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제대로 대답해요.”
“……네가 여름 축제 날에 노래하는 걸 들으면서 알게 됐지.”
“……알게 됐어요?”
“그러니 실제로는 그 전부터다.”
지금 상당히 부끄러운 말을 하고 있다는 자각이 있는 걸까? 오필리어는 태연자약해 보이는 클레멘츠를 발그레해진 얼굴로 쏘아보았다.
클레멘츠의 무릎 위에 앉으니 발이 바닥에서 붕 떴다. 오필리어는 들뜬 느낌에 양다리를 물장구치듯 흔들었다.
“가만히 있어, 오필리어.”
“왜요. 나는 재밌는데.”
아랑곳 하지 않고 다시 다리를 살랑거리자 클레멘츠는 어딘지 달뜬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마침내 그가 오필리어의 무릎을 톡 쳤다.
“너는 어떻지?”
“네에?”
“언제부터 나를 그렇게 좋아했어?”
“…….”
오필리어는 곰곰이 생각했다. 클레멘츠에게 ‘자의식 과잉 상자’에 대해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이야길 다 털어놓으면 그는 분명 소리 내어 웃고 말겠지. 어쩐지 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을쎄요. 잘 기억이 나지 않네요. 흠, 아마도 전하보단 나중이 아닐까요?”
그리 말하곤 턱을 살짝 치켜올렸다. 자존심을 세우는 모습에 클레멘츠는 나직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테지.”
‘……순순히 받아들이는 거야?’
오필리어의 예상과 달리 클레멘츠는 ‘아니다. 내 쪽이 나중일 거다.’ 등으로 반박하지 않았다. 그러곤 따사로운 눈으로 그녀를 찬찬히 내려다보았다. 보기 좋은 입매는 만족스러운 호선을 그렸다. 가만히 손을 내어 그녀의 뺨을 쓸어 내는 손길이 너무나도 다정했다.
이제는 입술을 붙여 오진 않았지만, 오필리어는 생각했다.
‘위험해.’
그저 쳐다보는 것뿐인데, 그의 눈빛에 꽉 붙잡혀서 옴짝달싹 못 하게 될 것만 같았다.
‘하여간 사람이 요망한 구석이 있어.’
그녀는 눈을 꼭 감고 고개를 저었다. 또 이런 식으로 휘말려 버리면 안 된다.
“아.”
오필리어는 그에게 물으려던 걸 가까스로 하나 떠올렸다.
“벨라가 얼마간 수도에 머무를 거래요. 초대해서 같이 놀아도 되나요?”
그녀를 더없이 사랑스럽게 내려다보던 클레멘츠의 눈썹이 곱게, 그러나 한 번에 일그러졌다.
또 벨라루시아 모나한이었다.
“마음에 안 드는군. 그 여자는 매번 너와 나 사이에 끼어들어.”
당사자가 듣는다면 그 말을 그대로 돌려줄 게 뻔한 발언이었다. 오필리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
“그 여자와 나, 누굴 더 좋아하지? 대답 잘해야 할 거야.”
“와, 진짜 질투?”
투정에 가까운 질문이란 것쯤은 클레멘츠 스스로도 알았다. 하지만 오필리어는 그 말에 담긴 진심을 훨씬 가볍게 받아들였다.
“전하는 제게 연인이잖아요! 벨라는 친구고요.”
그러니 당연히 그가 비교 우위에 있다는 대답일 줄 알았다. 허나 클레멘츠는 다음 대답에 여지없이 무너졌다.
“당연히 둘 다 좋죠. 둘 모두 정말 좋아해요. 제게 어느 쪽을 포기하라고 하지 마세요.”
“……하.”
클레멘츠는 낭패감에 치를 떨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의 입술에 가볍고 귀여운 입맞춤이 와 닿았다.
쪽.
“…….”
“연인의 특권인 키스를 받고 만족하세요.”
혀가 섞이는 관능적인 접촉도 아니었건만 그는 서서히 붉어지는 얼굴을 손바닥에 묻었다.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다.
* * *
실컷 질투하더니만, 결국 클레멘츠는 벨라를 데려와도 된다고 말했다.
“어디를 어떻게 쓰고, 무엇을 대접하든 다 네 뜻대로 해도 좋다.”
나에게 무척 너그러워진 태도를 보니 저절로 마음이 따스해졌다. 이렇게 다정하면서 안 그런 척했다니.
녀석, 츤데레였구나.
어쨌든 어디에 벨라를 부를지 고민해 보았다.
황태자궁 깊은 곳에는 차를 마실 수 있도록 꾸며진 실내 정원이 있었다. 병아리일 때 이곳저곳 기웃거리다가 발견했다.
후원 쪽이 통 유리창으로 내다보여, 꼭 실내의 정원이 바깥으로 이어지는 듯한 기분이 드는 곳이었다.
친구와 놀거나 책을 읽을 때 쓰면 참 환상적일 것 같은데, 아무도 안 써서 내가 다 아까웠다. 여길 방치하는 건 건축가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이 황태자궁에서 ‘백금의 정원’이 쓰이는 건 참으로 오래간만이군요. 참으로 보람찬 일이 될 것 같습니다.”
거기로 친구를 초대하겠다고 하자 글로리나 부인도 기뻐했다. 그녀는 나보다도 들뜬 태도로 정원을 청소하고 이런저런 다과를 만들도록 지시했다.
이윽고 벨라와 약속한 오후.
“어서 와, 벨라!”
“바보 오필리어.”
첫마디가 꽤 퉁명스러웠다. 괜찮았다. 그래서 더 벨라다웠다!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분명 처음엔 후원에 없었잖아. 황태자궁에 있었다면서.”
그리고 무섭게 추궁하며 날 몰아세웠다. 이것도 벨라답다.
“지, 진정해…….”
“왜 위험한 곳으로 뛰쳐나온 거야? 죽는 게 소원이야?”
“아니, 무슨 일이 난 것 같아서 확인차 나갈 수밖에 없었지. 덕분에 큰일 나는 것도 막을 수 있었잖아.”
“…….”
그날 벨라는 클레멘츠에게 화살을 겨눴다. 다행히도 제때 막았고, 본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만약 화살이 그대로 날아갔더라면 큰 문제를 일으켰을 것이다. 벨라도 그걸 알아서 더 말을 잇지 못했다.
“2황자 전하께서 주신 통신구 덕분에 빠르게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어. 부작용으로 너무 유명해져 버리기도 했지만…….”
모르긴 몰라도 지금 거리로 나가 보면 다섯 명 중 한 명은 나나 클레멘츠에 대해 떠들고 있을 것이다. 여론이 급격히 나빠지지 않은 건 천운이었다.
“그, 2황자 말이야.”
“응?”
벨라는 대단히 석연찮다는 듯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내 할 말을 찾지 못한 듯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난 그자가 싫어.”
“그, 그렇구나.”
내 안에 아직 남아 있던 독자의 영혼이 또다시 미미한 상처를 입었다. 엔클레이오 날 부둥켜안고 등장하길래 조금 기대했는데. 메인 남주에 이어 서브 남주마저 가열하게 싫어해 버리는구나. 그렇지만 그것이 벨라의 마음이라면 이젠 존중한다.
그녀의 팔을 끌고 정원 안으로 들였다. 오늘은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고 왔으니까.
“앉을래? 아니면 잠시 정원을 돌아볼래? 가을꽃이 예쁘게 피었어.”
백금의 정원에는 국화와 메리골드가 소담하게 피었다. 알차게 심긴 약용 식물들이 향기를 뿜었다.
“멋진 곳이네.”
“그렇지?”
이 멋진 모든 것이 벨라의 것이 될 수도 있었다. 옛날 같았으면 그게 아쉬웠겠지.
하지만 이제는 그녀가 다른 길을 찾았음을 알았다. 비극적인 사랑 대신, 좀 더 제 몸에 맞는 옷을 걸쳤다. 벨라는 달라졌다.
달라진 벨라가 살아갈 인생을 지켜보는 쪽이, 정해진 원작 전개를 지키는 것보다 보람찰 터였다. 예전엔 그걸 깨닫지 못했었다.
“황태자가 네게 잘해 주는 모양이야.”
테이블에 앉아 차를 마시던 벨라가 입을 뗐다.
“응?! 뭐 요즘엔 잘해 주긴 하지…….”
대답을 하는데 갑자기 그의 이전 행적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혹시 예전에도 나름대로 잘해 준 건가?
합리적인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사실이었다. 황궁으로 오고 나서는 내내 잘해 줬다. 다만 처음이 살해 위협, 강제 변신, 신변 억류였기에 이미 내 안에서 그의 이미지는 망해 있었다.
그 결과 사실 친절하게 대해 주고 있었는데도 상대는 알아채지도 못한 것이었다. 이러니까 사람이 초장에 막 나가면 안 되는 거다.
“……이 아니고 대체로 그러셨던 것 같아.”
“그랬겠지. 그러지 않았다면 당장 돌아가자고 네 손을 잡아끌었을 거야.”
역시 아니다 아니다 하면서도 벨라는 나를 참 아꼈다.
“지금이라도 네가 같이 가자고 하면 돌아갈 텐데?”
“……농담 말고. 몸은 좀 괜찮아?”
“아주 좋아. 너는? 작위 승계 같은 큰일이 있었는데, 엄청 바빴을 거 아니야.”
오라비에게 처자식이 없었기에 벨라의 계승 순위는 굳건한 1위였다.
고립된 백작 영애로 산 세월이 워낙 길어, 영지의 사람들이 그녀를 제대로 따르지 않을까 봐 걱정이었다.
그러나 얘기를 들어 보니 굳이 걱정할 건 없어 보였다.
셀레우시스에게 동조해 비리를 저지르던 아랫사람들은 주인과 함께 싹 갈려 나간 지 오래였다.
성에서는 집사 할아버지를 비롯해 벨라를 기꺼이 새 주인으로 모시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가신 가문들도 마찬가지였다.
혼우드에선 모나한가의 힘이 독보적으로 강했기에 그들은 순조롭게 따라왔다. 물론 내 부모님인 레오라 남작 부부도 포함해서.
“서부의 다른 가문들은?”
“그들은 원래부터 모나한을 멸시했어. 혼우드는 별 볼 일 없는 영지가 맞으니까.”
“으음……. 거기에 전대 백작님의 태도가 한몫했을 듯한데.”
“맞아.”
그는 영지가 가난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줄기차게 휘황찬란한 옷만 입었고, 세력자가 어디서 무슨 행사를 열었다 하면 부리나케 달려갔다.
곁에 달라붙어 아부하며 줄기차게 마셔 대는가 하면, 저와 비슷한 군소 귀족들은 이를 악물며 견제했다.
그런 그가 얼마나 천박해 보였을지. 모나한의 이름에 얼마나 먹칠했을지는 대략 예상 가능한 바였다.
그 오라비의 동생이 새 백작이 되었다 해도 좋게 보지 않으리란 거야 뻔했다.
하지만 이제 새 백작 벨라루시아의 시대! 계속 그대로 가면 안 되지!
마침 벨라는 승계 기념 연회를 열어 서부의 귀족들을 초대할 셈이라고 했다.
“좋았어! 그러면 그때 뭔가를 보여 주는 거야. 사람들 생각을 바꿔 놔야지.”
“……굳이?”
뭐 하러 그런 귀찮은 짓을 하냐는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대충 음악이나 연주하고 먹을 거 먹이고 보낼 생각이었나 보다.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