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전 가 보고 싶은데, 참여도 안 된다고만 하고.”
불만의 핵심을 떠올리자 입이 댓 발은 나오는 것 같았다. 난 여기선 메디프가 내 편을 들어줄 줄 알았다. 그런데…….
“……그건, 황태자 전하의 생각이 옳은 것 같은데요, 오필리어.”
“네?”
“엔클레이오는 위험을 감수하는 볼거리예요. 그러니까 재밌는 거지만. 진짜 마수가 십여 마리나 우리 밖으로 끌려 나온다니까요? 안전하게 방 안에만 있을 수 있으면 그게 최고죠.”
“됐어요. 2황자님마저도 그런 말씀을…….”
멋쩍은 미소를 짓는 메디프를 뒤로하고 돌아섰다. 딱히 편 들어주지 않아서 삐진 건 아니었다.
나라고 잔인한 장면을 보고 싶진 않았지만, 엔클레이오는 원작에서 중요한 시점이었다. 1부 결말의 그…… 그 장면이 나올 여지는 사라졌어도. 모든 것이 원만히 마무리되는지 확인할 의무가 내겐 있었다.
어디든 내가 가고 싶어 하는 곳은 가게 해 준댔으면서. 생각해 보니 이거 계약 위반이잖아?
계약을 빌미로 클레멘츠와 다시 협상해 볼까?
1부의 결말. 연인이자 여주인공인 벨라에게 클레멘츠가 죽는 엔딩.
봉마 의식 이야기, 수도 주변의 마수들에 대한 정보를 접하며 들었던 불안감은 그 탓이었다.
하지만 이유를 알아냈음에도 불안은 종식되지 않았다. 그것은 방으로 돌아오는 발걸음 내내 나를 따라왔다.
* * *
꿈속, 그 마물들이 보였다. 낮의 메라와 밤의 닉타.
그들은 서로 마법을 쏘아 대며 깔깔 웃더니 별안간 한 몸으로 합쳐졌다.
흑백의 색깔을 반씩 가진 마녀가 옥좌에 앉았다. 검고 하얀 반쪽씩의 날개에 감싸인 모습은 더 이상 기괴하거나 누추하지 않았다. 도리어 경외심이 들었다.
“우리는 합쳐진 시간.”
기이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녀는 나를 향해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오필리어.”
어린 새를 닮은 인간의 딸- 이라고 할 줄 알았는데. 평범하게 불린 이름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다.
평소와 달리 내 몸도 병아리 따위가 아닌 원래의 몸이었다.
“너는 세계의 손님이지. 시간의 베일을 걷어 너에게 보여 줄게.”
“네?”
꿈속이지만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세계의 손님이라고…! 내가 소설 밖에서 왔다는 걸 알고 있나?
“잠깐만요. 대체 어떻게…….”
가까이 가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합체 마녀는 웃었다. 우주 공간 너머에서 들려오듯 아득한 느낌이 드는 웃음소리였다.
“가까운 옆자리의 시간이야.”
흑백의 장막이 걷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다음 순간, 나는 낯선 숲에 서 있었다. 웅장하고 너른 들판과 나무들.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황궁 후원의 숲이었다.
한 남자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나는 그를 너무 잘 알았다.
“클레멘츠.”
꿈이야. 꿈이잖아. 원작에서도 봤어, 라고 스스로에게 부단히 되뇌어도 온몸이 달달 떨렸다.
그리고 붉은 사냥복 차림의 여자가 위태롭게 서 있었다. 나는 그녀 역시 너무도 잘 알았다. 그녀가 쥔 단검에서 선혈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대마녀의 영혼은 숲이 떠나가라 웃어 젖혔다. 까마귀 같은 벨라의 머리칼이 세찬 바람에 휘날렸다.
“드디어 뒤싱겐의 멸망이다! 증오스러운 제국의 멸망이다!”
찢어질 듯한 외침이 울렸다. 놀라서 돌아보는 벨라의 얼굴은 눈물에 젖어 있었다.
바람 소리와 함께 공간이 조금 이동되었다. 봉인진 곳곳에 묶여 있던 마수들. 메디프를 따라가서 봤던 마수들이 갑자기 난동을 부렸다.
“이게 무슨……!”
“모두 대피해! 윽, 젠장!”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마수를 제어해 보려 했지만, 요란하게 울던 마수들은 기어이 쇠사슬을 끊어냈다. 그때부터는 아비규환이었다. 난다 긴다 하는 귀족들이 떼로 모여 있었지만 일제히 난폭하게 구는 마수들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으아아아!!”
여기저기서 피가 튀었다. 누군가는 밟히고 누군가는 찢어졌다. 아름다운 들판은 푸르던 원래 색을 알 수 없을 만큼 붉게 물들었다.
“미친…….”
클레멘츠는 차라리 곱게 죽은 거였다. 다 개꿈이었으면 좋겠다는 소망만 간절해졌다. 뺨을 꼬집어 봤지만 아플 뿐이었다.
“황제 폐하-!”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클라티아의 황제가 살해당했다. 마수의 발톱 혹은 이빨에.
“꺄아아아!”
“저, 전하께서! 황태자 전하께서!”
몸을 피하는 데 성공해 숲을 달리던 귀족들이 외쳤다. 다시금 주변이 바뀌었다. 수많은 손가락이 그녀를 가리켰다.
“저 여자와 같이 있었어요. 저 여자가!”
“전하께서 얼마나 잘해 주셨는데, 저 마녀가!”
“살인자!”
“죽여라! 모나한의 계집이 우리에게서 황가와 땅의 주권을 빼앗아 갔다!”
이성을 잃은 격노가 한 사람에게 몰아닥쳤다.
“아, 나는…….”
벨라는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미 엉망진창이 된 모습이었다.
“그 사람을 사랑하는데!”
붉게 달아오른 눈가에서 눈물이 왈칵왈칵 치솟았다. 하지만 사람들을 휩쓰는 분노의 파랑은 멎지 않았다.
“웃기지 마! 들을 것도 없다, 죽여라!”
“마수들도 저 마녀가 조종한 거야! 우리 모두를 죽이려고 했어!”
“클라티아를 위해 죽어라!”
“서부에 증인이 있었어. 백작 영애가 끔찍한 짐승으로 변하는 걸 봤다는!”
화살이 일제히 당겨졌다. 벨라는 푸른 눈을 홉뜨다가 이내 질끈 감아 버렸다.
그때.
우워어억! 괴성을 내지르며 검은 그림자가 끼어들었다. 벨라에게 박힐 예정이었던 화살을 전부 받아 낸 황소 형태의 마수가 그녀를 뒤로 떠밀었다.
“……!”
벨라는 그길로 달아났다. 역시 마녀가 확실하다고 절규하는 인간들과, 저를 대신한 마수를 등 뒤에 남겨 두고. 그날, 쾌청하던 하늘은 심상치 않은 핏빛으로 물들었다. 마치 제국의 운명을 암시하듯이.
[뒤싱겐의 이름이 지상의 왕좌에 좌정하는 한, 마의 종족은 마계를 벗어나지 못하리라.]
지상의 왕좌는 비워졌고, 뒤싱겐의 피는 무참히 땅바닥에 버려졌다.
그리고…….
반짝.
“…….”
눈을 떴다. 다행히도 아무도 죽지 않은 시간에서.
너무도 끔찍하고 생생한 꿈이라, 한참이나 눈을 깜빡이며 그건 현실이 아니라고 되뇌어야 했다.
뭐였을까? 그건.
앞부분의 합체 마녀가 너무 심상치 않아서, 아주 개꿈이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설마 예지몽은 아니겠지?
그러면 안 돼. 그럴 리 없었다. 혼우드에서 엔클레이오에 참가하는 귀족은 모나한 백작밖에 없었다.
그보단 원작 1부 이후의 전개라고 보는 게 타당했다.
벨라는 1부 끝 무렵에 황태자가 대동하는 자격으로 엔클레이오에 참여했다. 하지만 벨라의 정신은 낯선 환경과 주변의 악의로 인해 이미 피폐해져 있었다.
온갖 이간질 탓에 끝내 클레멘츠를 신뢰하지 못했다. 거기에, 연구실에서 억지로 만들어지고 가둬진 마수 무리와 접촉했다.
마수와 깊이 교감하는 벨라는 그 순간 극도의 슬픔과 분노를 느꼈고.
아슬아슬하게 이성에 걸쳐져 있던 의식이 와르르 무너졌다. 그녀를 사로잡은 대마녀의 광기가 물러갔을 땐 이미 늦어 있었다. 그 뒤는…….
“삐이삣, 삣.(이거 엄청난 피폐물이었잖아.)”
그래서 클레멘츠는 어떻게 되는 건데? 벨라는? 제국은 고대처럼 다시 마족 소굴이 되나?
궁금해해도 이젠 뒷이야기를 볼 수 없을 것이다. 또, 그런 피폐한 이야기가 이루어지는 건 별로 보고 않았다.
연인을 죽여 버린 벨라보다, 연인에게 살해당한 클레멘츠보다, 지금의 벨라와 클레멘츠가 훨씬 안전하고 행복했으니까.
“삣삣.”
옆자리의 시간이라. 내가 빙의하지 않았을 경우의 평행 세계를 의미하는 걸까?
머리는 빠르게 정리를 마쳤다. 그러나 아직 새벽이었다. 조용하고 어두운 가운데 꿈속에서 피를 흘리던 클레멘츠의 모습이 자꾸만 생각났다.
“삐잇.”
아무래도 안 되겠어서 벌떡 일어났다. 클레멘츠가 무사히 있는 모습을 보면 이 불안이 가라앉겠지.
“삐유약.(황금색 송이버섯!)”
팡 하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평소 잠옷으로 입는 하얀 원피스 차림이었지만, 복도엔 아무도 없어서 그대로 그의 침실을 향했다. 순조롭게 문을 밀…….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밀려고 했는데, 역시 밤중에 황태자의 침소에 침입하긴 무리였다. 분명 아무도 없던 허공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리자 등골이 서늘했다.
어스름한 새벽빛 속에서 망토 자락이 흔들리는 모습이 서서히 보였다.
“아, 안녕하세요.”
특징 없는 목소리와 얼굴. 그리고 저 투명 망토. 축제 때도 봤던 그림자 기사였다.
“음, 황태자 전하께서…… 무사하신지 확인하려고요.”
“무사하십니다. 저희가 늘 지키고 있으니까요.”
“그렇군요. 고생 많으십니다!”
멋쩍게 인사하고 빙 돌아서서 몇 걸음 걸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왔다.
“그래도 잠깐 확인하고 나오면 안 될까요? 제가 안 좋은 꿈을 꿔서 그래요. 직접 얼굴을 뵈면 안심이 될 것 같아요.”
솔직한 말이었다.
이번에도 ‘규정상 안 됩니다.’라는 식으로 거절하면 어쩔 수 없었지만. 또 내가 뭐라고 자고 있는 그를 보고 안심한단 말인가.
새벽 잠결에 괜한 객기를 부린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림자 기사는 순순히 옆으로 비켜났다. 그리고 나타날 때처럼 윤곽부터 공간에 녹아들었다.
부드럽게 열리는 문을 밀고 들어가, 클레멘츠가 잠든 침대 옆으로 살살 걸어갔다.
‘역시 꿈은 꿈일 뿐이다. 봐,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잖아.’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려고 노력했다. 그러자 이제는 과연 숨은 제대로 쉬고 있는 게 맞나 의심되기 시작했다. 그는 워낙 석고로 빚은 조각상처럼 잤으니까.
원래는 잠깐 확인하고 돌아서려고 했는데, 이러니까 더 가까이 갈 수밖에 없잖아. 그의 침대 높이에 맞춰 조심스레 무릎을 꿇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