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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114)화 (114/218)

114화

‘…….’

으아, 더 모르겠어! 숨 쉬는 거 맞나? 오히려 더 조바심이 났다. 얼굴을 가까이 내려 노려보다가, 결국 그의 코밑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음, 좋아. 숨은 쉬고 있군. 규칙적이고 콧바람의 세기도 충분하다.

하지만 그러자 이번엔 다른 쪽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얼굴 너무 창백하지 않나?

원체 피부가 눈처럼 희어서 그렇대도 과했다. 은을 뽑아낸 듯한 머리칼에 수려한 눈썹과 길고 오연한 속눈썹도 모조리 은빛이라서 그런가?

설마 추워서 하얗게 질린 건 아니겠지. 침실은 늘 자동 온도 조절이 되고 있을 텐데.

가능성은 낮아 보였지만, 너무 신경 쓰인 나머지 확인해야겠다 싶었다.

옆에 사람이 와도 모를 만큼 깊이 잠든 것 같으니, 이불 바깥으로 나와 있는 그의 손에 살짝 손가락을 얹었다.

“…….”

그걸론 모르겠어서 살살 표면적을 넓혀 손바닥을 겹쳐 보았다. 차가운가? ……모르겠다. 그냥 미지근한 것 같다. 어려워, 어려워.

하필 그런 꿈을 꾸고 난 직후라서. 이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단 걸 알아도, 클레멘츠가 조금이라도 불편해 보이는 걸 견딜 수 없었다.

이게 다 이렇게 생기 없이 자는 클레멘츠 때문이다.

왜 더 편안하고 행복해 보이지 않는 거야?

원작의 불행한 일들은 다 너를 피해 갔는데. 마스코트 사업도 잘되고, 긍정적인 여론과 지지를 받고 있잖아.

그는 꼭, 모나한 저택에서 잠든 그를 봤을 때처럼 어딘가 슬퍼 보였다. 마음에 안 드는 정도가 아니었다. 말랑말랑한 가슴속 어딘가에 작은 거스러미가 들어간 것 같았다. 자꾸만 신경 쓰이게 꾹꾹 건드렸다.

“왜…….”

혹시라도 그가 깨어날까 아주 작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그냥 원래 눈 감으면 약간 슬퍼 보이게 생긴 건가? 아직 어두워서 내가 잘못 본 건가 싶어 고개를 쭉 뒤로 빼고 멀리서도 봐 보고, 바짝 당겨 가까이도 해 보았다.

애당초 이 인간은 왜 웃고 살질 않는 거야.

그때, 클레멘츠가 뒤척이는 신음 소리를 냈다.

“으음.”

깨운 건 아니겠지 싶어서 물러나려는 순간, 미동도 없던 그의 손이 살짝 겹쳐져 있던 내 손을 움켜쥐었다.

“……!”

클레멘츠는 그대로 내가 있던 반대쪽 옆으로 돌아누웠다. 그리고 난 반원을 그리는 그의 팔에 이끌리며 균형을 잃었고, 거짓말처럼 그와 마주 보며 눕게 되었다.

아니, 이게 이렇게 된다고?

탄성이 우수한 침대는 충격을 흡수하여 별로 들썩거리지 않았다. 시야 가득 잘생긴 얼굴이 꼭 들어찼다. 멍하니 벌어졌던 입술을 합 닫았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살살 꿈지럭대며 몸을 빼 보려 했지만, 꽉 틀어 잡힌 손이 빠지지 않았다. 강한 망함의 기운이 온몸을 지배했다.

자고 있는 클레멘츠 염탐하다 들키기. 자고 있던 클레멘츠에게 붙잡혀 똑같은 자세로 날이 밝기를 기다리기. 전자와 후자 중 어느 쪽이 더 망한 것인가 진지하게 따지다가 포기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다. 내가 빅 데이터를 추출한 바에 의하면 99.8%의 로판 남주는 잠귀가 무척 밝고, 특히나 이런 식으로 잠든 방에서 누가 뭘 도모하려고 하면 결정적인 순간에 깨어나는 법인데.

잘난 얼굴을 노려보자니, 어쩐지 그 낯이 방금 전만큼 슬퍼 보이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미미하게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 같기도?

정말 골치 아픈 남자였다. 성격도 안 그런 척하면서 은밀히 돌아 있더니, 잠버릇도 얌전한 듯 희한하게 험악하네.

눈에 힘을 주어 동그랗게 떴다. 이러다 잠들어 버리면 정말 큰일이니까.

* * *

클레멘츠는 누가 업어 가도 모를 듯 잠들어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통제하느라 정말 힘든 시간이었다. 손을 뻗어 굽슬굽슬한 황금빛 머리카락을 만져 보았다.

처음 오필리어의 기척이 느껴졌을 땐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꿈에 나온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몇 번은 그녀를 통째로 꿀꺽 집어삼키는 꿈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오밤중에 찾아와서 이상한 짓을 하고 있었는지. 작은 머리통 속의 생각을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어쨌든 미치도록 사랑스럽단 것만은 확실했다.

조심스레 머리카락을 만지던 손이 동그란 이마를, 다음으로 뺨을 쓰다듬었다. 모든 것이 놀랄 만큼 부드러웠다.

눈에 담고, 손을 댈 때마다 오랫동안 메말라 있던 땅이 단비를 만난 듯한 느낌이었다. 포악스레 집어삼키고도 아직 한참 부족해서 더, 더 필요하다고 아우성을 쳐 댔다.

과연 괜찮을까. 이렇게 작고 여린데.

제 욕심이 꺼림칙했고, 바로 다음 순간에는 그 욕심에 진득하게 빠져들었다. 비단 색욕만을 이르는 건 아니었다. 오필리어 레오라라는 존재를 남김없이 누리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모든 것을 털어 내놔도 괜찮을 만큼.

진한 감정에 깊이 빠진 눈동자가 그녀의 모습을 훑어 내려갔다. 얇은 하얀 천이 반도 가리지 못한 어깨와 깊이 파인 가슴까지 간 뒤엔 휙 돌아 다시 얼굴로 돌아왔다. 세상모르고 편히 잠든 낯이 순간 원망스러웠다.

귀 끝까지 붉게 달아올랐다. 창백하기에 혹시 추위를 타는 건 아닌지, 오필리어가 걱정한 게 무색할 만큼.

클레멘츠는 말없이 10부터 1까지 거꾸로, 다섯 번 정도 세었다. 그리고 얇은 이불을 들어 오필리어의 얼굴 바로 아래까지 꽁꽁 감쌌다. 그런 모습까지 어처구니없게도 귀여웠다.

이불 고치처럼 말아진 오필리어를 살짝 끌어당겼다. 레몬 꽃 향기가 나는 금빛 머리가 그의 팔 위에 흩어졌다.

클레멘츠는 아침이 오지 않길 바랐다.

* * *

더위가 한풀 꺾이고 긴 햇살이 비껴드는 초가을. 사냥복 차림의 귀족들이 황궁 뒤뜰에 모여들었다.

현왕의 봉마 의식, 엔클레이오 투 바실리아.

축소판이라고는 하지만, 봉인진은 초대 유스티온 황제 때의 위용을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컸다. 의식의 하이라이트를 위해 준비된 마수들은 아직 끌려 나오지 않은 채 쇠사슬에 묶여 있을 터였다.

출신 지역별로, 파벌끼리, 혹은 가문대로 줄을 지어 서 있는 귀족들도 모여 있으니 장관이었다. 그보다 눈에 띄는 것은 단 위에 자리한 황족들이었다.

애당초 황족, 특히 황제의 위엄을 내세우기 위해 오랫동안 이어져 온 자리였다.

“……그럼, 부디 그대들의 자질과 성의로 이 자리를 빛내 주길 바란다.”

특히 황태자는 이날을 위해 각별히 조성된 조형물과도 같았다. 그 외모는 반신 같았고, 시선은 압도적인 군주를 갈망하는 무리를 향해 차갑게 떨어졌다. 조리 있고 분명한 말들이 사기를 고취시켰다.

흠잡을 데 없는 모습. 차기 황위의 완벽한 계승자.

핑계를 대며 빠져나온 메디프는 황족과는 상관없는 자리에서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반드시 그가 단상 위에 있어야 한다며 신경질을 부리던 클라우디아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도 이 정도는 봐주셔야지. 이번에 내가 얼마나 말을 잘 들었는데.’

우레 같은 박수를 받은 클레멘츠는 뒤로 걸어가 황제에게 고개를 숙였다. 코넬리우스 황제가 오른손을 들어 의식의 시작을 알렸다.

엔클레이오의 시작이 선포되고, 첫 순서는 귀족들의 자유 사냥이었다. 숲으로 들어간 귀족들이 사냥을 즐기는 동안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봉인식을 예고하는 뿔 나팔이 불어졌다.

그를 알아본 귀족들이 함께 잡자며 말을 걸었지만, 메디프는 적당히 거절했다. 그는 숲으로 들어가지 않고 검은 말에 탄 채 어슬렁거렸다. 사냥이고 봉인이고 어차피 곧 별 의미 없게 될 터였다.

힐끗 돌아보니 여러 대의 마차가 봉인진 근처로 도착하고 있었다. 검은 천이 씌워진 마수 우리들이 마차에 실려 있었다.

황태자는 말에 오르지 않았다. 흠잡을 데 없는 연설을 마쳤던 그 단 위, 황제와 가장 가까운 위치에 단정히 서 있었다.

오늘 이 의식으로 황태자는 제 자리를 더 공고히 할 예정이었으리라.

“폐하께서도 무심하시지. 이미 상승세를 타는 황태자에게 날개를 달아 주시겠다? 그렇게는 안 되지.”

어머니가 노리는 건 확실했다. 황태자의 추락. 그리고 제2황자의 반등.

“안 그러니, 메디프?”

메디프는 그녀가 지시한 대로 군소리 없이 일을 처리했다.

의식에 쓸 마수에 손을 댈 기회는 쉽게도 주어졌다.

황궁 소속 연구원들은 그가 하는 말이라면 철석같이 믿고 따랐다. 마력 주입량과 매개 약물에 다소 장난을 쳐도 마찬가지였다.

봉인식이 한창일 때, 황태자가 가장 주목받고 있을 때 마수들은 문제를 일으키게 되리라.

그래 봐야 작은 소동일 테지만. 원래 완벽한 상태였던 조형물일수록 사람들은 조금의 흠집도 용납하지 않는 법이었다.

황실의 상징성과 직결된 엔클레이오는 다른 연례행사와 비교할 수 없는 중요한 행사였다. 황태자는 그런 행사의 진행을 망쳐 버린 책임을 피할 수 없게 되리라.

마수 변이에 조작을 가했던 기록은 이미 정상적인 문서로 전부 바꿔치기해 두었다. 누군가 의혹을 제기할 수는 있으나, 그 어떤 증거도 찾지 못할 것이다.

한번 지상을 박차고 날아오르려던 황태자의 발목을 잡아채면, 그다음부턴 진창 싸움이었다. 승자가 누구든, 훌훌 털어 버리고 날아오르진 못하리라. 오랫동안.

‘미안해요, 오필리어.’

그 여자를 궁에 보호해 둔 형제의 조처는 백번 옳았다. 그러나 이젠 의미 없는 일이었다.

* * *

며칠 전, 황비궁. 메디프는 어미의 부름을 받았다. 황비는 우아한 손길로 직접 차를 우려 건넸다. 그리고 엔클레이오 의식 때 황태자를 걸어 넘어뜨릴 계책을 곁들여 내놓았다.

거기까진 괜찮았다. 메디프도 익히 예상하고 각오한 바였다.

“오필리어 레오라.”

그 이름이 황비의 이름에서 나오기 전까지는.

메디프는 태연한 척 찻잔을 내려놓았다.

“마침 저도 아는 이름이군요. 그 아가씨는 왜요?”

“이 어미의 느낌이 틀리지 않다면, 황태자가 그것을 꽤나 끼고돌더구나.”

가슴팍에 무거운 돌이 얹혔다. 왜 이 여성의 선명한 악의를 잊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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