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Καίγεται.(불타라.)”
이질적인 불꽃이 사방에 흩어진 마수의 신체를 감쌌다. 장미색으로, 심장부는 백색에 가까운 색으로 이루어진 불꽃이었다.
뼈 한 조각, 피 한 방울과 단말마까지 이글거리는 불길이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순식간에 둥지 위에서 마수의 흔적이란 흔적을 모두 없애 버리고 나서, 불은 다른 곳에 옮겨 붙지 않고 깔끔하게 꺼졌다.
“이게 마계의 불이라는 거지.”
그녀가 내밀었던 왼손 역시 장밋빛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크렘시아는 그 손을 식히기라도 하려는 듯, 장난처럼 훅 불었다.
“만족하니, 나의 뒤싱겐?”
그러곤 뿌듯한 낯으로 돌아보는데, 나는 그때서야 정신이 들었다.
클레멘츠는 하얗게 질린 낯으로 쓰러졌다.
“전하!”
황급히 뛰어가 슬라이딩한 끝에, 잘생긴 얼굴이 더러운 둥지에 처박히는 참사는 면할 수 있었다.
“아이고, 이런.”
크렘시아가 팔짱을 끼고 걸어왔다. 그녀는 내 무릎을 베고 누운 클레멘츠에게 어디서 난 건지 모를 담요를 덮어 주었다.
“어쩌지? 내가 너무 신이 나서 힘 조절을 못했나 봐. 뒤싱겐의 마력을 과용한 모양이야.”
“그, 그럼 어떡하죠?”
공포의 마공작 크렘시아는 걱정 말라는 듯 생긋 웃었다.
“간단해요. 우리 아기 새 아가씨가 여기에 뽀뽀만 해 주면 금세 힘을 얻어 벌떡 일어날걸?”
하얗고 아름다운 손가락이 클레멘츠의 입술을 가리켰다.
“…….”
“자, 어서! 원한다면 혀를 써도 좋아. 가능하면 길게 길게……!”
끝이 치켜 올라간 장밋빛 눈이 부담스럽게 빛났다. 왠지 익숙한데, 이 등 떠밀기.
“거, 거짓말이죠.”
“어허! 어-떻게 그런 모욕적인 매도를? 나에게!”
거짓말이군. 마계 서열 5위의 대악마가 나약한 인간을 속여 먹는다.
“하지 마, 오필리어.”
벨라의 목소리였다. 어느새 다가온 벨라가 가만히 내 어깨를 짚었다.
“네가 그런 희생을 할 필요 없어. 그냥 두고 가자.”
“…….”
그, 그것도 좀.
크렘시아는 ‘이건 또 뭐야?’라는 표정으로 벨라를 쳐다보았고, 곁에 선 메디프는 푸흡 웃음을 터뜨렸다.
“뒤싱겐…….”
처음 보는 마물도 옆에 서 있었다. 밀도 높은 공기로 만들어진 듯한 여자였다. 그러고 보니 클레멘츠가 달고 있던 날개가 이쪽에 붙어 있다.
“어서 돌아가서 치료를 받으시게 해야겠어요.”
마력을 어마어마하게 써 젖힌 것도 큰일인 데다, 귀한 몸에 부상까지 입어 버렸다. 흘린 피가 말라 굳은 채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보니 너무 속상했다.
“뒤싱겐은 책임지고 출발하신 자리로 데려다 놓겠지만, 나머지 분들은 제 소관이 아닙니다.”
반투명 여자가 말했다. 예나 지금이나 클레멘츠가 소환한 마물들은 참 1차원적인 데가 있었다.
“어머, 이를 어쩌지?”
크렘시아가 놀라는 시늉을 했다.
“나도 비행 마법은 특기가 아닌데. 이 아가씨들을 누가 다 데려다주지?”
모두의 시선이 메디프를 향했다. 그는 황당해했다.
“……아니, 난 그놈의 뒤싱겐이 아닌 거예요?”
* * *
강한 힘이었다.
이전에도 한 번 절감한 바 있었다. 땅을 가르고, 아름다운 만큼 파괴적인 은빛 가루를 뿌려 대던 그 남자의 능력.
벨라는 오필리어를 지키기에 충분한 힘이 제게는 없다고 느꼈다. 그래서 보내 주었다.
‘조금은 나도 힘을 얻어 일어섰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저 강대한 능력에 비하면 역부족이었다.
표범은 다시 태어나도 날개를 가질 수 없다.
대악마의 마법을 제 것처럼 부린 건 또 어떻던가. 현란한 장미 불꽃은 벨라의 넋 역시 쏙 빼놓았다.
그때처럼 지금도 똑같이, 벨라와 그 남자 모두 한 가지 목적을 위해 가진 힘을 끌어모았다.
오필리어를 구하기 위해.
“벨라, 너는 언젠가 사랑을 하게 될 거야.”
오필리어가 그녀에게 했던 말들은 오래도록 남아 기억의 빈틈에서 떠오르곤 했다.
“지금껏 살아온 인생이 변하고, 알아 온 세상이 변하는 강렬한 사랑. 그 사람을 보기만 해도 마음이 따스해지고…….”
제국의 국교는 마녀와 적마도술을 배척했다.
지방의 백작인 벨라가 흑표범으로 변하는 것만 해도 자칫 알려져 눈길을 끌면 많은 문제가 될 수 있었다.
하물며 마물을 소환하는 제국의 황태자라니. 그러나 그는 앞뒤 재지 않고 달려들었다.
“그 사람이 행복해지기만 한다면 무엇이라도 주고만 싶은 그런 감정.”
안전이 행복의 필수 조건이라면, 그 사람의 안전을 위해 가진 걸 내던지는 것 역시.
‘사랑인가?’
벨라는 쓰러진 황태자를 서느런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결국 바보가 바보를 만들었어.’
마음이 하염없이 쓰리고 화가 났다. 하지만 저 사람이라면, 한껏 울상을 짓고 있는 저 바보를 썩 괜찮게 지켜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전히 그를 보면 무서운 충동이 들었다. 케케묵고 눌어붙어 온전히 없앨 수도 없는 종류였다.
하지만 이젠 그 충동의 연유를 알았다. 정체를 알면, 통제할 수 있었다.
오래된 망령의 원한. 대마녀 랜니스가 아무리 억울한 죽음을 당했어도, 클레멘츠 레스타 뒤싱겐이 선조 대신 목숨으로 갚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죽이지 않아, 황태자.’
적어도 그가 오필리어를 지킬 가장 강한 사람인 이상은, 살아 있어야 한다.
‘뭐라고, 안 돼! 죽여야지, 죽여야지! 뒤싱겐을 죽여야지. 이게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결심한 즉시 음산한 목소리가 반발했다.
그러나 벨라는 고개를 저었다.
평생을 숨어 속삭이던 그림자를 통제하기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살아 있는 것도, 몸을 가진 것도, 그런 고로 현재를 선택하는 쪽도 그녀였다.
‘내게 중요한 건 오필리어 레오라니까.’
‘…….’
침묵하던 망령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옆에 저 녀석이라도…….’
벨라는 옆의 그 녀석에게 눈을 돌렸다. 그가 흠칫거렸다.
“왜, 왜요.”
“2황자.”
“뭡니까! 또 나를 어떻게 괴롭히려고.”
메디프는 뒷걸음질 쳤다. 벨라는 바짝 붙어 쫓아갔다. 이윽고 메디프의 등에 둥지의 벽이 닿았다.
“무슨……!”
“저에게 죽어 보시겠습니까?”
청보랏빛 눈동자에서 동공이 확장되었다. 당황 너머에 또 당황이었다. 그러나 이 여자는 무슨 말을 해도 농담 같지가 않았다. 도저히 예측할 수가 없었다.
“내 면전에서 살해 협박을 한 여자는 당신이 처음이에요.”
한편, 이들이 전혀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벨라를 안은 메디프가 멋지게 둥지에 착지했을 때.
“어때요? 나 지금 좀 멋있어 보이지 않았나?”
그의 사냥복 재킷에서 마법 통신 기구가 굴러 떨어졌다.
툭, 뎅그르르-.
그러나 애당초 눈에 띌 만큼 큰 물건도 아니었으며, 다른 신경 쓸 일이 워낙 많아 아무도 깨닫지 못했다.
통신 기구를 떨어뜨린 건 오필리어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훨씬 전에, 봉마 의식 현장에서였다는 점이 문제였다.
마수도 황태자도, 이어서 새 모나한 백작에 2황자마저 훌쩍 날아 떠나 버리고, 남겨진 이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에.
한편의 땅바닥에서 치직거리는 소리가 났다.
“저건 뭐지?”
시선이 쏠렸다. 거센 바람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목소리가 섞여 나왔다.
“2황자 전하의 목소리다!”
- 어때요? 나 지금 좀 멋있어 보이지 않았나?
자신감인지 뭔지 모를 것이 넘치는 말투. 2황자 메디프가 틀림없었다.
“저, 저건!”
“마수!”
떨어뜨리면서 버튼이 눌려, 마수 둥지의 상황이 담긴 영상 역시 실시간으로 황궁 뒤뜰에 전송되었다.
봉마 의식 엔클레이오는 황족의 위엄을 세우는 동시에 귀족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는 자리.
단언컨대 이날만큼 그 목적을 충실히 달성시키는 엔클레이오는 없었다. 귀족들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영상을 보고 다 같이 충격을 받았다.
‘인기 스타이자 마스코트인 ‘레이디 오필리어’가 아까 납치된 레이디였어?’
‘그 레이디 오필리어는 정말로 아다만티스였다고?’
‘황태자 전하께서 뭘 소환하신 거지? 대악마 크렘시아라고?’
황실 근위대와 기사단이 한꺼번에 씨름해도 쉽게 무찌르지 못했던 마수였다. 그런 괴물이 너무도 쉽게 끝장났다.
‘심지어 저 강력한 대악마가 황태자 전하의 대모?’
놀라운 일이 일어날 때마다 입이 벌어져, 마지막에 가선 거의 턱이 빠질 지경이었다.
‘대체…!!’
최근까지도 지루할 틈이 없는 사교계였다.
하지만 이 모든 사실이 만천하에 밝혀졌으니, 당장 내일부터 수도에 무슨 폭풍이 몰아칠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었다.
불안한 시선들이 서로 엮여 가며 스멀스멀 기었다.
마스코트 오필리어를 지지하던 베일리스 가문.
따지고 보면 모든 혼돈의 씨앗을 던진 거나 마찬가지인 서부. 그 땅에 속한 가문들.
황태자의 수족인 듀프레 후작과 동부 세력.
2황자의 외가인 페리윙클.
마지막으로, 황제와 황비.
* * *
‘메디프, 기특한 내 아이.’
아들이 그 여자아이를 감싸며 대들 때만 해도 클라우디아는 불안했다.
혹여 독단적인 행동을 하는 건 아닌가. 여자앨 구할 잔꾀를 부리려는 거 아닌가.
하지만 결국은 모든 게 훌륭하게 맞아떨어졌다. 계획은 엇나갔지만, 클라우디아는 뜻을 이루었다.
오필리어 레오라는 마수 앞에 던져졌다.
귀족들을 돕고 레이디를 구출하러 날아간 2황자는 능력과 용기를 입증했다.
나무랄 데 없이 굴던 황태자는 여자 하나가 납치되었다고 지휘권을 내팽개친 채 뒤쫓아 갔다. 부적절한 행동이었다.
2황자는 마법사들과 함께 방어막을 치는 정도가 다였지만, 황태자에겐 현장의 모든 의무가 몰려 있었다. 그는 의식장에 남아 사태를 뒷수습하고 오필리어를 구할 수색대를 보내야 했다.
거기다 그는 악마를 소환했다. 모두가 그 사실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