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자식만도 못한 아비를 그 어느 관료가, 어느 귀족이 따를 것인가?
그런 이유로 황제는 어두운 방 안에서 자괴감에 뒤틀려 갔다.
“클레멘츠, 내가 고작 이런 꼴이 되려고 네놈을……! 으아아!”
종이 뭉치로 성에 차지 않아서, 무거운 크리스털 잔과 목제 장식품도 내던졌다. 요란한 소리가 났다.
‘셀레네……! 내 그리도 대접해 주었거늘. 마지막 길을 가면서까지 이 따위 폐를 끼쳐? 대체 뭐가 부족했기에!’
아름답고 병약하던 얼굴을 떠올리니 가슴이 후벼 파이는 듯했다. 그것도 잠시.
그 여자가 저지르고 간 역겨운 짓을 떠올리니 배신감이 차올랐다.
‘차라리 처음부터 페리윙클에서 황후를 들일 것을.’
클라우디아의 행보를 보면, 그녀가 황후로서 얼마나 잘해 나갔을지는 눈에 선했다. 그녀 역시 자식이 하나였지만, 아들 하나를 낳기도 전에 수명이 다해 버린 셀레네보단 건강하기도 했다.
그럼 결격 사유가 있는 놈이 황태자가 될 일도, 머리 좋은 메디프 놈이 자기는 둘째라는 이유로 밖으로 나도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염병할!’
황제의 침실로부터 연신 물건 깨지는 소리, 간헐적인 욕설과 고함 소리가 울려 왔다. 근처를 지키던 사용인들은 그저 움츠린 채 몸을 사렸다.
그 앞으로 짙은 남색 드레스를 입은 귀부인이 우아하게 걸어왔다.
“화, 황비 전하.”
안절부절못하던 시종이 작게 인사했다.
“폐하께서는 지금…….”
클라우디아 황비는 손을 내저어 사람들을 물렸다. 문을 열곤 미끄러지듯 소리 없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 누구냐! 아무도 들이지 마라. 나가!”
“저예요, 폐하.”
휘장이 드리운 침대 속에서 어슴푸레하게 구겨져 있던 형상이 머리를 들었다.
“……클라우디아?”
“네. 당신의 비(妃) 클라우디아랍니다. 안심하세요.”
바다 같은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황제는 그 안광을 눈치채지 못하고 허둥거렸다.
“왜 들어왔소! 시종들이 말하지 않던가? 부러 내 못 볼 꼴을 눈에 담으려고 작정하지 않고서야. 그대조차도 나를 업신여기는 건가?”
클라우디아는 화들짝 놀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어쩔 줄 몰라 하며 그가 누운 침상을 향해 몸을 낮췄다.
“…오오, 코넬리우스.”
격식을 갖추던 말투는 훨씬 친밀한 이를 대하듯 바뀌었다. 흡사 페리윙클 공녀이자 황비인 여성에서, 코넬리우스의 아내 클라우디아로 돌아오듯.
가녀린 체구와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진 터라 더욱 효과가 컸다.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하셨어요. 제국은 황제의 권위로 인해 돌아가거늘. 정작 당신의 아들부터도 기강이 엉망이니.”
“……!!”
퀭해져 있던 보라색 눈이 떨렸다. 그녀는 정확히 황제의 마음속 갑갑한 부분을 찾아내어 두드렸다.
“물론 클레멘츠도 제 소중한 가족이랍니다! 당신의 친아들이잖아요. 제국의 자랑거리고. 하지만…….”
“…….”
“이렇게 갑작스럽게 엇나가 버리다니. 이럴수록 가족의 쓴소리가 필요한 법인데, 그 애는 저를 가족으로 생각지도 않으니까요…….”
“클라우디아.”
서글픈 기색을 감춘 황비는 남편의 등을 쓰다듬었다. 정원 일로 조금 거칠어졌으나 여전히 여리고 나긋한 손이었다.
“우리는 부부잖아요. 가족이고요.”
“그래. 그래…… 맞다.”
황제는 상당히 진정된 기색이었다. 그는 더듬거리며 황비의 작은 손을 꼭 쥐었다.
“그간은 저의 분수에 맞추어 선을 지켰지만, 당신이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니 이젠 말할 때도 됐다 싶어요.”
‘이게 방법인 것 같아서요.’- 클라우디아는 미안하다는 듯 덧붙이며 작게 웃었다. 사랑이 듬뿍 담겨 있는 낯으로 속삭였다.
“저와 결혼해 주세요, 폐하.”
황제의 자색 눈이 세차게 떨렸다.
“그게, 그게 무슨…….”
“저를 공식적으로 첩의 자리에 두시는 바람에, 그간 교단에서 불필요한 질책이 얼마나 들어왔었나요.”
물론 지금도 그들의 혼인 관계를 부정할 만큼 간 큰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시미크 교는 오직 일부일처제만을 인정했다.
전 황후가 이미 세상을 떠났음에도 황제는 정식 혼인을 통해 클라우디아를 맞이하지 않았다. 애매한 지위인 황비 자리에 올려 두었을 뿐이었다.
이는 교리적으로 불륜이었기에 교단의 맹렬한 질타를 받았다. 그동안 황실과 교단이 꾸준히 일으켜 온 불협화음 중 하나였다.
“지금이라도 교단이 인정하는 혼인을 치르겠다고 하면, 그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어요. 그 지지를 통해…… 잠시 길을 잘못 든 우리 황태자에게도 따끔한 경고를 줄 수 있겠지요.”
황제 부부가 교단의 승인으로 국혼을 올리면, 상대적으로 황태자는 교단의 눈 밖에 날 것이다. 귀족들이 다 보는 앞에서 악마를 소환하고 난 뒤니 더더욱.
묘책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망설였다.
“하지만 그러면…… 클레멘츠 녀석의 입지가.”
“무엇보다 황제의 권위가 중요합니다, 폐하. 황제가 바로 서야 제국이 바로 서고, 나머지는 그다음이에요.”
사근사근 설득하던 클라우디아는 매서운 어조로 그의 망설임을 잘라 냈다.
“아니면, 이대로 황태자가 독주하고 황권마저 깎아 먹도록 내버려 둘 셈이십니까?”
“……그건 안 되지. 안 되고말고.”
황제, 코넬리우스의 눈에서 주저하는 기색이 사라졌다. 이제 그의 주름진 눈매에는 광기라 할 만한 것이 넘실거렸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클라우디아는 곱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조곤조곤 속삭였다.
“알지요. 당신의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여인은 셀레네 황후 폐하뿐이신걸…….”
슬픈 눈빛에 황제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오, 클라우디아.”
“그분의 자리를 탐내는 게 아니어요. 또 그분과 당신의 아들인 황태자를 감히 몰아내겠단 것도 아니고요.”
“알아. 욕심 없는 당신이 어떻게 그런 끔찍한 일을 꾸미겠소?”
“다만 저는 폐하와 같은 성군의 치세가 더 길고, 안정되길 바랄 뿐이랍니다. 마땅히 그리 되어야만 하니까요.”
클라우디아는 제 가슴에 손을 얹고,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더없이 충성되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클라우디아는 방을 나서며 문을 닫았다.
바다 거품에서 태어난 천사 같던 미소가 걷혔다. 그녀는 원하던 걸 얻었다. 이십여 년을 웅크려 기다린 사냥이 끝났다.
‘아니, 이제 시작되었지.’
황후 자리는 수단일 뿐이었다. 애당초 황제의 아내를 뜻할 뿐인 직함에 무슨 탐나는 점이 있겠는가. 중요한 건 권력의 정점이자 본질이었다. 황제, 제국.
‘그래, 애잔한 코넬리우스가 그리도 목을 매는 황제의 권위.’
아내는 둘이나 들일 수 있고, 버리면 끝이다. 그러나 한 번 낳아 준 어머니는 바꿀 수 없다.
‘내 아비가 뒤싱겐이 아닌 페리윙클인 이상은, 직접 황제가 될 수는 없으니까.’
창문이 난 복도에서 북쪽을 내다보면 셀레네 황후의 무덤이 있는 방향이었다.
어쩌면 그녀가 원하는 모든 걸 먼저 가질 수도 있었던 여인은 이제 세상에 없었다.
‘만약 당신이 건강했다면. 혹은 좀 더 약았더라면.’
백골을 상대로는 승리감이 아닌 공허감만 들 뿐이었다. 황비는 비틀린 미소를 짓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엔클레이오 이후 오히려 황태자가 승승장구하고는 있다지만, 그건 위태로운 불구덩이가 일으킨 상승 기류였다.
모든 이들이 황태자와 새로 나타난 그 연인에게 동조하고 있진 않았다. 당장은 환호하는 목소리 속에 묻혀 있지만, 반감을 일으킬 여지도 상당했다.
그의 낭만적이지만 신중하지 못한 행동. 그 여자아이의 석연찮은 신분. 거기다 궁정에 깊이 발 담근 귀족이라면 알고 있는 비밀까지.
아주 약간의 계기만 있으면 이 거품은 금세 꺼진다.
이미 가문에서 풀어 놓은 자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사이로 자연스레 옮겨 다니며 황태자에게 불리한 말을 퍼뜨렸다.
수십 년을 조용히 살았어도, 마력 하나 쓸 수 없어도, 그녀는 페리윙클가 사람 수십의 생명과 바꾼 페리윙클의 목숨이니.
그녀는 뒤따라 붙은 심복에게 명령했다.
“신성왕국에 연통을 넣어라.”
“예.”
클라우디아가 할 일은 이미 타고 있는 불씨에 폭약 한 줌을 뿌리는 것이었다.
* * *
“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저의 충정은 클라티아를 향할 것입니다. 저의 방패는 황제 폐하를 지키고, 저의 검은 뒤싱겐 황가의 적에게 겨눠질 것입니다.”
“일어나거라, 모나한 백작.”
황궁의 알현실. 옥좌 앞에 무릎을 꿇었던 벨라가 천천히 일어났다. 검은 털을 덧대고 금실로 수놓은 붉은 벨벳 드레스는 검은 머리의 미인에게 그림처럼 잘 어울렸다.
옆에 황비가 서 있었지만, 황제 코넬리우스는 한마디 덧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실로 아름답구나.”
“황공하옵니다.”
단순한 치사와 딱딱한 감사가 오갔다.
“그래, 모나한 백작 벨라루시아. 엔클레이오 날 너의 용감한 모습은 잘 보았느니라. 웬만한 장군 못지않더군.”
“미흡한 실력으로 화살 몇 발 당긴 게 전부입니다.”
코넬리우스 황제는 벨라가 흡족했다. 그는 원래부터 새로 작위를 받은 귀족이 충성을 맹세하러 오는 순간을 사랑했다.
거기다 벨라루시아는 매우 젊고, 아름답고, 용기 있었다.
구석에 박힌 작은 영지의 주인이므로 황권에 위협이 될 일도 없다.
“혼우드는 외적의 침입은 없으나 마계와의 경계인 만큼 여전히 중요한 곳이다. 잘 지키거라.”
“값진 조언 새겨듣겠습니다, 황비 마마.”
클라우디아는 온화한 미소를 지었지만, 벨라가 곱게 보일 리 없었다.
“납치된 벗을 구하겠단 마음은 훌륭하지만, 앞으로 비행 마법을 시전하는 마법사에게 뛰어드는 일은 삼가거라.”
“……송구하옵니다.”
“어찌나 위험했는지. 게다가 메디프는 황자가 아니냐.”
“황비, 이미 지난 일을 그리 추궁할 것 없잖소. 오늘은 새 백작에게 기쁘고 영광스러운 날이거늘.”
그 즈음에서 고분고분한 황비는 웃으며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