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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126)화 (126/218)

126화

그때 알현실 문을 지키던 시종이 고했다.

“폐하, 황태자 전하와 2황자 전하께서 드십니다.”

‘황태자…….’

벨라는 씁쓸했다. 지금껏 그 남자는 혼우드의 손님이었다. 갖고 싶고 또 죽이고 싶었던. 그리고 오필리어를 데려간 남자였다.

새삼 이 황궁에서, 황제와 황비 앞에서 마주하게 되니 그의 위치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럴 것 없다.”

황제의 제지로 벨라는 엉거주춤 자리에 섰다. 이어서 헌헌하고 귀티 나는 사내 두 명이 들어왔다.

“클레멘츠, 네 이놈…….”

은빛 머리통을 보자마자 황제는 화를 낼 준비부터 했다. 그의 손을 잡으며 말린 건 클라우디아 황비였다.

“폐하, 황태자의 몸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클레멘츠는 마물의 날개를 빌려 마수와 격한 추격전을 벌이다 높이 솟은 나뭇가지에 이마를 박았다.

한꺼번에 많은 마력을 썼는데, 그의 마력은 피에 들어 있다 보니 과다 출혈과 비슷한 증상이 있었다.

사제와 치유술사들이 달려들어 이마의 상처는 회복시켜 놨지만, 아직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하아, 너…….”

황제는 가까스로 분노를 진정시켰지만 잠시뿐이었다.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아느냐. 그 맹랑한 새, 아니 여자애를 가지고 우리 모두를 속였다. 뭐? 마스코트? 아다만티스?! 하!”

화가 나자 그의 손이 저절로 물건을 집어 던지려고 움찔거렸다.

“오필리어는 아다만티스가 맞습니다.”

“…….”

코넬리우스는 말문이 막혔다.

오필리어가 아다만티스라는 말은 소환된 대악마 크렘시아가 공언했다. 마족은 그들 나름의 규칙에 의해 거짓을 입에 담을 수 없었다.

게다가 마브로스 아르팍티카가 마력이 충만한 신수를 먹기 위해 데려갔다면, 같은 공간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아닌 하필 오필리어를 데려간 이유도 아귀가 맞았다.

‘하필이면 초대 이후 처음으로 등장한 신수가…….’

황가와 제국의 상징인 신수이니, 당장에 내쫓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인터뷰 내용, 신문기사들. 사실을 일부 은폐하긴 했지만, 거짓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깟 신분도 별 볼 일 없는 계집애를 지키려고 그 애를 썼더냐?”

황제는 기어이 옥좌의 팔걸이를 탕 쳤다.

“신수라 하지만 그것마저 가짜일 줄 누가 아느냐! 너를 호려서 황가의 일원이 되려고 술수를 부린 게지!”

입 다물고 지켜보던 벨라의 안색이 싸늘하게 식었다.

별 볼 일 없다니. 가짜라니. 누굴 일부러 호리려고 속였다니.

도저히 참아 줄 수 없었다. 이 나라의 황제라도 오필리어를 모욕할 순 없었다.

독기를 한껏 담아 입을 열었지만, 클레멘츠가 먼저였다.

“그리 모욕하지 말아 주십시오.”

“하! 얼마나 고귀한 여인이기에 황제인 내가 입조심을 해야 하느냐?”

“저에게는 가장 귀한 사람입니다.”

침묵이 흘렀다.

“뭐라? 너, 네가…….”

자리에 모인 모두가, 방금 들은 소리가 과연 황태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맞는지 재차 확인해 보았다.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그녀를 사랑한다고 인정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정작 클레멘츠의 얼굴은 평소처럼 희고 고요했다.

“그래서 앞뒤 안 보고 그리 달려들었다는 거냐. 심지어 네놈의 더러운 출…….”

당황도 잠시. 길길이 날뛰던 코넬리우스는 합, 입을 다물었다. 벨라가 아직 자리에 있다는 걸 깨달은 탓이었다.

“얼빠진 놈. 조만간 그 아이를 불러 내 제대로 타이를 것이다.”

“폐하.”

벨라는 조금 전처럼 무릎을 꿇었다.

한창 화내다가 흐름이 끊긴 황제는 애매한 투로 쏘아붙였다.

“뭐냐, 모나한 백작! 그러고 보니 그 병아리는 너의 가신이었지. 너까지 그 앨 감싸는 게냐?”

“진노하셨다는 거 압니다. 하지만 오필리어는 바보라서 수작 같은 건 모릅니다.”

“…….”

“이것만큼은 제가 방금 한 맹세를 걸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감싸는 건지 욕하는 건지 모를 말이었다. 그러나 차갑고 결연해 보이는 벨라의 눈 깊은 곳에선 애정이 묻어 나왔다.

“폐하께선 제 용맹을 높이 사셨지만, 사실 저보다 용감한 건 오필리어입니다. 편히 황태자궁에 머물 수 있었지만, 굳이 나와서 사람들을 돕지 않았습니까.”

“그래요, 폐하. 오필리어라는 그 아이도 기특하지 않았습니까. 경황없는 중에 그 애가 사람들을 대피시켜 준 덕에 기사단과 마법사들도 더 편하게 대응할 수 있었지요.”

클라우디아까지 거들자 황제는 휴화산처럼 가라앉았다.

“……그래. 그 얘길 해야겠지. 오필리어 레오라는 본디 그날 황태자궁에 머무는 중이었다. 헌데, 엔클레이오 의식장으로 왔다가 변을 당했지.”

코넬리우스의 보라색 눈이 이번엔 2황자를 향했다.

“그 통신구는 네가 준 것이냐? 메디프.”

“예, 폐하.”

메디프는 선선히 긍정했다.

“귀족이라면 다들 참석하는 엔클레이오가 아닙니까. 오필리어 양이 홀로 끼지 못하고 방 안에만 있는 게 너무 안타까웠기에 준 선물인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이어지는 목소리는 침통하기 그지없었다.

괴롭게 토로하는 메디프를 보는 클라우디아의 심정은 더없이 흡족했다.

“저 때문에 괜히 오필리어 양은 물론 황태자 전하까지 위험에 처하시고 말았습니다. 어떤 벌을 내리셔도 달게 받겠습니다.”

메디프는 황제에게, 그리고 클레멘츠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 하늘색 뒤통수를 노려보는 클레멘츠의 눈은 싸늘하기만 했다.

“됐다. 선의로 그랬다는데 무슨 벌을 내리겠느냐. 무료한 레이디를 돕고 싶었다니 기특하군.”

“폐하, 그러지 말고 좀 혼내 주시지요. 저 오지랖 때문에 생때같은 아가씨가 다칠 뻔했잖습니까.”

클라우디아가 부드럽게 나무랐다.

사람의 마음은 청개구리 같아서, 옆에서 혼내라고 부추기면 측은한 마음이 들고, 용서하라고 아우성치면 괘씸한 마음이 든다. 황비는 그걸 잘 알았다.

한편 벨라는 파란 눈으로 메디프의 옆모습을 노려보고 있었다.

‘오필리어가 위험한 곳으로 뛰쳐나오게 한 게 저놈이라고? 통신구를 줘서?’

그날 자꾸 허공에 대고 뭐라 말을 거는 것 같긴 했다.

‘선의로 그랬다고? 통신구도 실수로 떨어뜨렸다고 하겠지.’

그러나 결과는 어떻게 되었나.

다행히 돌아왔지만 어쨌든 오필리어는 납치당했고 온갖 잡스러운 인간들이 그 아이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

많은 혀가 움직이면 결단코 고운 말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벨라루시아는 해할 작정과 흉계와 음습한 감정에 대해서만큼은 귀신처럼 잘 알아차렸다.

‘저놈’은…… 그러니까, 놈팡이 같은 2황자는 수상했다.

“왜 따라와요?”

메디프가 물었다. 흰 대리석으로 지은 황제궁의 회랑은 쾌청한 가을 하늘과 어우러져 밝고 고요했다.

‘네놈이 수상쩍으니까.’

피차 신분이 드러난 마당에 그리 대답할 순 없었다.

“엔클레이오 때의 무례를 사과드리려고 합니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벨라를 돌아보았다. 붉은 드레스 자락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 엔클레이오 때도 붉은 사냥복을 입었었다.

“무례요? 어떤 것? 황자인 내 멱살을 잡은 것?”

“…….”

“불손하게 말한 것? 비행 마법을 쓰는데 위험하게 매달린 것? 아, 아니면 살해 협박한 것? 그것도 미안한가?”

사근사근한 말에 뼈가 있었다.

“사죄드립니다. 부적절한 발언이었습니다.”

남에게 고개 숙이고 사과하는 상황은 익숙지 않았다. 날카로운 자존심에 평소라면 가시를 세우고 뒤돌아섰으리라.

그러나 지금은 오필리어를 생각하느라 그런 것쯤은 뒷전이었다.

“쉽게 죽어 주진 않을 거예요. 내 뒤에는 황가와 페리윙클이 있으니, 최선을 다해 몰래 죽여야 할걸요. 당신 성격을 보아 쉽지는 않겠지만.”

2황자는 농담처럼 싱긋 웃고 있었다. 벨라는 생각했다.

‘이상한 사람이네.’

얼빠지고, 제정신 아니고. 형제라면서 황태자와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가장 나쁜 건 일부러 오필리어를 곤경으로 몰아넣었을 가능성이었다.

‘악의를 가지고 그 애를 위험으로, 구설수로 몰아넣은 거라면…….’

그렇다면 벨라의 결론은 간단했다.

‘발톱으로 찢어 버려야지.’

그가 황자라거나, 페리윙클 가문의 보물이란 점은 하등 관계없었다.

“전하께서는 농담에 능하시군요.”

메디프와 달리 벨라는 보여 주기 위한 억지웃음은 지을 수 없었다. 하지만 딱딱하던 말투를 조금은 유하게 바꿀 순 있었다.

사냥에 나선 흑표범이 몸을 웅크리는 듯한 태도였다.

“외람되지만, 2황자 전하께 긴히 드리고 싶은 말이 더 있습니다.”

“레이디께서 원하신다면 기꺼이 시간을 내어 드려야죠. 좋은 이야기는 전혀 아닐 것 같지만.”

“엔클레이오에 ‘사용’되는 마수들의 관리를 전하께서 총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올해는, 그렇죠.”

메디프는 긴장했다. 마수들의 마력 노출량에 장난을 친 걸 이 여자가 알아챘을 리 없었다.

마력 촉매가 반응하기도 전에 저 야생에 살던 마브로스 아르팍티카가 먼저 난입했으니.

그럼에도 그녀를 마주하면 왠지 등골이 서늘해졌다. 속내까지 꿰뚫어보는 듯한 저 파란 눈 때문일까.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네. 듣기로 마수를 만들기 위해 억지로 마력을 주입하고, 우리에 가두어 두었다가 엔클레이오를 위해 끌어내 희생시킨다지요.”

벨라는 차가운 눈을 그에게 고정하고, 또박또박 말했다.

매년 봉마 의식에 다녀올 때마다 오라비가 하는 이야기는 다른 귀족들에 관한 것뿐이었다.

누가 가장 위세 등등했나. 어떤 여귀족이 아름다웠나.

누가 꼴사나운 짓을 했으며 봉마 의식이 끝난 다음엔 어느 집에서 연회를 열었는지. 그런 이야기들.

자연히 벨라는 관심이 없으니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어쩌면 흘러가듯 마수 이야기가 나왔을 수도 있지만, 듣지 못했다.

그러니 엔클레이오에서 매년 마수가 어떻게 희생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자신의 친구이자 동류인 그 목소리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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