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무지막지한 놈은 내 말은 듣지 않고 떠들어 댔다.
[뭐, 대신에 너를 건졌으니 됐지.]
[아니. 일단은 높이 쳐주는 것 같긴 하지만, 나는 그런 대단한 게…….]
[너를 잡아먹고 충만한 마력을 얻을 것이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내게 무슨 생난리가 일어난 건지 이제야 다 이해했다.
이번 세계에서 벨라는 마수를 불러냈다. 사슬에 묶인 마수들의 사념이 폭주하라고 등 떠미는 꼴이었으니, 클레멘츠를 죽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천운이었다.
마수에게 아다만티스는 마치 장어나 산삼마냥, 푹 고아 먹으면 수명이 늘어나고 시체도 벌떡 일어난다는 보양식인 모양이었다.
아직 아기 새라면 잡아먹기도 쉽고 살도 연할 테니 더 좋아하겠지. 그러니 냉큼 채 온 거다.
[오지 마! 콩알만 한 날 먹겠다니 이 파렴치한 놈아! 다가오지 마!]
[저항은 고통만 길게 만들 뿐이다.]
젠장!
숨어, 숨어야지. 아까 찾아 둔 딱 알맞은 틈이 있었는데. 어디 있더라? 이런! 지나치게 당황한 탓인지 잘 보이지 않았다. 마수는 코앞까지 다가오는데…….
그때 뭔가가 둥지로 휙 날아들었다.
“자, 우리 아기 새 양을 구하러 왔어요.”
메디프가 스태프 끝으로 둥지를 쾅 찍었다. 회오리바람에 그의 옷자락이 휘날렸다. 품에 안겨 있는 벨라의 머리카락도.
“어때요? 나 지금 좀 멋있어 보이지 않았나?”
그 말만 안 했다면 좀 멋있어 보였을 것이다.
메디프의 품에서 내려온 벨라는 나와 마수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세상에, 벨라!
“삐약!(너무 멋있어……!)”
하나로 땋아 내린 벨라의 검은 머리는 거센 바람에 많이 흐트러져 있었다. 그 뒷모습이 마치 꿈속에서 본 바와 같았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달랐다.
그땐 사람을 해치고 절망하고 있었다면, 지금은 살리기 위해 맞서고 있었다.
[감히 오필리어를 이 따위 더러운 곳에 데려와?]
낮고 강렬한 파장이 벨라의 목소리를 띠며 머릿속에 전해졌다. 벨라에게 이런 능력이 있었던가?
[말을 해도 못 알아듣는군. 랜니스의 망령이 씐 소녀야.]
[……!]
그리고 마수는 대체 왜 저러는지, 벨라의 위엄 있는 일갈에 아주 불손하게 응수했다.
저 자식, 저게 무슨 말버릇이지? 혼우드의 마수 여왕님도 못 알아보는 건가, 지금?
벨라에게 복종하지 않는 마수를 보자 내가 다 화가 났다. 한마디 하려고 발톱 끝에 힘을 주고 있는데, 벨라가 먼저 외쳤다.
“오필리어 건드리지 말라고 했다, 이 둔하고 한심한 쓰레기 새대가리!”
사람 말로.
[뭐…….]
벨라가 저렇게까지 험한 말을 하는 건 처음 봤다. 나도, 마수도, 구석에 찌그러져 있던 메디프도 굳어 있는 사이 벨라가 한 손을 들어 마수를 가리켰다.
“그리고 못생긴 주제에! 알에서 나온 뒤로 주어진 모든 시간을 하루하루 더 못생기게 자라는 데 쓴 것 같구나!”
“…….”
“네놈의 고기는 회를 쳐서 아무리 잘 볶아도 냄새가 나서 못 먹을 거다. 그 기름에 찌든 깃털을 뽑아서 접시를 장식하면 원수의 식탁에 던져 주기는 딱이겠네!”
“…….”
벨라는 말 그대로 길길이 날뛰고 있었다. 저렇게 화가 난 것도 처음 봤다.
그리고 사람은, 이 경우 듣는 쪽은 사람이 아니니 주어를 바꿔서, 지성체는- 비록 남이 못 알아들을 소릴 하고 있어도 그것이 자신을 모욕하는 말인 줄은 기가 막히게 알아듣는 법이었다.
낮의 벨라는 발톱도 이빨도 없는 소녀. 마수를 복종시키는 힘을 가졌지만 상대가 말을 듣지 않으면 제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저 마수는 황궁 뒤뜰을 침범해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수틀리면 랜니스의 목소리도 무시하고, 제 보양식으로 먹겠다고 남의 집 멀쩡한 귀한 딸을 납치하는 또라이였다.
“삐!(위험해!)”
내가 변신 주문을 외워 사람으로 돌아오는 것과 동시에, 마수가 발톱을 도사리는 게 보였다.
질끈 눈을 감으며 벨라를 끌어안고 반대쪽으로 굴렀다. 벨라가 서 있던 그 자리에 마수의 발톱이 날아와 꽂혔다.
가쁜 숨이 터져 나왔다.
“위험하게 왜 마수를 자극하는 거예요!”
메디프가 전개시킨 방어막이 우리를 단단히 둘러쌌다. 연이어 그는 스태프를 움켜쥐고 주문을 외웠다. 왼손을 움직이자 여섯 줄기의 낙뢰가 마수를 향해 내리꽂혔다.
“아니, 이런 능력이 있었으면서 왜 아까는…….”
“보면 몰라요? 지금은 무리하고 있으니 그렇지.”
그 말대로 메디프의 호흡은 눈에 띄게 거칠어져 있었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다.
“일단 둘 다 이리 붙어요. 텔레포트할 테니까.”
그가 속삭였다.
괴물 그 자체인 마수는 낙뢰 여섯 대를 맞고도 산이 흔들리는 비명을 지르며 살아 있었다. 몸부림을 멈추고 나면 다시 공격해 올 터였다.
“더 꼭 붙어 줄래요? 하나의 물체로 간주될수록 공간 수식 계산이 더 쉽거든요.”
나와 벨라가 양옆에 어색하게 붙자, 메디프가 힘겹게 말했다. 그러자 벨라가 중얼거렸다.
“혹시 무슨 사심이 있어서…….”
“하아…….”
그는 무거운 한숨을 쉬고 말했다.
“진짜 힘든 하루다…….”
동의했다. 하지만 나 역시 벨라와 같은 의혹을 품지 않았다곤 말할 수 없다. 이래서 사람은 평소 행실이 중요하다.
스태프에 박힌 마석에선 끊임없이 푸른빛이 일렁이고 터져 나왔다.
그때 무언가가 요란하게 나타났다. 반투명한 날개를 거세게 치면서 둥지 안으로 뛰어들었다.
동시에 그 날개처럼 반투명한 질료의 무언가가 흩날리는 깃털처럼 시야를 어지럽혔다. 이내 마수의 온몸 가득 낫으로 그은 듯한 상처가 생기며 검붉은 피가 솟구쳤다.
“키이익! 키에엑!”
마수가 고통스럽게 몸부림쳤다. 클레멘츠가 둥지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키에!!”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가니 마수의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잔뜩 화가 난 것만은 확실했다.
“……전하!”
어쩔 생각인 걸까. 불러 봤지만 그는 그저 차가운 눈으로 마수를 응시할 따름이었다.
이제 보니 그의 이마가 찢어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역시 추격전을 벌이다 다친 모양이었다.
그 상처를 본 순간 마음 한구석이 따끔거렸다. 벨라와 메디프를 보며 안정되었던 마음이 언제 그랬냐는 듯 불안하게 요동쳤다.
이미 그의 등장으로 메디프의 주문은 멈춰 있었다. 나는 그쪽을 향해 발을 떼었다.
“오필리어.”
메디프가 나무라듯 불렀다.
하지만 클레멘츠 혼자 여기 남겨 두고 셋이서 튈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벨라도 마찬가지 생각인 듯했다.
“저의 힘으론 이게 한계입니다, 뒤싱겐.”
낯선 목소리는 주의 깊게 듣지 않으면 바람 소리로 들릴 둣했다. 들려오는 방향은 클레멘츠 쪽이었다.
자세히 보니 그의 날개로부터 손바닥까지 빛으로 된 쇠사슬이 이어져 있었다. 익숙한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저 날개는 클레멘츠가 소환해 낸 존재로부터 빌린 모양이었다. 방금 전의 공격도 그 힘이고.
하지만 거대한 마수를 처치하기엔 아무래도 충분치 못한 듯했다.
아직 그에게 다가서려면 다소 거리가 남아 있었다. 클레멘츠는 숙였던 고개를 들어 마수를 쏘아보았다. 여전히 날 보지 않은 채.
여태 차갑다고 생각했던 그의 눈은 이제 보니 뜨겁게 타올랐다. 매끈한 입술이 움직였다.
어디선가 한 번은 들어 본 듯한 고대어 어구가 흘러나왔다.
그의 주변을 메우던 보라색 불빛이 더 강하게 타올랐다. 그러더니 선명한 장밋빛이 뒤섞였다.
성숙한 여성의 영롱한 웃음소리가 땅을 뒤흔들었다. 그 소리에 세상 무서운 게 없는 듯 굴던 마수마저도 움츠러들었다.
“기다리고 있었어, 언제 불러 주나.”
진심이 다닥다닥 붙은 목소리는 스산하게까지 느껴졌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대략 지켜보고 있었다고 하면 화내려나, 나의 뒤싱겐?”
붉게 물든 허공에서 피어나듯 모습이 갖춰졌다. 장미색 머리카락이 세차게 타오르는 불처럼 일렁거렸다. 승마복 같은 바지에 백합 모양의 레이스가 풍성히 달린 블라우스 차림이었다. 다리가 길고 당당한 몸에 정말 잘 어울렸다.
그녀는 날 발견하고 여유롭게 싱긋 웃어 보였다. 손에는 처음 소환됐을 때 들고 있던 복잡한 모양의 창을 쥐고 있었다.
“키익-!”
주춤거리고 있던 마수는 결심이 선 듯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오, 어딜?”
고아한 선을 그리는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지만, 그녀는 콧방귀조차 뀌지 않았다. 심지어 손에 쥔 창을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성난 기세로 휘두르던 마수의 한쪽 발이 그대로 잘려 날아갔다.
“……?”
한 발로 착지한 맹수가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근본 없게도 이 몸을 모르는 듯한 네게 소개를 해 주자면, 나는 장미 넝쿨에 깃든 영혼. 심장을 먹는 악마. 탯줄을 엉키게 하는 손.”
이명이 하나하나 말해질 때마다 마수의 신체 부위가 한 토막씩 잘려 나갔다. 저절로 아연해지는 광경이었다.
무자비하고 아름다운 눈은 악마다웠다. 악마, 크렘시아의 붉은 입술은 빠르게 나머지 이름들을 토해 냈다. 제대로 붙어 있는 곳이 없게 만들겠다는 듯한 태도였다.
“화성을 주관하는 핏빛의 이름, 마계의 붉은 태양, 전쟁광, 서열 5위의 붉은 마공작, 그리고- 사랑스러운 내 뒤싱겐의 대모이기까지 한 크렘시아에게 경배하여라!”
“……크아아!”
애석하게도 마수는 이제 경배 같은 걸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나는 슬쩍 손을 들어 참혹한 광경이 벌어진 그쪽을 가렸다.
“아무리 여리고 야들야들한 새끼 아다만티스를 먹고 싶었어도, 응? 상대를 가려야지. 오래 살려면.”
“크으윽!”
“나의 뒤싱겐이 지극-히 아끼면, 나 역시 그러는데 말이야.”
-대가를 치르럼, 어리석은 괴물아. 크렘시아는 그렇게 말한 뒤 섬세한 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