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조건이 까다롭다 보니 캐스팅은 쉽지 않았다. 클레멘츠는 제 뒤에서 열심히 주문을 외우는 황궁 마법사들을 차가운 눈으로 쏘아봤다.
‘쓸모없는 것들.’
그는 충동적으로 옆의 기사단장이 들고 있던 활을 빼앗았다. 재빨리 목표를 조준하는 동작엔 군더더기가 없었다.
한 방에 떨어뜨릴 수 없다면 오필리어를 더욱 위험하게 만들 뿐이었다.
괴수는 일정한 고도에서 위치를 바꾸지 않고 날개를 쳐 댔다. 어딘가를 주시하고 있었는데, 방향은 벨라루시아 모나한이 있는 곳이었다.
머리를 맞히면 발톱의 힘을 풀 것이다. 그 순간 클레멘츠는 다소 멀리 떨어져 있던 이복동생과 눈이 마주쳤다. 형제간에 실로 처음으로, 눈짓 하나로 의견이 오갔다. 메디프가 떨어지는 오필리어를 받아 낼 것이다. 클레멘츠는 화살을 날렸다.
그러나 마수는 기민하게도 눈치채 급소를 피했다. 그러곤 여자를 매단 채로 그대로 날아가 버렸다.
거대한 날개가 일으킨 바람이 한동안 가라앉지 않았다.
오필리어가 납치되는 모습을 눈뜨고 지켜봐 버렸다. 클레멘츠는 잠시 동안 멍청하게 서 있었다.
멍청히 서 있는 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어떡하냐는 시선들이 하나둘씩 황태자를 향했다.
클레멘츠는 단검을 꺼내어 손바닥을 그었다.
“저, 전하!”
피가 콸콸 치솟으라고 냅다 칼날을 세워 대는 행동에 주변은 경악했다. 그의 눈빛은 무언가에 사로잡힌 듯 다른 것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뭐, 뭐 하시는 겁니까! 그만두십시오!”
기사단장이 소리쳤다. 술렁임이 퍼져 나갔다. 그러나 황가의 구성원들만큼은 그가 뭘 하려는 건지 알고 있었다.
‘클레멘츠 놈…….’
가장 안전한 안쪽 공간에서 호위를 받고 있던 황제는 아들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모든 것을 주도한 황태자에게 이제 와서 불호령을 내리긴 우스운 위치였다.
그래서 황제는 뒤에서 조용히 떨었다.
18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그때 클레멘츠가 불러낸 악몽이 선명히 기억났다.
“왜, 왜 우는 거니? 나의 뒤싱겐. 이들은 너의 적이 아니었어?”
황궁 한구석이 피바다였다. 시종들도 호위들도 종이 인형처럼 나가떨어져 죽어 있었다. 그 아수라장 한가운데, 자지러지게 우는 여섯 살의 황태자를 키 큰 여자가 달래고 있었다.
여자? 그것은 악마였다.
‘설마 그때 그것을 또 부르려는 건가?’
무정물을 보듯 그를 응시하던 장밋빛 눈동자가 생각날 때면 황제는 아직도 오금이 저렸다.
그 일이 있은 후로 황태자는 단 한 번도 공개적으로 소환을 한 적이 없었다.
스스로 어긴 적이 없는 규율이 한순간 깨졌다. 한두 사람도 아니고 귀족들 전부가 보는 가운데, 그의 입술이 열렸다. 소름끼칠 정도로 정확한 고대어 몇 줄이 읊어졌다.
손바닥에 흐르는 선혈로부터 주변을 환히 밝히는 빛이 뿜어졌다.
“무슨……!”
대낮에 때아닌 먹구름이 뒤덮여 깜깜하던 차였다. 귀족들도, 황가의 일원들도 경악과 감탄에 휩싸여 그 찬연한 보라색 빛을 관망했다.
이윽고, 황태자의 앞에 밀도 높은 공기로 만들어진 듯한 여인이 무릎을 꿇었다. 전신이 투명한 하늘빛이었고, 독수리의 것을 방불케 하는 날개가 달려 있었다.
“뒤싱겐, 명령을.”
반쯤은 바람 소리와 구분되지 않는 목소리. 공기 여인의 목에 채워진 사슬은 클레멘츠의 손바닥과 연결되어 있었다. 빛으로 되었고, 피로 이루었고, 또한 언약으로 만들어진 사슬이었다.
황태자가 신비로운 여인과 함께 날아가 버린 뒤, 봉마 의식 현장은 기묘한 침묵에 감싸였다.
“방금 그건…….”
대체 뭐였지?
순식간에 위기감을 잃은 귀족들이 웅성거렸다. 누군가가 말했다.
“예로부터 황가의 피엔 마물을 부릴 능력이 내려온다고 했지. 그걸 쓰신 것 아니겠는가.”
“그럼 아까 그게 마물이란 건가?”
수군거림은 더 심해졌다. 하위 분야에 소환술이 속한 적마법과 흑마법은 자취를 감추다시피 한 시대였다. 당연히 마물을 실제로 본 이들은 없었다.
공기로 만들어진 듯한 여인은 신비로운 모습이었다. 당당한 날개와 부드럽고 강한 자태는 사악한 존재라고 딱 잘라 단정 짓기 어려웠다.
그리고 붉은 피 자체에서 쏟아져 나오던 그 순수한 힘이라니. 뒤싱겐의 상징과도 같은 보라색 빛. 강하고 신비한 마물이 구속되어 있음을 명확히 보여 주는 사슬.
청마법으로 온갖 잔재주를 부려 그린 봉인진보다도, 방금 전 모두가 보았던 그 모습이 ‘마족을 봉인한 대마법사 뒤싱겐’이란 이미지를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황가는 왜 그동안 이렇게 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숨긴 거지?’
의문에 찬 시선들이 황제와 황비 쪽을 향했다. 드물게 위축된 듯한 모습을 보이는 황제는 낯설었다.
매년 봉마 의식 때면 황제는 귀하디 귀한 제 피를 내어 봉인진 위에 몇 방울 떨어뜨렸다.
그러면 그 피를 흡수한 봉인진 전체에서 은은한 빛이 났다. 쇠사슬에 묶인 채 봉인진 위에서 비명을 지르던 마수들은 그 빛에 휩싸여 사라졌다.
그러나 그것이 황궁 마법사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쇼라는 것쯤이야,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황태자가 보여 준 능력이 현 황제에게 있었다면, 그는 이미 몇 번이고 그것을 내보여 쉽게 경외심을 이끌어 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비의 힘이 그 아들만 못하다는 것 아니겠는가.
약삭빠른 귀족들은 이미 판단을 마쳤다. 그들의 시선 속에서 황제는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한 굴욕감을 느꼈다.
평소처럼 위엄 있게, 큰 목소리로 호령해 봤자 본전도 얻지 못하리란 걸 그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불손한 눈길들을 외면하는 것뿐이었다.
황제, 코넬리우스의 손이 미약하게 떨렸다.
“전하와 그 레이디를 찾으러 가야 합니다.”
한편 시급한 문제에 주의를 기울인 이들도 있었다. 기사단장이 호소했다.
“하지만 어떻게 합니까?”
어디로 갔는지도 모른다. 또한 그들을 따라간다면, 그 무시무시한 괴수를 다시 만나야 한다는 건데. 상대하기 충분한 병력을 어떻게 그곳까지 움직인단 말인가.
더군다나 비행 마법을 안정적으로 구사할 수 있는 마법사는 이 자리에 드물었다. 그들은 자연히 유일한 희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탑의 인정을 받은 마법사, 2황자에게.
메디프는 그들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이미 비행 마법의 마지막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괴수와 괴수를 쫓는 황태자가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에 주문을 완성해야 했다.
기껏해야 준비해 둔 마수가 문제를 일으키고 진흙탕 같은 황권 다툼이 촉발될 줄 알았지, 일이 이렇게 튈 줄 대체 누가 알았겠는가.
‘따지고 보면 내 잘못이겠지.’
오필리어 양에게 통신 기구를 전해 준 게 걷잡을 수 없는 결과를 냈다. 아무리 어머니의 명이 있었다 해도 직접 실행한 건 그였다.
‘사실을 알게 되면 그녀도, 형님도 날 용서하지 않을 거야.’
자조적으로 내리깔던 눈을 똑바로 떴다. 캐스팅을 마치고 스태프를 땅으로 내려찍자, 시전자의 주문에 응해 모여들던 마력이 반동을 일으키며 회오리를 만들었다.
그의 발이 땅을 박차려던 순간, 누군가가 안겨 들었다. 메디프는 할 말을 잃은 채 그녀를 노려보았다. 확실한 출력으로 전개된 마법에 의해 두 사람은 이미 상공에 떠 있었다.
푸르고 아름다운 두 눈은 무심했다. ‘무슨 문제라도?’라고 묻는 듯한 표정은 기가 막혔다. 메디프는 가까스로 소리쳤다.
“위험하게 이게 무슨 짓입니까!”
벨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감히 제 말을 안 듣는 건방진 덩치 녀석이 오필리어를 납치해 가고, 황태자는 그 특유의 술법을 이용해 뒤쫓아 갔다.
하지만 그녀는, 제 몸으로선 날아가 버린 이들을 따라갈 방법이 없었다. 흑표범 쪽도 날개가 없긴 마찬가지였다.
그런 와중에 메디프가 유일하게 비행 마법을 시전하고 있었으니, 벨라로서는 당연한 행동을 취한 것뿐이었다.
“오필리어를 구해야 하니까.”
“……오필리어 양과 아는 사이예요?”
벨라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감히, ‘나도 오필리어와 친한데 그쪽도?’라고 하는 것 같지 않나.
그 애에겐 자신이 먼저일 게 분명했다. 이런 수도에서 어쩌다 만난 한량이 아니라.
“말조심해. 그 아이는 내 거야.”
“하하하…….”
메디프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쪽이 활을 잘 쏜다는 건 알겠는데요. 꽤 패기도 있으시다는 것도 알겠고.”
첫눈에 그녀를 너무 약하게 봤다는 점은 인정했다. 제국군에 적을 둔 웬만한 수도 귀족들 이상의 맹활약이었다. 실제로 화살 한 발로 멧돼지를 잡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방어진을 구축하며 사람들에게 물어본 바로는, 혼우드의 새 백작이라 했던가.
“……가만, ‘모나한 백작 영애’가 당신이었어요?”
“날 알아?”
“오필리어 양이 당신 이야길 했어요.”
벨라의 경계하던 기색이 한순간 누그러졌다.
“오필리어가…….”
오필리어가 한사코 부르짖던 친구이자 주군이 이런 여자였다니. 메디프는 도서관에서 오필리어가 두 황자를 모두 고사하고 그녀를 고르겠다고 했던 말을 굳이 전하지 않기로 했다. 왠지 속 쓰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오필리어를 낚아채 올린 마수는 잠시 동안 벨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메디프는 둘 사이에 오가는 마력의 파장을 느꼈다. 그사이 마법사들은 캐스팅할 시간을 어느 정도 벌 수 있었다.
그녀가 미지의 능력을 가졌다는 것도 인정했다. 그러나 결국 그걸론 부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