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아무리 친해도 이렇게 무작정 따라오는 거, 도움도 안 되고 민폐랍니다. 막말로 당신이 그 괴물을 무슨 수로 잡겠어요? ‘마브로스 아르팍티카’는 초대 때부터 있던 괴수인데.”
“내가 알아서 해.”
“어휴.”
일단 하나의 비행체가 되어 버린 벨라를 놓칠세라 꼭 끌어안았다. 속사포처럼 쏘아붙이면서도 시선은 줄곧 정면을 응시했다. 변화무쌍한 기류에 적응해 방향을 틀어 가며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그리고 말예요. 비행 마법 시전하는 사람에게 무작정 매달리는 거 정말 위험한 짓이에요. 나라서 망정이지. 예? 내가 유능한 마법사라서 망정인 거라고요. 갑자기 중량이 더해지면 부양력 계산에 변동이 생기기 때문에 잘못하면 추락할 수도 있어요. 내가 얼마나 귀한 아들인지 알아요? 당신은 또 어떻고? 어떻게 책임질 생각이었냐고요. 생각이 있긴 합니까?”
이렇게 말을 많이 한 적이 없는데. 메디프는 자신의 숨겨진 면모를 끌어내고야 마는 벨라의 행태에 안 좋은 쪽으로 감탄했다.
벨라는 듣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두고 생각했다.
‘정말 제멋대로네.’
* * *
춥다. 바람 소리가 시끄러웠다.
“흐으……!”
온몸이 얻어맞은 듯 아플 뿐 아니라 제멋대로 흔들리고 있었다. 눈을 뜨니 발밑으로 아득히 멀리에 울창한 숲이 보였다. 아찔한 광경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클레멘츠와 눈이 마주치고 얼마 안 돼서, 마수에게 낚아 채였었지. 이리저리 흔들려 대는 통에 정신을 잃었고, 지금은…… 토할 것 같았다.
“윽. 이것 좀……!”
억센 발이 내 몸통을 꽉 옥죄었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떨어질 일은 없겠지만 숨 쉬기가 힘들었다. 고도가 높다 보니 더욱 그랬다.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지?”
아니, 표현이 잘못됐는지도 모른다. 마수는 나를 데려가는 게 아니라 가져가고 있을 것이다.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사서 집으로 데려가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
그럼 그게 나의 끝인가?
미완결 소설에 빙의, 메인 커플 하나를 보고 8년간 살았으나 러브 라인은 공중분해. 저주를 당해 구르다가 조류형 마수의 둥지에서 새끼들의 좋은 영양분이 되는 것으로 생을 마감.
빙의물이라고 쳐도 욕먹고 쫄딱 망할 고어 전개였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픽션을 뛰어넘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아니야…….”
말도 안 되지. 어떻게든 살 수 있는 방법 없을까. 둥지 구석에 숨어 있다가 마수가 자리를 비우면 도망친다든가. 병아리로 변해서 새끼인 척한다든가.
그게 가능한 이야기일까? 그냥 지금 어떻게든 여기서 떨어지는 게 덜 고통스럽고 깔끔하게 죽을 수 있는 방법은 아닐까?
자꾸만 의지가 꺾이려고 하는 그때, 백 미터는 훌쩍 넘을 듯한 이 상공에 마수와 나를 제외한 비행체가 보였다. 너무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커다란 반투명 날개를 가진 새……가 아닌 사람이 빠르게 날아왔다. 놀랍게도 클레멘츠였다.
아니, 날개도 있었단 말이야? 탈인간인 줄은 알았지만 과연 그의 능력은 어디까지인가! 이젠 놀랄 만한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그가 마치 하늘에서 날 도우러 온 천사처럼 보였다. 마침 날개도 있고.
이 순간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은 하나뿐이었다.
“전하! 살려 주세요!”
그는 그야말로 눈썹이 휘날리도록 날아왔다. 거센 바람에 앞머리가 모조리 뒤집어진 모습이 어처구니없게도 잘생겨 보였다.
내 말을 들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눈이 마주친 것 같았는데, 그때부터 더 매서운 속도로 가까워졌다. 그는 험악한 얼굴로 뭐라고 외쳐 댔다.
“크에에에!”
거의 동시에 마수가 째지는 목소리로 울부짖더니, 공중 곡예라도 선보이듯 마구 요동쳤다. 내 금빛 머리카락이 확 뒤집히며 시야가 가려졌다.
방금 전까지 죽을 생각에 덜덜 떠느라 찍소리도 나오지 않았지만. 클레멘츠를 보고 나니 비명도 지르고 마수에게 욕도 할 수 있었다.
“꺄아악! 이 미친 자식아! 운전 똑바로 안 해?”
하지만 그야말로 발악이었을 뿐, 마수는 나의 항의를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오히려 더 난폭해졌다.
아마도 바짝 추격하는 클레멘츠를 따돌리려는 것 같았다. 클레멘츠도 덩달아 공중곡예를 선보이며 따라붙었고, 마수는 현란하게 움직이며 그를 피해 달아났다. 숨 막히는 쫓고 쫓김 사이에서 나는 진짜로 숨이 막혀 버렸다.
다시 기절했다가 깨어났을 때는 마수의 둥지였다.
“으…….”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역시나 잘 움직이지 않는 몸을 일으키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머리가 핑 돌았고, 멀쩡한 구석이 한 군데도 없었다.
역한 냄새가 풍겼다. 손에 뭔가 덜그럭거리는 게 닿았다. 뼈였다.
“으!”
하얗게 말라비틀어진 저것이 부디 사람의 것이 아니기를 간절히 빌었다. 문득 속이 뒤집혔다. 굵은 나뭇가지와 통으로 벗겨 낸 나무껍질로 되어 있는 둥지의 벽을 붙잡고 밖에 게워 냈다.
문화 시민의 마지막 양심으로 거주지 바깥에 처리한 것도 있지만, 혹시라도 토사물이 쏟아진 곳에서 생을 마감하는 건 싫으니까.
“키이이익.”
“하…….”
커다란 둥지에 마수와 나, 둘뿐이었다. 클레멘츠는 끝내 쫓아오지 못한 모양이다.
그렇다면 돌아간 걸까? 격하게 움직이던데, 어디 다치지는 않았겠지?
……혹시 다시 오지는 않을까? 잡아먹히기 전에 클레멘츠가 날 찾는다면, 살 수 있을 텐데.
“저 닭대가리…….”
그러고 보니 어딘가 익숙하게 생긴 닭대가리였다. 어디서 봤더라? 곰곰이 생각해 보니, 메디프가 도서관에서 보여 준 마수 백과에서였다.
이름이 분명…….
“마브로스…… 무슨 팍…….”
앞부분만 기억하면 됐지. 유해 조수 주제에 나보다 이름이 길다니.
서식지가 근방일 때부터 뭔가 불안하다 했다. 뭐? 마력 흐름이 안정돼서 이젠 좀처럼 안 나와? 인간들 사는 곳에 함부로 안 찾아와?
메디프 황자 이 사기꾼 같으니……!
여기서 괘씸해한다고 살아 나갈 방법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애써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상상과는 달리 둥지에 새끼들은 없었다. 생각해 보니 저렇게 큰 마수의 새끼라면 분명 엄청 클 텐데, 평범한 병아리인 내가 섞여 있는다고 감쪽같진 않을 것이다.
어떻게든 살아날 방법은?
“키이이익! 키에엑!”
아, 저 마 무슨 팍은 시끄럽게 왜 자꾸 저런담? 생각하는 데 방해되게.
“크르르…….”
뭐 바로 잡아먹겠다고 덤비지 않는 건 다행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내가 살아남는 데 도움이 될 테니까.
옛말에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다. 어쨌든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우선은 병아리가 되는 거다.
먼저 저 마수로서는, 내 모습이 갑자기 변하면 당황할 것이다. 지능이 얼마나 높은진 모르겠지만, 우선은 실한 먹잇감이 사라졌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게다가 병아리는 같은 조류에 속하지 않나. 공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만일 공격한다면, 작은 병아리인 상태로는 숨을 곳이 더 많았다.
얼기설기 얽힌 둥지였다. 모습을 바꾼 내가 들어갈 수 있지만, 마수의 커다란 부리와 발톱은 밀어 넣을 수 없을 만한 틈이 많았다.
“키르르륵!”
놈이 마지막으로 달려들기 전.
“황금색 송이버섯!”
펑.
회심의 변신을 시도했다. 익숙한 빛에 감싸이며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둥지 위에 내려앉았다. 숨을 곳으로 튈 타이밍을 노리며 마수 쪽을 봤는데…….
[드디어 본모습으로 돌아왔군.]
에…… 뭐? 뭐라고?
[도무지 내 쪽을 보지 않기에, 혹시 알아듣지 못하는 건가 했다.]
뭔 소리세요?
플랜 A(일단은 같은 조류니까 보호해야 할 새끼인 척해 본다.)와 플랜 B(작은 병아리 몸집을 이용해 둥지 사이에 숨어 있는다.). 그 어느 쪽도 실행할 수 없었다.
마수와 말이 통했다. 그러고 보면 흑표범이 된 벨라와도 병아리일 때 말이 통했었다.
그건 그렇다 치는데 이쪽이 내 본모습이라니? 엄청난 오해였다. 아까 시끄럽게 굴던 게 다 말을 건 거였나? 잠든 사이 잡아먹지 않은 이유도, 새 모습으로 바뀌길 기다린 거고?
어떻게 내 비밀을 알아챈 건지 궁금했지만 이건 긍정적인 신호였다. 날 잡아먹지 않을 생각일 수도 있으니까.
[이제야 내 발톱 아래 들어왔구나.]
하지만 마수의 다음 말엔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다만티스여.]
[뭐?]
마수는 낮고 소름끼치는 소리로 웃었다. 사람일 땐 그저 듣기 싫은 소음일 뿐이었지만, 알아듣고 나니 웃음소리였다.
전설 속의 신수. 클라티아의 상징이며 초대 황제의 건국을 도왔다는 아다만티스.
[아다만티스? 그게 왜 여기서 나오는데?]
[뭐?]
이번엔 저쪽에서 어리둥절해했다.
[크하하. 이거 우습군. 아무리 새끼라지만, 제 정체도 모르고 있는 신수라니.]
[아니, 대체 뭔 소리냐고.]
[네가 아다만티스란 말이다, 병아리!]
내가 신수라는 것까진 메디프의 견해와 일치했다. 더 나아가 아다만티스일 수도 있다고 했지만, 어디까지나 근거 없는 추측일 뿐이었다. 난 침착하게 답했다.
[잘못 본 거 아닐까?]
마수는 몸을 일으키고 사자를 닮은 두 발로 걸어왔다.
[잘못 봤을 리가. 첫눈에 알았다. 울음소리부터 넘실거리는 마력. 다른 종(種)은 생각할 수 없지.]
아니 물론, 목소리에 마력이 있긴 한데 그게 그렇게 되나?
[랜니스, 그 오래된 주인의 힘이 느껴져서 가 봤더니 빈껍데기만 남은 영혼이었어. 알맹이는 다른 걸로 차 있더군. 연약하고, 쓸모없는 것으로.]
[뭐? 너, 네가 우리 벨라를 언제 봤어? 네가 뭘 안다고.]
무지막지한 마수 눈에는 연약하고 쓸모없어 보일지 몰라도, 그 부분이 바로 내 친구 벨라루시아 모나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