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황궁에 온 뒤로 꾸준히 벨라에게 서신을 보냈다. 처음에는 답장이 오지 않았지만 얼마든지 예상했던 일이었다. 약 두 달간 계속 보내자 처음으로 답장이 왔었다.
[잘 지내고 있나 보구나, 바보야.]라고.
언뜻 무정하고 쌀쌀맞아 보이지만 실상은 다르다는 걸 알았다. 심지어 편지 봉투 안에는 말린 라벤더 꽃까지 들어가 있었다. 그 짤막한 답장이 너무 예뻐서 몇 번이고 읽어 보았다.
그 뒤로 벨라의 답장은 몇 문장씩 길어졌다. 불과 며칠 전 받은 것엔 [조만간 내 신변에 무슨 일이 있을 것 같다. 나쁜 일은 아니니 쓸데없는 걱정 마라.]라고 쓰여 있었고, 날짜는 8월 초였다.
그게 백작위 승계였다니.
‘모나한 백작 벨라루시아’라니, 너무 멋있다! 이로써 낮의 혼우드도 밤의 혼우드도 그녀의 세상이 될 터였다. 뿌듯한 한편 벨라가 잘 해낼 수 있을까 걱정도 되었다.
“진짜 잘됐다, 벨라!”
뛰쳐나가려던 것도 잊고 신문을 끌어안았다. 그러다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굳어 버렸다.
벨라는 이미 지난달에 백작이 되었다.
그리고 혼우드에서 엔클레이오에 참여하는 귀족은 모나한 백작 한 명뿐이었다.
따라서 그녀는 지금 의식 현장에 있을 터였다. 온몸의 피가 빠르게 식어 내렸다.
그때, 책상 위에 올려놔 둔 통신 기구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렸다. 광풍이 휩쓰는 듯한 소리. 동시에 황태자궁을 둘러싼 공기도 불길하게 공명했다.
때 아닌 큰 바람에 어딘가에서 창문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통신 기구 쪽에선 아득하게 비명 소리가 들렸다.
“2황자님! 무슨 일 있나요?”
내 외침에도 저 너머에선 불분명한 소란만 들려왔다. 불길함이 한순간에 온몸을 집어삼켰다.
“대답 좀 해 주세요!!”
나의 벨라는 소설 속의 벨라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러니까 소설 속의 비극을 피해 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한 조각 남아 있던 불안이 모든 걸 뒤집었다.
저 바깥엔 쇠사슬에 묶인 마수들이 있었다.
클레멘츠.
그런 끔찍한 꿈을 꾸었는데도 이젠 모두 지나간 일이라 여겨 버린 내가 한심스러웠다.
두 사람 모두 내게 소중했다. 소설로 접하던 때와는 완전히 다른 의미였다.
- 절대 이쪽으로 오지 마세요, 오필리어! 그냥 거기 있어요.
통신구에서 드디어 메디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을 땐, 나는 이미 황궁 후원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 * *
힘겨운 삶이었다.
그밖에 무어라 말할까. 눈을 뜨면 보이는 세상이 벨라를 억눌렀다. 맞지 않는 옷에 몸을 구겨 넣은 듯. 저 혼자만 죽이는 독이 공기에 섞인 듯. 모든 시간이 힘겨웠다.
이 억압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오직 하루의 절반뿐인 본성을 숨긴 채 삐거덕거리는 삶을 이어 갈 거라고. 그러다가 어딘가로 팔려 가서 미쳐 버리거나, 온전히 짓눌리기 전에 도망칠 거라고.
그런데 어느 순간 그녀를 둘러싼 압제가 물러갔다. 어쩌면 모습만 바꾸어 그대로 자리에 있을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벨라루시아 모나한은 더 이상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여동생이 아니었다. 그녀는 혼우드의 백작이었다.
어쩌면 자유를 가져다줄지도 모르는 권위를 두른 채로 처음 향한 곳은 황궁이었다.
살면서 마주친 모든 것들이 불편을 야기했다. 열두 살에 나타난 그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애는 다른 누구와도 달랐다.
끊임없이 건드리고 톡톡 두드리고 외치고 속삭여, 그녀를 한 군데 한 군데씩 작게 바수었다.
마침내 숭숭 뚫린 구멍으로 원하지 않은 것들이 드나들었다. 그런데도 생각만큼 고통스럽지 않았다. 미약한 냉기를 실은 바람에 뒤틀려 있던 신경이 전율했다.
벨라는 짜증 난다고 탄식하며 그 틈으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그곳엔 꽃잎과 나비가 날고 계절이 흘러가는 세상이 있었다.
그 아이를 황태자가 데려갔다.
이곳에 오면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전에 증명해야만 하는 것이 있었다.
‘큰 걸 잡아야 해.’
붉은 사냥복을 입은 벨라는 주변을 면밀히 살폈다.
위험에 처했던 오필리어를 그녀가 아닌 황태자가 구해 갔을 때,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벨라는 방구석에 틀어박힌 채 그 아이를 곁에 둘 자격을 자문했었다. 이제는 이 문제에서 스스로 움츠러들고 싶지 않았다.
다시 보아도 황태자는 나무랄 데 없어 보였다. 많은 귀족들 앞에서 당당한 모습은 예전보다 더 강해 보였다. 벨라는 이를 악물었다.
백작 작위를 받고 수도에 와서도 예전과 달라진 게 없는 건 질색이었다. 무엇으로든 자신을 증명해야 했다.
황태자의 오만한 눈앞에서.
어리석은 오라비와 큰 차이도 없는 어중이떠중이 귀족들과는 다르다고.
그러기에 사냥보다 좋은 게 없었다. 인간보단 차라리 맹수에 가까운 벨라였으니.
다행히 좋은 상대를 발견했다. 수풀에 숨어 있는 검은 멧돼지였다. 털이 거칠었고 반항적인 눈이 노랗게 빛났다. 그녀는 활을 당겼다.
단번에 심장을 맞힐 생각이었다.
“어,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갑작스러운 목소리가 집중을 흐트러뜨렸다. 벨라는 치솟는 짜증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위험하게! 저 큰 걸 혼자서 잡으시려는 거예요? 보호구도 변변찮고. 마법사……도 아니면서.”
“……뭐라고?”
어처구니없는 소릴 늘어놓는 남자는 딱히 저보다 강해 보이지도 않았다. 저 요란한 머리색은 또 뭐고. 차림새는 지적한 쪽이라기엔 민망할 만큼 허술했다.
‘겉멋만 든 놈.’
벨라는 단순히 평했다.
“그 활 내려놔요, 농담하는 거 아니니까.”
“이게 농담으로 보여?”
푸른 눈에서 불티가 팍 튀었다. 메디프는 순간 멈칫했다. 기백만 보면 혼자서도 멧돼지를 때려잡을 여자 같았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역시 무리였다. 그는 늘 그렇듯이 웃음으로 상황을 무마해 보았다.
“농담일까요? 엔클레이오에서 안전사고가 발생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누를 끼치겠어요. 욕심을 좀 줄입시다.”
곧 안전사고를 유도할 예정인 남자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정론이었다.
그사이 사냥감은 달아나 버렸다. 벨라의 표정이 한결 무서워졌다.
“못 보던 얼굴인데. 친구 없어요? 여럿이서 힘을 합쳐 잡아야 할 거 아니에요.”
“그러는 너는 왜 혼자 있지?”
그녀가 뚜벅뚜벅 다가왔다. 메디프는 뒷걸음질 쳐 피하고 싶은 본능을 자존심상 억눌렀다. 어쩌면 잘못 건드렸는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을 애써 무시했다.
그리고 멱살이 잡혔다.
“뭔데, 말을 얹어?”
벨라는 손에 힘을 주어 더 끌어당겼다.
“저것보다 좋은 사냥감을 찾을 수 있어? 난 큰 걸 잡아야 한단 말이야. 어떻게 책임질 생각이지?”
그녀는 모르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을 길게 해 본 역사가 없었다. 오필리어 외의 사람에게 드러내 놓고 화를 내 본 적도 처음이었다. 오필리어는 늘 귀찮게 달라붙었으니까. 돌이켜 보면 그게 그렇게 싫진 않았지만.
하지만 그 검은 멧돼지가 그녀를 오필리어와 다시 이어 줄 열쇠라 생각하던 참이었다. 놓치고 나니 분노를 감당할 수 없었다.
이 기생오라비 한량 같은 놈 때문에.
“너 나 처음 보지. 내가 활 쏘는 거 봤어? 아니잖아. 나는 겨누고 쏜 짐승을 놓친 적이 없어. 빗나간 적도 없고, 두 발 이상이 필요했던 적도 없어.”
황태자와 활로 겨뤄 이긴 적도 있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땐 아쉽게도 그녀의 패배였다. 상한 자존심에 소금이 뿌려지는 기억이었다.
제 기억에 한 차례 더 도발당한 벨라는 팔에 한 번 더 힘을 주었다. 얼굴이 가까워졌다.
“그러는 넌 뭐냐고. 그렇게 잘났어? 마법사야?”
“내…….”
‘그러고 보니 그놈이랑 좀 닮았어.’
최악이라는 뜻이었다.
“내 멱살을 잡은 여자는 당신이 처음이에요.”
최악인 데다 얼빠진 놈이었다.
지금이라도 상관하지 않고 다른 짐승이나 찾아볼까 싶었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서기엔 너무 억울했다.
그렇다고 이 한량이 새 사냥감을 찾아 줄 만큼 믿음직스러워 보이지도 않았다. 애당초 벨라는, 제게 잘못한 사람에게 무엇을 요구해야 할지 몰랐다. 그만큼 서툴렀다.
그런데 갑자기, 서서히 손을 풀던 벨라가 비틀거렸다.
“……!”
“왜 그래요?”
뭔가가 있었다. 꼬집어 말하기 힘들었지만 무언가, 아우성쳤다. 여러 군데에서 다양한 목소리로. 그래, ‘목소리’.
“무슨 소리 안 들려?”
“……아뇨?”
메디프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는 고갤 젓다가 놀라서 벨라를 붙잡았다. 무섭지만 기운은 넘쳐 보이던 여자가 금세라도 넘어질 것처럼 휘청거렸다.
“왜 그러는데요, 말 좀…….”
“으아아악!”
머릿속을 휘젓는 괴로운 느낌. 벨라는 비명을 질렀다.
“……젠장. 일단, 일단 돌아가요. 천막에 치료사와 신관이 대기하고 있어요.”
지병이라도 있는 걸까? 아예 땅으로 주저앉을 기세였다. 메디프는 작은 소리로 양해를 구하곤 벨라를 안아 들었다. 극심한 고통에 떠는 것 같은데도 손에 쥔 활을 결코 놓지 않았다.
조금만 기다리라고 중얼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상태가 나쁜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것도, 여성을 안아서 옮기는 것도 그에겐 처음이었다.
“……악!”
몸부림치는 벨라의 주먹에 몇 차례 얻어맏기도 했다. 억 소리가 저절로 나올 만큼 아팠다.
드디어 봉인진이 보이는 곳까지 갔을 때. 식은땀에 젖은 얼굴로 벨라가 눈을 번쩍 떴다.
“정신이 들어요?”
벨라는 대답 대신 그의 목 뒤에 두른 손을 꼭 말아 쥐었다.
어린 시절부터 숲속에서 들렸던 ‘목소리’는 마수들의 것이었다. 하지만 인간인 상태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한정적이라는 걸, 밤의 마물에게 저주를 받아 표범으로 변하고 나서 알게 되었다.
마물은 검은 표범이 그녀에게 ‘더 어울리는 모습’이라고 했다.
변신했을 때엔 더 작거나 더 큰, 다채로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병아리로 변한 오필리어와도 밤이 되고서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