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115)화 (115/218)

115화

“황태자는 여자를 그런 식으로 갖고 놀지 않아. 정치적으로 보여 줄 목적이라기엔 너무 조용했고.”

“…….”

“안 그런 듯 폐하를 많이 닮았지. 한 여자에게 빠지면 답이 없는 핏줄이야. 내 느낌은 정확하단다.”

사족을 추린 황비는 명령했다.

“그러니 엔클레이오에선 그 애를 이용하렴. 귀족들이 모두 모인 자리인 만큼 효과는 확실하겠지.”

메디프는 입술을 달싹였다. 계획이 뭔지 생각하면, 오필리어를 이용하는 순간 그녀의 안전은 보장할 수 없었다.

‘그러겠다고 해. 일단 상황을 넘기고 다른 방법을 찾아야지.’

생각은 그랬다.

“관련 없는 사람까지 너무 끌어들이시는 것 아닌가요? 어머니.”

이게 아닌데. 기름을 바른 듯 매끄러운 혀로 말하면서도 잘못 선택했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솔직히 이렇게 아무리 용써 봤자, 서자이며 차자인 제 위치엔 변함이 없지 않나요. 이런다고 황태자 자리의 주인이 변할지는 모르는 일 아닙니까.”

클라우디아는 황비. 황후 자리가 공석이라 하나 공식적으로 그녀는 첩의 위치에 있었다. 암만 난다 긴다 하는 페리윙클을 등에 업어도 메디프는 서자였다.

“설령 제가 마탑으로 숨어 버린다 해도, 만일 폐하께서 원하신다면 제국군을 동원해서라도 끌어다 황위에 앉히시겠지요.”

“…….”

“저희가 기를 쓰고 황위를 다퉈 봤자 의미가 있긴 한가요?”

처음엔 그저 오필리어를 상황에서 제외시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너무 많은 말이 나와 버렸다.

“나약하고 한심해 빠진 소릴 하는구나. 마탑에 다녀오더니 더 안 좋아졌어.”

“어머니.”

“네가 이렇게 나오는 게 그 여자애 때문이니?”

잔잔한 바다 같던 어머니의 눈은 얼어붙은 파도처럼 변했다. 메디프는 클라우디아의 저런 눈길을 목도한 실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너까지 그 맹랑한 계집애와 어울리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았니? 무도회에서 춤추고, 도서관에 데려가고, 네 궁에까지 불러들였더구나.”

“……죄송합니다.”

“그 아이는 사랑스럽고 재미있게 생겼으니까, 너야말로 장난감으로 생각하는 줄 알았다만. 그게 아니었다면 매우 유감이구나.”

클라우디아는 명령했다.

“오필리어 레오라를 마수들 앞에 던지렴. 의식이 진행 중일 때, 황태자가 보는 앞에서.”

“어머니, 유감이지만 안 될 겁니다. 황태자는 그 여자를 엔클레이오에 데려가지 않을 거예요.”

“그럼 네가 끌어내. 친하잖니.”

얼어붙은 파도는 다시 잔잔한 물결로, 혹은 페리윙클 꽃으로 돌아왔다. 그러곤 절망의 한 자락을 미처 숨기지 못하는 메디프를 보듬었다.

“오, 아가. 그 계집애를 기꺼이 밟고 설 수 없다면, 앞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계단 삼아 정상에 올라서겠니?”

결국, 메디프는 한 쌍으로 된 통신구를 오필리어에게 갖다주었다. 마침 그 여자는 엔클레이오를 두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해 몸이 달아 있었으니.

“만약 네가 직접 하지 않는다면, 내가 직접 그 아이를 진창에 처박을 거란다. 그 보잘것없는 가문을 부수고, 앙증맞은 몸을 부러뜨리고, 주제를 모르고 나서는 영혼을 짓밟을 거야. 다시는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게, 볼품없게 만들어 놓을 거란다. 그걸 원하니?”

겉으론 호의로 도와주는 것처럼 그녀를 끌어낸다.

문제를 일으킨 마수들이 소동을 부리면, 오필리어의 성격에 나와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 아- 들리나요, 황자님? 의식 시작했어요?

메디프의 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 네, 이제 막 시작했어요.

‘미안해요, 오필리어. 잠깐이면 돼요, 아주 잠깐. 당신이 다치는 일은 없게 할게요.’

- 어때요? 아, 정말. 저도 가고 싶었는데! 왜들 못 가게 막냐고!

툴툴거리는 얼굴이 어떤 표정일지 익히 상상이 되었다. 메디프는 주변의 모습을 설명해 주었다. 햇빛을 받은 숲이 무슨 색이고, 봉인진은 어떻게 그려졌으며 그 규모는 어떻고, 누가 참여했으며 입은 옷은 어떠하다는.

- 들으니까 더 보고 싶어요.

“직접 한번 보여 줄까요?”

- 어, 네네.

메디프는 사냥복 재킷 안주머니에서 작은 구체를 꺼냈다. 작게 주문을 외워 마력을 주입하고, 마석과 렌즈가 박힌 부분을 앞으로 하여 천천히 주변의 모습을 담았다.

- 와…!

“잘 보이나요?”

- 네!

오필리어는 그가 전해 준 영상이 얼마나 선명하게 잘 보이는지, 숲으로 비쳐드는 낮의 햇살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또 간간이 멀리서 말을 타고 지나가는 귀족들은 얼마나 멋있는지 한동안 조잘거렸다.

저절로 웃음이 나오는 목소리였다.

그녀가 안에 있도록 놔두는 것. 구경을 원하는 해맑은 아가씨에게 이렇게라도 이곳 모습을 전해 주는 것. 단지 순수한 호의로 이렇게 해 주는 거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 클, 황태자 전하는 어디 계신가요? 저를 떼놓고 가서 행복해 보이시는지 궁금한데요.

“그다지 행복해 뵈진 않네요.”

- 흥. 잘됐……. 아니, 혼자 룰루랄라 갔으면 좀 즐거워야 하는 거 아니에요?

‘룰루랄라? 즐거워 해?’

누굴 얘기하는 거지. 대체 그 사람을 어떻게 보고 있으면 그런 말이 나오나.

아니, 어쩌면 그녀가 맞을 수도 있었다. 사랑은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놓곤 하니까.

“글쎄. 이 순간에도 당신이 보고 싶어서 불행한 거 아닐까요?”

통신 기구 너머에서 딸꾹질이 들려왔다.

- 어떻게 그런 말을 해요? 2황자님은 황태자 전하께서 그럴 사람으로 보여요?

“네.”

저쪽에서도 방금 그의 생각과 비슷한 말을 하니 재미있는 일이었다. 그가 킬킬거리자 오필리어는 말을 돌렸다.

- 그런데 전하께선 사냥 안 하세요? 그냥 돌아다니기만 하시네요.

“저요?”

- 네. 혹시 제게 뭘 더 보여 주시려는 거면 그러실 거 없어요.

“아뇨, 그냥 땀 흘리는 건 딱 질색이라.”

지어낸 말은 아니었다. 메디프는 땀 흘리는 활동은 질색이었다.

- …….

산책은 관두고 슬슬 현장으로 돌아가 볼까?

그때 메디프는 낯선 사람을 발견했다.

시선을 떼기 힘든 사람이었다.

* * *

대망의 봉마 의식 날. 나는 결국 권유를 빙자한 강제에 의해 황태자궁 안에 있게 되었다.

약속대로였다. 클레멘츠가 말해 두었는지 오늘의 파이는 특별히 맛있고 양이 푸짐했다. 우유 스콘과 클로티드 크림, 다양한 종류의 잼들이 예쁜 그릇에 담겨 도착했다.

이번 달에 수도에서 발행된 로맨스 소설들 전체가 한 묶음으로 도착했다. 초판 한정본인 것도 모조리 빠짐없이.

평소 같았으면 최고의 날이 되었겠지. 그냥 오늘을 내 생일로 다시 정해 버릴 마음까지 들었겠지.

하지만 그게 바로 오늘이기에 나는 오히려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엔클레이오를, 봉마 의식을 봐야겠다고!

소설 속에서 처절한 비극이 일어나는 게 오늘이란 걸 알아 버린 이상, 모든 것이 순조롭게 마무리되는 걸 보기 전까진 안심할 수 없었다.

평소 그렇게 좋아하던 간식과 소설이지만 전혀 손이 가지 않았다. 아무 것도 즐길 수 없었다.

다행히 메디프가 현장 상황을 전해 준다고 약속했다.

저번에 찾아갔을 때는 ‘제가 보기에도 위험한데요, 그냥 방 안에 콕 틀어박혀 계시죠.’라며, 클레멘츠 같은 소릴 해 대더니.

마음이 바뀌었는지 며칠 뒤 찾아와서 마법 통신 기구를 주고 갔다.

역시 말이 좀 통하는 상대다. 나의 전속 마법 컨설턴트는 다르다.

책상 위에 올려 둔 통신구는 만듦새가 좋은 게 꼭 마탑제 같았다.

보이고 들리는 바에 의하면 대체로 평화롭고 무탈하게 굴러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끝까지 안심할 수는 없었다.

“……오필리어, 조금 이따가 다시 얘기할게요.”

훌륭한 중계 위원이 되어 주고 있던 메디프는 중간에 방송 중지를 선언해 버렸다. 곧, 통신 기구를 주머니에 넣어 버린 듯 영상은 어두워졌다.

한 꺼풀 막힌 듯 작은 소리를 들어 보니 어떤 여자와 대화하고 있는 듯했다.

사냥터에서 첫눈에 반한 여성이라도 나타난 건가?

충분히 흥미로웠지만 지금은 파헤칠 정신이 없었다. 초조함에 일어나서 방을 서성였다.

그냥 몰래 나갈까.

“사냥복은 준비 못 했지만 대충 섞여 들 만한 옷이…….”

옷장을 열고, 이 중에 어떤 망토를 걸치면 지금 날씨에 알맞으면서 수상쩍어 보이지 않을까 고민하던 찰나였다. 잠시 고개를 돌린 내 눈에 신문이 들어왔다.

한 달간 출간된 로맨스 소설을 죄다 질러 버린 통 큰 고객에게 서점이 끼워 준 증정품이었다. 나는 그걸 주워 들었다.

평소엔 신문을 잘 읽지 않지만, 구석 자리에 아는 이름이 찍혀 있어서였다.

[혼우드 맹주의 세대교체]

혼우드의 맹주라면 모나한 백작을 의미했다. 작고 보잘것없는 지방이지만, 백작위 계승자가 바뀌는 정도의 사건이라면 수도 신문에 조그맣게 실릴 만도 했다.

기사를 읽어 내려가는 내 눈이 흔들렸다.

클레멘츠가 저택을 방문했을 때, 모나한 백작은 그에게 제대로 미움을 샀다. 그 뒤로 클레멘츠가 각종 합법적 철퇴를 내려 그를 박살 내는 과정이 착실히 진행되었다.

거의 매일같이 클레멘츠의 집무실에 있다 보니 모를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 못된 백작님이 저질러 온 잘못은 까고 보니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

과거 고용주라고 옹호할 생각은 없었다. 스스로의 과오에 걸려 넘어진 것뿐인 것을.

그렇게 탈탈 털리고 개과천선한 백작님이 될 줄 알았는데. 신문을 보니, 결국 작위와 귀족 신분까지 박탈당하고 오지로 쫓겨났다는 모양이었다.

죄에 비해 과한 처분 같기에 조금 의문이었다. 거기다 가주가 그토록 풍비박산이 났는데도, 모나한가는 벌금과 일부 가산 박탈 말고는 다른 후폭풍을 맞지 않았다.

[그리하여 8월 말, 올해 갓 성년을 맞은 벨라루시아가 작위를 승계하였다. 벨라루시아는 전 백작 셀레우시스의 여동생이다.]

“벨라가…… 백작이 되었다고?”

놀라움과 기쁨, 얼떨떨함이 뒤섞여 찾아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