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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118)화 (118/218)

118화

“그랬구나.”

어째서 처음 본 순간부터 그토록 그를 파괴하고 싶었는지, 이제 온전히 이해했다.

‘랜니스’는 뒤싱겐에게 죽었다. 그냥 죽은 게 아니었다. 무참히 도륙당하고 시신은 매달려 능욕당했다. 그래서 누대의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그 가문의 피를 원했다. 마땅한 복수였다.

심장을 관통시켜 붉은 피를 내어 보자.

‘그래! 죽여, 죽이라고!’

사냥용 장갑을 낀 손가락이 시위를 놓으려던 순간이었다.

옆에서 불쑥 튀어나온 손이 활을 잡아챘다. 작고 익숙한 손이었다.

“벨라!”

벨라는 거친 숨을 터뜨렸다.

‘내가 무슨 짓을……?’

오래 사로잡힌 악몽에서 벗어나듯 현실로 돌아왔다.

“나는…… 나는 누구지?”

‘랜니스. 대마녀라 불린 가엾은 원령. 마수들의 왕…….’

흐느끼는 듯한, 혹은 광기 어린 웃음 같은 목소리가 바로 뇌리에서 대답했다. 하지만 곧바로 다른 이름이 그것을 쳐냈다.

“벨라루시아 레우니스 모나한!”

둥그런 황금빛 눈이 걱정을 담아 그녀를 쳐다보았다. 늘 그랬듯 감정이 넘치도록 담겼다. 우스운 것도, 천한 것도 아니었다.

“괜찮아?”

오필리어는 옷소매로 벨라의 이마를 닦았다. 벨라는 조금 뒤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야. 너무 늦지 않아서.”

“어째서 여기 있지? 황태자궁에서 보호받는 게 아니었어?”

“빨리 천막으로 가.”

“여기 나와서 뭘 하고 있는 거야!”

그리고 둘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마수가 쾅 하고 땅을 내리찍었다. 그 바람에 두 소녀는 멀리 떨어졌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람.’

결국 이번에도 벨라가 클레멘츠를 죽일 뻔했다. 모두가 소란에 정신없어 그녀가 누굴 겨누는지 보지 못했다.

벨라는 고통스러워하는 마수들의 목소리를 들었으리라. 그리고 원작에서 그랬듯이 클레멘츠를 살해하려는 마녀의 충동에 사로잡힌 것 같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늦지 않게 막을 수 있었다. 오필리어는 이제 또렷해진 눈빛으로 달려가는 벨라를 힐끗 확인했다.

‘원작과는 다른 전개야.’

저런 야생 마수가 튀어나온다는 전개 따윈 없었다.

오랫동안 같은 자리에 있을 틈은 없었다. 그녀 역시 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는 누군가의 활과 화살 통을 들고 내달렸다.

“일어나요!”

젊다 못해 어린 소년이 주저앉아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다리의 힘이 풀린 모양이었다.

울먹이는 소년 귀족의 손을 잡아끌고, 기사들이 방어진을 쳐 둔 가장 가까운 곳으로 움직였다.

“오필리어!”

그들의 주변에 희끄무레한 방어막이 쳐졌다. 어디선가 조달받은 마석 스태프를 쥔 메디프가 소리쳤다.

“나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왜 여기 있어요?”

나오지 말라는 말은 진심이었다.

비록 그녀가 나오게 만드는 간계를 꾸며야만 했어도, 그녀가 다치지 않길 바랐다.

오필리어가 의식장에 나타나더라도 다치지 않도록 지킬 방법들을 생각해 두었다. 최선은 만에 하나라도 그녀가 제 말을 듣고 얌전히 방 안에 있는 거였다.

“그런 소리를 듣고 어떻게 안 나오나요?”

오필리어로서도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실제로 서둘러 달려오지 않았더라면 너무 늦을 뻔했다.

어쨌든 메디프는 오필리어가 데려온 소년을 부축했다. 잡으려 하기 무섭게 오필리어는 등을 돌려 뛰어갔다.

조그만 주제에 발은 엄청 빨랐다.

‘젠장.’

메디프는 속으로 오늘 몇 번째인지 모를 욕설을 내뱉었다. 왼손을 움직여 그 조그만 여자의 주변에 두 겹의 방어막을 덮어씌웠다. 최소한의 보호 절차였다.

“괜찮아요. 곧 잡힐 거예요. 외따로 떨어져 있으면 표적이 되기 쉬워요.”

갑작스러운 상황에 우왕좌왕하는 이들이 많았다. 오필리어는 쪼르르 달려가 그들을 달래어 방어진 뒤로 넣는 일을 반복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커다란 마수의 몸에는 창과 화살, 마력 화염구가 날아가 박히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서 벨라가 누구보다도 침착하고 신속하게 화살을 박아 넣었다.

오필리어는 가장 치열한 분투가 일어나는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황제 부부와 고위 귀족들을 겹겹이 둘러싼 기사단 사이에 클레멘츠가 있었다. 공격과 방어를 총지휘하는 그의 얼굴은 어두웠다. 지원 병력이 생각보다 늦었다.

“클레멘츠.”

곁으로 달려가서 힘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또 그녀의 위치는 그럴 만한 형편이 아니었다.

그때 클레멘츠가 정확히 그녀가 있는 곳을 응시했다.

‘……!’

거리는 멀지만 눈이 마주쳤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동시에, 클레멘츠의 평정은 무너져 내렸다.

그는 제 곁에 있던 기사단장을 향해 무언가 소리를 지르며 오필리어를 가리켰다.

오필리어는 움츠러들어 뒷걸음질 쳤다. 자신도 돕고 싶었고, 끔찍한 일이 일어나는 걸 막고 싶었다. 특히 그가 죽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두 여기서 고군분투하고 있는데 혼자 편히 과자나 먹고 있으라니 어불성설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다들 화를 냈다.

“-야, 이 바보야!!”

잠시 멍해졌던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저 성난 목소리는 벨라의 것이며 ‘바보’란 자신을 가리켰다.

하지만 벨라의 얼굴 대신 보이는 건 까맣고 큰 그림자뿐이었다.

* * *

오필리어가 마수의 발톱에 채였을 때, 그녀만큼이나 모여 있던 다른 이들도 심하게 당황했다.

거대한 흉수가 난동을 부리는 것까진 적응했지만, 사람을 채 갈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몇몇 사람들에겐 그녀가 눈에 익었다. 메디프 전하와 춤을 추던 영애. 최근 황태자 전하와 함께 있던 모습이 많이 보이던 아가씨. 혹은 칼로카이리 축제에서 그녀가 부른 노래를 기억하는 이들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바지런히 뛰어다니며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애쓰던 소녀였다.

“누, 누가 저분을 구해 주세요!”

오필리어가 처음 피신시킨 귀족 소년이 외쳤다.

“오필리어!!”

천막을 걷으며 나오던 카밀 드 베일리스가 절규했다.

카밀은 천막 안에 있던 노약자들을 달래고 진정시켰다. 덧붙여 천막의 한쪽을 비워 가벼운 부상자들의 치료소로 쓸 수 있도록 지휘했다. 귀족파 대표의 후계자에겐 누구나 그런 일을 기대하는 법이었다.

바삐 움직이다가 잠시 동태를 살피러 나오자마자 본 게 저 꼴이었다. 크고 흉측한 괴물에게 잡혀 있는 걸 보니 더욱이 가녀리고 작은 아이였다.

카밀은 힘이 풀리는 다리를 다잡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정말 유감스럽게도 이럴 때 그녀가 직접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뭐라도 해요! 진짜 뭐든 해 보란 말이야.”

기가 막혀서 호소하던 카밀은 어떤 여자에게 대뜸 소리쳤다. 훌륭한 활을 가지고 있음에도 쏘지 않는 여자가 답답하고 원망스러웠다.

멍하니 서 있던 그 여자가 돌아보았다. 서늘한 푸른 눈에 카밀은 순간 멈칫했다. 그녀는 이내 다시 정면을 보는 멍한 상태로 되돌아갔다. 소 닭 보는 듯한 태도에 카밀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벨라는 나름대로 마수와 대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그 아이는 내 거야. 당장 내려놔.]

내 것.

황태자와의 내기에서 졌어도, 주종 관계는 해약됐어도. 변함없이 오필리어 레오라는 그녀의 것이었다. 그녀의 친구였고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었다.

[내 몸에 쇠와 막대기를 박아 넣는 데 합세했으면서 명령하는 건가?]

분노한 마수가 울부짖자 한차례 매서운 바람이 불었다.

[나는 ‘랜니스’야. 그러니 넌 내 말을 들어야지.]

[…….]

꿈속의 더럽고 끔찍한 그림자. 랜니스의 흔적은 벨라를 다른 세상과 교감하게 해 주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를 더더욱 고립시키고,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르게 만들었다.

그것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없음을 이제는 알고 있었다. 되고 싶지 않았다.

오필리어의 말이 맞았다. 그녀는 벨라루시아 레우니스 모나한이었다. 과거의 그 기억은, 그녀가 아니었다.

하지만 오필리어를 안전하게 되찾을 수만 있다면. 랜니스의 행세를 할 수도 있었고 잠시 동안 진짜 랜니스가 될 수도 있었다.

[확실히…… 너의 영혼은 랜니스와 비슷하다. 마기도 충만해. 그러나…….]

하지만 그걸론 부족했다. 이 마수는 벨라가 혼우드에서 만나 왔던 것들과는 달랐다. 더 크고 강하고, 오래 묵어 능수능란했다.

[나와 대화하는 것 말곤 능력이 없군. 랜니스도 능력이 없는 상태론 그저 늙은 인간 여자일 뿐이었다.]

거기까지 말했을 때 화살 한 대가 마수의 머리로 날아왔다. 마수는 휙 움직여 급소를 피하곤 더 높이 날아올랐다.

넋을 잃은 사람들 위를 빙글 돌다가,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빠른 속도로 날아가 버렸다.

정신을 잃은 단발머리 여자를 발톱에 쥐고, 이토미아 산을 향해.

“왜들 멍하니 있냐고요! 그러려고 기사가 됐어요?”

카밀은 답답한 마음에 활을 든 기사의 어깨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베일리스 영애, 그, 그게…….”

당황한 기사는 머뭇거리다가 클레멘츠를 바라보았다.

“쏘지 마라. 쏘는 시늉이라도 했다간 베어 버리겠다.”

오필리어가 맞을 수도 있는데, 미치지 않고서야.

클레멘츠야말로 미칠 것 같았다. 그녀가 허공에서 무력하게 흔들리는 걸 보는 시시각각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당장이라도 저 마수를 찢어 죽이고 싶었다.

“마법사들은 아직인가?”

피격 대상을 마수로 고정시킨 공격 마법을, 출력을 크게 해서 날린다면 오필리어를 놓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녀가 떨어지면서 다치지 않도록 기류 역시 정교한 조절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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