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만약 인간 모습일 때도 변신했을 때처럼 많은 목소리가 들렸다면, 벨라는 진작 미쳐 버렸을지도 몰랐다. 지금처럼.
소리가 되다 만 파동들이 뒤엉킨 실타래처럼 머릿속을 굴렀다. 들리는 것보다 훨씬 거칠고 절박한 것들이 뇌수를 득득 긁었다. 비명처럼.
‘괴로워. 그만……!’
그녀는 몰아치는 파동들을 다잡기 위해 발버둥 쳤다. 스스로도 알지 못하던 감각들을 아낌없이 사용했다.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마침내 벨라는 선명히 들을 수 있었다.
[어머니?]
“……갑자기 흐려지는데요……. 바람도 세게…… 어쩌면 의식이…… 겠어요.”
벨라는 메디프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두리번대다가 검은 천이 덧씌워진 마차들을 정확히 응시했다. 소리는 거기서부터 들려왔다.
[나는.]
그녀는 입을 열지도 않고 성대를 울리지도 않은 채로 온전한 언어를 내뱉었다. 이 말이 ‘목소리’들에게 닿으리란 걸 확신했다. 아주 오래전의 자신이 이 방식으로 말했었단 것도.
벌집을 걷어찬 것처럼 웅웅대는 울림이 쏟아졌다.
[어머니 같은 분이 왔어. 당신은 누구세요?]
[우리를 구해 주세요. 당신의 생각을 느꼈어요. 큰 짐승을 찾고 계셨죠.]
[큰 짐승을요. 우리가 힘껏 부르고 있어요. 그가 우리와 당신을 구하게 하세요.]
[당신의 이름을 알려 주세요.]
인간으로서의 이름은 예로부터 ‘목소리’들에겐 아무 의미도 없었다.
벨라는 불리던 대로 대답했다.
[랜니스.]
온갖 소리에 터질 듯 공명하던 머릿속은 소강상태가 찾아온 듯 고요해졌다. 머릿속의 소리에 비하면 혼란에 빠진 사람들의 소요는 오히려 조용했다. 하늘이 빠르게 어두컴컴해졌다.
“이봐요, 정신 차린 거 맞아요?”
메디프는 인형처럼 미동 없는 벨라에게 거듭 소리쳤다. 별안간 그녀를 중심으로 어떤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흡사 환형동물의 꿈틀댐같이 치밀하고 소름끼쳤다.
벨라는 고개를 들어 메디프의 어깨 너머, 황궁 후원과 이어진 깊고 아득한 숲을 올려다보았다. 그로부터 솟아오른 검은 점이 점점 커지기 전에.
그녀는 새가 날개를 쳐 오는 소리를 들었다.
* * *
중대륙 곤드와나의 북단, 클라티아 제국의 수도 클랏샤. 북면에 항구를 둔 평지의 도시였다. 동쪽으로 넘어가면, 어디서나 깎아지른 듯한 바위 절벽을 찾아볼 수 있는 험준한 지형의 동부가 나왔다.
그 사이, 평지인 수도와 산지인 동부를 이어 주는 산이 있었다. 규모만큼 울창한 숲이 있는 이토미아 산은 서남쪽 끝으로 황궁의 후원과 이어졌다.
간혹 깊은 산을 타고 내려온 짐승이 황궁까지 침범할 때도 있었다. 혹은 범죄를 저지른 죄수가 산속으로 도망치기도 했다. 그들 중 더러는 산속을 헤매다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고, 일부는 아주 찾지 못했다.
수도 사람들은 이토미아가 무엇을 품었는지 다 짐작할 수 없었다. 하물며 초대 황제 시절부터 있었을 법한 거대 마수라도.
“저게 뭐야!!”
사람들은 경악했다. 닭의 머리와 사자의 발톱을 지닌 검은 새였다. 허공에 떠 있을 때는 땅에 큰 그늘이 졌다. 날갯짓이 만드는 바람에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
의식에 사용할 마수가 탈출했나? 마수 우리가 실려 있는 검은 마차 쪽을 봐도 이상은 없었다. 더구나 저렇게 거대한 것을 가둘 만한 우리는 없었다.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저 마수는 황실이 준비한 게 아니었고, 이건 사고였다.
무슨 조화인지 급작스럽게 어두컴컴해진 하늘 역시 공포감을 부추겼다.
비명 소리가 오갔다. 마수는 봉인진 근처에 착지해 두리번거렸다. 사람들이 난리를 피우자 그에 더 자극된 듯 성난 몸부림을 쳐 댔다.
이런저런 기물이 날아가고 쓰러졌다. 귀족들은 흉악한 발톱 아래 깔리지 않기 위해 달렸다. 그러다 희번득한 눈알과 마주치면 공포에 질려 주저앉곤 했다.
“황제 폐하와 황비 전하를 보호하라!”
모두가 패닉에 빠져 있는 시간은 잠시였다. 황태자가 검을 뽑아 들고 명했다.
대기하고 있던 기사단은 금세 대열을 갖추었다. 황제 부부의 안전을 확보하고, 흩어진 귀족들을 대피시키며 점차 마수를 포위해 갔다.
다만 기사단의 평상시 무장으로는 공중을 오가며 난리를 부리는 날개 달린 마수를 수월히 상대할 수 없었다. 클레멘츠는 활을 가진 자와 마법사를 한곳으로 모으라고 명했다.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아직 숲속에 있는 이들도 있고, 현장에서도 정신을 차리고 대응하는 이는 소수였다.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이냐. 저게, 저게 갑자기 무슨…….”
기사에게 끌려오듯 대피한 황제조차 겁에 질려 있었다. 그의 팔을 달래듯 쥐고 있던 황비는 냉정한 눈으로 조금 떨어진 난장판을 응시했다.
‘무슨 일이지?’
흉한 것의 발톱에 봉인진은 이미 원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계획대로라면 분위기가 가장 장엄할 때, 의식의 정점에서 메디프가 키우고 변이시킨 마수들이 난동을 피워야 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황위 후계자로서 의식 전반을 총괄한 황태자에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길 것이다.
거기에 소란을 듣고 뛰어든 멍청하고 귀여운 여자아이까지 구하겠다고 난리를 피우면, 고결하고 흠 없었던 황태자의 평판은 싸구려 소문들 속으로 곤두박칠치리라.
소원대로 엔클레이오는 망쳐졌다. 하지만 계획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직 자유 사냥을 나간 귀족들이 모두 돌아오기도 전이었다. 봉마 의식 단계는 시작하지도 않았다.
‘저 커다란 건 대체…….’
황태자는 제 아비와 달리 앞장서서 상황을 수습하고 있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가장 빛난 사람을 고르자면, 아마 그가 되리라.
‘이게 아닌데.’
계획대로였다면 상황을 수습하며 주목받는 사람은 메디프가 되었을 텐데. 클라우디아는 이를 악물었다.
“망할. 저게 대체 왜 튀어나오지?”
‘마브로스 아르팍티카’는 삽화에 그려진 것과 똑같이 생겼다. 이로써 어릴 때부터 읽어 온 그 책이 허풍으로 엮인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메디프는 조금 살 만해 뵈는 벨라를 땅에 내려 주었다.
“이름이 뭐예요?”
“벨라.”
묻는 쪽이 정식으로 소개하지 않은 마당에 제 이름을 다 대야 할 의무는 없거니와, 이 난리가 벌어졌는데 자기소개나 하고 있을 생각은 피차 없었다.
“좋아요, 벨라. 저 천막 쪽으로 어서 대피해요. 놈이 아직 그쪽에 별 신경을 쓰고 있지 않은(는) 눈치고, 호위 병력도 그쪽에 충분히 편성되어 있으니까.”
벨라는 단호한 말에 떠밀리듯 걸어가다가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주머니에서 동그란 물건을 꺼내 뭐라고 소리쳤다. 다음엔 가슴에 장식하고 있던 배지를 떼어 손에 쥐더니 뭐라 중얼거렸다. 이내 도망치는 사람들 주변에 희끄무레한 방어막이 쳐졌다.
‘잘난 체하더니. 마법사는 맞았던 모양이네.’
여전히 머릿속이 윙윙 울렸다. 저 파란 머리는 대피하라고 했지만, 벨라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저것을 부른 건 다름 아닌 그녀였다. ‘저것’ 역시 자신과 같은 소리로 말을 했다.
암만 큰 짐승이 나타나길 바랐대도 저 정도는 아니었고, 이런 난리도 바란 적 없지만.
벨라로서도 제 안에 있는 대마녀의 사념이 어떤 원치 않는 결과를 부르곤 하는지 알 길 없었다.
이 와중에도 황태자는 더없이 역할에 충실했다.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있었다. 벨라는 입 안의 살을 짓씹었다.
손에는 늘 쓰던 활이 잡혀 있었다.
그녀는 짐승을 잡을 때 화살을 낭비해 본 적이 없었다. 보통은 한 발이면 충분했다. 그러나 ‘저것’은 워낙 몸집이 크니, 단발에 심장을 꿰뚫는다 해도 바로 죽일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시위에 화살을 메겼다.
혼우드에서 그 바보가, 제 깜냥으로 안 될 짓을 하다가 마수의 먹잇감으로 내던져졌을 때.
‘바보같이 망설였어. 겁쟁이처럼.’
그것 역시 ‘목소리’의 일부라는 생각에 바로 튀어 나가지 못했다. 조금만 더 용기를 가졌더라면 결과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오필리어를 구하는 게 저 남자가 아닌 벨라, 그녀였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넌 아직 내 옆에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때 황태자의 손에 죽은 마수는, 금발의 조그만 인간 여자애는 절대 죽이지 말라는 그녀의 말을 뻔뻔하게 어겼다. ‘목소리’들의 일부였어도 죽어 마땅했다.
소란을 피우는 저것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을 크게 위협하고 있으니 멈추어야 했다. 그녀는 반쪽짜리 짐승이었고 마수와 공명했지만, 또한 인간이기도 했다. 오필리어와 같은.
벨라는 화살을 당겨 마수의 심장을 겨누었다. 손에 익은 활이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팽팽히 당겨졌다.
호흡이 멈추었을 때, 큰 마수가 가진 닭의 눈이 벨라를 들여다봤다.
[너는, 랜니스?]
“…….”
만난 적도 없는데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어째서 나를 쏘려는 거지? 원수를 죽여.]
“무슨 원수를…….”
되물으려던 벨라는 멈칫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알고 있었다.
“아주, 아주 오래된 사람의 생각이 네 안에 들어 있대.”
그녀는 어릴 때부터 자주, 흐릿한 그림자가 되는 꿈을 꿨다. 더럽고 검고. 깊은 숲에 몸을 숨긴 채 인간들을 조롱했다. 마수는 종이자 친구였고, 그리고…….
“복수할 테다, 네놈과 네놈의 후손들까지 똑같이 갈가리 찢어 버릴 테다!”
살점이 흩어지고 피를 쏟으며 죽어 갈 때 절규하던 이름.
“뒤싱겐-!”
전신이 심장의 일부가 된 듯 쿵쿵 울렸다. 멍하고 어지러운 가운데 시야만이 뚜렷했다. 화살촉의 끝은 뭐에 씐 듯이 돌아가 마땅히 죽였어야 할 사람을 향했다.
빛을 뿌리는 검을 휘둘러 사람들을 호령하는 남자.
달을 뽑아내 태어난 듯한 몸. 그 피 한 방울, 눈빛 하나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