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몸은 좀 어떠십니까? 일어나실 수 있겠습니까?”
“네! 저 완전 괜찮아요.”
애당초 아픈 적도 없는데, 잠 좀 많이 잤다고 환자 취급이라도 받은 모양이었다.
……라는 건 내 착각이었다. 쓰러진 동안 먹은 게 변변치 않은 탓인지, 일어나자 머리가 핑 돌았다. 아이고야.
어쨌든 일어나서 목욕을 하고, 따뜻한 죽으로 배를 채우고 다시 누웠다.
마수가 잡아챈 몸통이 심하게 아팠던 기억이 있는데, 치유 마법사를 불러 다 치료했다고 한다. 온통 피멍이 들었을 거라 생각했던 몸은 깨끗했다.
그럼, 클레멘츠도 진작 다 치료받았겠구나. 안도했다. 그러면서도 정말 괜찮은지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잠깐. 내가 사흘간 누워 있었다면, 그동안 얼굴도 못 본 거네.
매일 보는 게 일상이 되어 있다 보니, 무려 3일이나 안 보고 지나친 게 신기했다.
곱씹다 보니 조금 불편하기도 했다.
유렌과 카렌, 글로리나 부인에 카밀에다 벨라까지 나를 찾아왔는데. 왜 누구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지?
아직 아픈가?
아니면 정말로 이젠 귀여운 병아리에서 너무 멀어졌으니까 나를 버릴 각을 재는 것인가!
“절대로 그렇겐 안 되지. 남은 기간 병아리비는 착실히 다 받아 내겠어…….”
그렇게 말하는 순간 방문이 열렸다. 나는 순발력을 발휘해 자는 척 눈을 감았다.
아니…… 왜?
스스로의 행동을 설명할 수 없었지만,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들어온 누군가는 내 침대 옆에 섰다.
그러곤 그대로 있었다.
“…….”
“…….”
숨소리를 규칙적으로 컨트롤하는 것도 힘들어 죽겠다. 뭐라도 행동을 하든 말을 하든지 해, 라고 생각하는 순간…….
기척이 훌쩍 가까워졌다. 당황한 나는 눈을 떠 버렸다.
클레멘츠가 보였다. 그의 눈도 나만큼 당황한 듯 크게 뜨여 있었다.
아무리 봐도 적응이 안 될 만큼 예쁜 눈이었다.
그의 두 손은 내 이불 가장자리를 잡고 있었다. 아마 내가 이불을 대충 덮고 잔다고 생각하고, 바로 덮어 주려던 참이었나 보다.
무심코 손을 뻗어 그의 이마에 살짝 댔다. 하얀 대리석 같던 이마는 째진 틈도 없이 잘 아물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미미하게 눈을 찌푸리며 자세를 좀 더 무너뜨렸다.
그의 무게가 내려앉으며 침대가 살짝 들썩거렸다. 좀 더 가까워진 우리는 숨결이 닿는 거리였다.
클레멘츠의 두 팔 사이에 내가 있었다. 왠지 모를 안정감이 들었다. 아직 닿아 있는 이마를 슬슬 쓰다듬었다.
그러자 자수정 빛 눈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의 눈은 미끄러진 시선의 경로에 마침 내가 있었다는 듯, 나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 소리가 들렸다.
“클레멘츠.”
그 순간 내가 그런 소릴 한 건 충동이었고, 다시 곱씹어 보면 직관이었다.
“좋아해요.”
“…….”
클레멘츠는 이제 나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그게 마음에 들어 나는 웃었다. 그의 귀 끝과 양 뺨은 부끄러울 때면 꽃물을 들인 듯 예쁘게 물들었다.
“클레멘츠는 나를 좋아해요.”
생각해 보니 진짜로 그랬다. 그는 예전부터 내게 지나치리만큼 신경을 썼다.
내 노래가 좋다고 했고,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부르는 건 싫다고 했다.
어느 순간부턴 뭐라도 더 좋은 걸 내 손에 쥐여 주지 못해 아등바등했다.
깜짝 놀랄 만큼 멋진 무도회 드레스. 파이가 좋다고 하자 파이 가게를 차려 주었고, 내가 원하는 걸 들어주겠다고 정책 노선까지 바꾸었다.
나 몰래 나에게 읊어 준 시는 말해 무엇할까. 무엇보다, 위험에 처한 나를 구하기 위해 귀한 몸을 던져 그 높은 산속까지 날아왔다.
그와 눈을 마주치고, 입을 열고,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깨달았다.
그동안은 왜 계약 병아리를 향한 의리나 책임 같은 거라고 생각했을까. 나도 바보 같았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를 홀린 듯이 잡아챘다. 그의 눈은 밤에 뜬 달처럼 내가 움직이는 그대로 따라왔다.
살짝 떨리며 이어지는 호흡까지도 미치도록 설레고 사랑스러웠다.
그가 날 좋아하는 걸 깨달았다고 나까지 이렇게 기쁠 이유가 더 있을까?
“나도.”
말해 버리면 날아가 없어지는 행복인 것만 같았다. 그래서 처음엔 아주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클레멘츠의 눈이 더 심하게 떨리며 빛나고, 내 심장도 주체를 못 하고 더 난리 치긴 했지만.
“좋아해요!”
그렇게 말하자 행복감은 더욱 커졌다.
“……!”
“좋아해요, 클레멘츠.”
이제 그는 꽃물을 들인 사람이 아니라 발간 꽃 그 자체 같았다. 급기야는 침대에 짚었던 손을 떼고 돌아섰다.
아니, 어딜 도망가려고?
“좋아해요! 좋아한다고!”
그는 정말로, 도망쳤다. 방문을 열고, 가을볕이 비스듬히 드는 복도로 걸어갔다. 쓸데없이 긴 저 다리가 이럴 땐 원망스러웠다.
침대에서 내려와 슬리퍼를 신고 허겁지겁 따라갔다. 내 발소리를 들은 그의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알다시피 나는 한 뜀박질 한다.
내가 이렇게 용기를 내어 고백했는데, 조그만 긍정의 신호라도 주면 안 되는 거야? 하다못해 고개라도 끄덕이든가!
저놈의 유구한 태도에 다시 부아가 치밀려고 하던 무렵, 그가 돌아섰다.
“……!”
햇살이 감싼 분위기는 부드러웠고, 그의 생김새는 여전히 조금 차갑고 날카로웠다. 눈 한 번 깜짝하니 그의 품에 안겨 있었고, 다음 순간 그늘이 지며 얼굴이 가까워졌다.
입술이 맞닿았다. 처음엔 부드러웠다.
가슴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콩닥거렸지만, 간신히 숨을 들이쉬며 눈을 감고 느껴 보았다. 말랑거리고 뜨겁고.
“……!”
촉촉했다. 짧은 숨을 들이켜며 그의 등에서 떨어진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클레멘츠가 제 팔 아래 겹쳐진 내 허리를 달래듯이 도닥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입술은 계속 움직였다.
“……흡!”
물기 가득한 소리가 민망하게 울려 댔다. 감긴 눈꺼풀 안에서 눈알이 핑핑 도는 것 같았다. 좋아한다고 외치며 까분 대가가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힘이 풀려 가는 몸을 가누려고 열심히 그에게 매달렸다. 막연히 다음이 있으리란 걸 알면서도 조금만 더, 가능하면 오래, 그와 이렇게 있고 싶었다.
* * *
황제의 호화로운 방. 침대 옆 협탁 위에 가득한 신문과 보고서는 온통 그의 맏아들, 클레멘츠에 대한 건으로 가득했다.
그가 얼마나 선풍적인 화제를 몰고 다니는지. 얼마나 인기가 치솟고 있으며 사람들은 다들 얼마나 관심이 많은지.
“질리지도 않고 떠들어 대는군…….”
방 안은 어두웠고, 황제는 침대에 누워 지끈대는 머리를 쥐어짰다.
“그놈이 감히.”
엔클레이오는 황제를 위한 날이었다. 선조로부터 내려온, 뒤싱겐 황가의 지배권을 공고히 하기 위한 일 년에 한 번뿐인 대의식.
매년 잘 치러져 왔던, 올해 역시 차질 없이 준비되었던 의식이 한순간 뒤집어졌다. 의식이 망가졌다는 건 황실의 권위 역시 요동쳤다는 뜻이었다.
“클레멘츠. 제 사악한 성분을 알고 있으면 조심, 또 조심하라고 그리도 경고했거늘. 이리 일을 저질러 놔?”
성난 손에 의해 한 무더기의 종이가 대리석 바닥에 쏟아졌다.
현왕 유스티온은 대마법사였다. 마족을 가둔 봉인력은 피를 타고 후손에게로 이어졌다. 클라티아 제국 초기의 황제들은 그 피의 힘만으로도 가둬 두었던 마족을 소환하고 자유자재로 부렸다.
하지만 피를 타고 전해진 힘에는 한계가 뚜렷했다. 대를 거듭할수록 피는 희석되었다. 어느 순간부턴 황가의 누구도 피를 내는 것만으론 악마나 마물을 부릴 수 없었다.
그저 유스티온 황제가 남긴 언령만이 남아 봉인을 유지시켰다. 뒤싱겐의 이름을 잇는 존재가 클라티아의 황좌에 앉기만 하면 인간계는 마족으로부터 여전히 안전했다.
“뒤싱겐의 이름이 지상의 왕좌에 좌정하는 한, 마의 종족은 마계를 벗어나지 못하리라.”
그러나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뒤싱겐이라니. 황족들은 허전함과 수치심을 느꼈다.
겉으로는 시미크 교를 국교로 받아들였기에 피에 깃든 흑마술을 더 이상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교단을 위해 한수 접고 능력을 숨기는 것과 실제로 능력을 못 쓰는 것 사이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자존심의 문제였다.
세상을 구한 대마법사의 후손으로서 정당한 황좌에 앉아 있다는 것을, 그 어마어마한 능력이 여전히 건재하다는 걸 모두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그렇게 준비된 의식이 엔클레이오였다.
엔클레이오 투 바실리아, 현왕의 봉마 의식.
황가의 인정 덕분에 승승장구한 페리윙클가의 도움을 받아, 청마법에 기반한 눈속임과 그럴싸한 볼거리를 커다란 진에 촘촘히 설치했다.
황제가 제 손을 그어 귀한 피를 내다 뿌리면, 봉인진에 설치된 마법은 그 피와 만나 화려한 빛을 뿜었다.
마치, 여전히 그 피 속에 유스티온으로부터 비롯한 강력한 능력이 있는 것처럼.
엔클레이오가 그런 눈속임 행사가 된 지도 십여 대가 지났다. 이제는 황족의 피에 능력이 희미하다는 건 비밀 축에도 끼지 못했다. 다들 공공연히 알았고, 주변에 황족이 없을 때면 농담 삼아 떠들기까지 하는 일이었다.
그런 와중에 클레멘츠가 한 일이 무엇인가.
붉디붉은 혈액이 보라색 빛으로 불타는 광경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날것 그대로의 능력이었다.
마물을 부려 자유자재로 하늘을 날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평생을 가도 볼 일조차 없는 대악마를 제 수족처럼 부렸다.
대악마 하나는 제국의 일개 사단과 맞먹는 전력이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황태자가 마음만 먹는다면 제국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클레멘츠는 능력을 증명했고, 갑자기 나타난 마수 앞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상황을 지휘했다. 연인의 위험에 능동적으로 나서기까지.
“철딱서니 없는 귀족들이 동하긴 충분하지. 제길……!”
황제의 권위란 코넬리우스에게 가장 중요했다. 그것이 없고서는 아무 것도 바로 세워지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도, 제국을 다스리는 일을 할 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