결코 인정할 수 없어요!”
하얗게 되도록 말아 쥔 그녀의 주먹이 떨렸다.
“어째서 오필리어 양처럼 사랑스럽고 선하고 어디 빠지지도 않는 아가씨가…… 당신 같은 무뢰한을?”
“가끔은 맞는 말을 하는군요, 후작 영애.”
“…….”
괜찮을까, 이 사람들?
클레멘츠야 원래 글러 먹었다 쳐도, 두 여자는…… 클레멘츠를 향해 적립되었던 원한이 폭주해 버린 것 같은데.
클레멘츠에게 일말의 소유욕도 남아 있지 않은 듯하니 그건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게 나에게 와 버린 것 같다.
“오필리어.”
클레멘츠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향해 다정히 웃었다.
“저런 못된 말은 듣지 말고. 티타임을 망쳤으니 나와 함께 산책이나 할까.”
“그게…….”
나는 조용히 자연 발화하고 있는 두 여자를 힐끔거리다가, 벨라와 함께 멋지게 보내려고 준비했던 ‘백금의 정원’을 둘러보았다.
“저는 여기가 좋은데.”
“그럼 불청객들은 사라져 줘야겠군.”
“……그 ‘불청객’ 중에 본인도 있으시다는 점은 아시겠지요?”
벨라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일침을 놓았다.
“머리가 나쁜가? 난 객이 아니라 주인이라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인신공격이 오갔다.
“오필리어 양, 그 남자랑 노는 게 뭐가 재미있겠어요? 이리 와요. 귀족 세계를 주름잡은 카밀 드 베일리스가 최고의 즐거움을 약속할게요.”
“……!”
뭐지? 왜 그런 걸 약속하는 거지?
잘 모르겠지만, 언제 강짜를 부렸나는 듯 생긋 웃으며 손을 내미는 카밀은 천사처럼 우아했다.
멍하니 보고 있자니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하는지의 감각마저도 흐려져 갔다. 앗, 위험해.
“…오필리어, 지금 어딜 보고 있는…….”
“오, 오필리어! 우리 아직 하던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잖아?”
벨라는 왠지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애잔하군요, 모나한 백작.”
“무슨 소린지? 오필리어는 어릴 때부터 나와 둘이서 노는 게 제일 즐겁다고 했습니다.”
“그건 어릴 때잖아요. 한심하군요.”
맙소사, 또 싸운다!
백금발과 녹안의 도회적인 미녀. 흑발 벽안의 신비롭고 야성적인 미녀.
둘이서 얼굴이 한없이 아까운 수준의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원작에서처럼 숨이 턱턱 막히는 분쟁은 아니었지만, 신경 쓰이고 곤란해서 둘을 번갈아 보았다.
“……!”
그러다 보니 순간 내 뺨에 쪽, 하는 가벼운 입맞춤이 느껴졌다. 크게 뜬 눈에 클레멘츠의 장난스러운 웃음이 잡혔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클……!”
반사적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다가 입을 다물었다. 단둘도 아니고 사람이 넷이나 있는데 거리낌 없이 부르면…….
“왜, 그냥 불러.”
클레멘츠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길고 단단한 손가락에 내 금색 머리카락이 감겼다. 예상치 못한 순간, 그가 이번엔 반대쪽 뺨에 입 맞추었다.
“평소처럼, 내 이름.”
설레는 마음을 뚫고 기적적으로 나의 메타 인지가 발동했다.
난장판이구나.
심지어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대체 왜 왔는지 불분명한 불청객이 추가되었다.
“어? 오필리어는 나랑 노는 걸 제일 좋아할걸요. 우리는 오붓한 천막 속에서 축제도 함께 즐긴 적 있고, 무도회 때 춤도 같이 췄는데.”
“…….”
“…….”
“그뿐만이 아니에요. 오필리어가 마수에게 끌려갔을 때, 무려 날개 달고 쫓아온 누군가보다 빨리 도착했다고요.”
“…….”
“그렇죠, 오필리어?”
“…….”
나는 이제 모르겠다. 내가 그만하라고 해서 저 유치한 싸움을 멈출 인간들도 아니었다.
클레멘츠와 카밀까진 그렇다고 쳐도, 벨라와 메디프까지 저런 사람들인 줄은 정말 몰랐다.
한 발짝 물러난 의자에 앉아 4인 4색의 공방전을 보자니 글로리나 부인이 생각났다.
“이 황태자궁에서 ‘백금의 정원’이 쓰이는 건 참으로 오래간만이군요. 참으로 보람찬 일이 될 것 같습니다.”
여기가 이렇게 복작이는 일은 확실히 오래간만일 것이다. 하지만 이 광경이, 부인이 생각하던 보람찬 일일까? 한없이 숙연해진다.
“전하, 여기 계신단 말씀을 듣고 왔습니다. 승인이 필요한 건이…… 음?”
카시스다. 카시스가 나타났다!
카시스는 그의 등장을 눈치채지도 못하고 논쟁하는 넷을 보며 난감해했다. 나는 한 줄기 빛과 같은 정상인을 데리고 조용히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