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들었느냐?”
“예.”
메디프는 태연히 대답했다. 황제는 인상을 구겼다.
첫째 아들은 그의 말 한마디, 표정 하나에 못마땅한 기색을 애써 숨겼다. 반면 둘째 놈은 언제나 생글생글 웃는 낯이었다. 이쪽도 저쪽도 마음에 안 차긴 마찬가지였다.
“들었다면 이제 뭘 어쩔 생각이지?”
황제의 책상에는 아직 ‘마스코트’ 보도가 나간 그 신문이 남아 있었다. 노랗게 그려진 병아리가 메디프의 눈에 들어왔다.
“제가 뭔가를 해야 합니까?”
“말이라고 하느냐? 답답한 녀석!”
탕. 주름진 손이 마호가니 책상을 힘껏 두드렸다. 클레멘츠의 오해와 달리, 황제는 둘째 아들과 있을 때에도 똑같았다. 변함없이 권위적이고 온갖 트집을 다 잡는 아비였다.
“네 형이 신문 기사 하나로 수도의 여론을 뒤집고 상승세를 타는 동안, 너는 대체 뭘 했느냐? 국보급 아티팩트를 가져오고도 한낱 병아리 한 마리만큼의 시선을 끌지 못하다니.”
“죄송합니다.”
그러고선 메디프는 실실 웃었다. 그 웃음은 잔뜩 열 올리는 아비를 부추기는 데 즉효였다.
“한심한 놈!”
황제는 차남의 얼굴에도 공평하게 신문을 집어 던졌다. 힘을 실어 던진 종이 뭉치가 반듯한 콧날에 맞아 떨어졌다. 제법 세게 얻어맞고도 메디프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시녀들과 시시덕거리지 않으면 탑에 틀어박혀 책이나 보고 있단 건 다 들었느니라. 그놈의 마탑에서 겨우 꺼내 왔는데 다시 또 탑이냐?”
“취향에 맞아서요.”
“고얀 놈…….”
이윽고 황제는 파르르 떨며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클라우디아 같은 여자에게서 어찌 저런 게 나왔을꼬…….”
“어? 제가 어마마마를 많이 닮지 않았습니까? 보세요.”
메디프는 고개를 숙인 황제에게 다가갔다. 양손을 활짝 펴 제 턱을 받쳐 들고 부친의 눈앞에 내밀었다. 어처구니가 없어 침묵하던 황제는 손에 잡히는 걸 아무거나 휘둘렀다.
“망할 놈!!”
“어어, 이건 진짜 맞으면 그 어마마마께서 슬퍼하실 텐데.”
고개를 틀며 중얼거리자 황제는 손에 든 흑옥 재떨이를 내던졌다. 두텁게 깔린 카펫이 충격을 흡수해 재떨이는 무사했다.
“썩 나가!”
“어휴, 진정하세요, 폐하. 그렇게 화를 내시면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도무지 말이 안 통하는구나. 나가! 가서 네놈 누추한 탑에나 처박혀 있어!”
“네!”
그는 끝까지 입을 다물지 않았다. 격노한 황제가 재떨이와 신문뿐 아니라 여러 가지를 던지는 소리가 등 뒤에서 요란했다.
“전하…….”
“왜요?”
문 앞에서 마주친 페리윙클 가문의 귀족이 걱정스러운 낯으로 입을 열었다. 메디프는 천연덕스러운 미소로 일관했다.
“아, 아닙니다.”
아마도 오촌, 혹은 육촌쯤 되려나. 메디프는 귀족의 푸른 머리 색에 잠깐 눈길을 두곤 그대로 지나쳤다.
덧그리고 덧그렸던 미소가 준수한 얼굴에서 사라졌다.
‘더 비위 맞추고 있었어도 듣는 말이야 뻔했겠지.’
마탑으로 떠나기 전과 다를 게 없었다, 그의 부모는. 아니, 떠나기 전보다 더 지독한 이들이 되어 있었다.
황제의 아들이 마법이라니, 네 형도 아카데미에서 공부 욕심을 내더니 너는 더하구나.
어째서 정치에 뜻을 두지 않는 거냐. 그래서야 내가 도대체 너를 밀어 주려고 해도 클레멘츠보다 네가 유리할 턱이 없잖느냐.
등 등 등.
‘아버지도 참. 나도 중요한 일을 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황제궁을 나선 메디프는 북측의 연구동으로 향했다.
어머니는 그가 마법 생물학을 배웠음을 들어, 엔클레이오에 쓰일 마수를 준비하는 일에 밀어 넣었다. 자식이 정치 대신 마법을 파고드는 걸 싫어했으니, 분명한 목적이 있는 행동이었다.
아버지 쪽은 황실 마스코트 홍보로 인해 거대한 인기를 얻고 보니 엔클레이오 마수 준비 따위 사소한 일이라 아예 잊어버리신 듯하고.
그 대단한 마스코트가 사실 황태자궁에 있는 어느 작은 여인일 줄, 지고하신 황제 폐하는 상상이나 하실까.
연맹일보의 지면에 난 인터뷰를 떠올리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제가 어떤 새로 변하는지 알고 싶어 하는 여자에게 충분히 암시를 흘렸다. 그것이 맹랑한 인터뷰 내용에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었다.
병아리가 아다만티스라는 불확실한 주장은 하지 않고, 고스란히 상징성으로 넘겨 버렸다. 영리한 선택이었다.
만일 제 진짜 정체를 알게 되면 어떻게 반응할까?
저와 얘기를 나누던 그녀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귀여워서 좀 놀리면 나름대로는 매섭게 노려보는 모습이 참으로 사랑스러웠다. 그러다가도 마법에 대한 이야길 하면 누구보다 진지하게 집중했다.
“저는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긴 핑계 같았다. 하지만 완전히 단언할 수는 없었다. 만일 사실이라면, 상대는 의심의 여지 없이 황태자였다. 그의 이복형.
조금 들떴던 마음이 다시 형편없이 가라앉았다. 메디프는 제 기분도 제대로 모른 채 그저 자신이 조금 침착해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 당신은 또 이런 식으로 모든 걸 가져가는 거군요, 황태자 전하. 나의 것은 모든 것이 불온전한데.’
그때 그의 손바닥 안으로 종이학이 날아들었다. 내용을 확인하는 메디프의 입가에 다시 미약한 미소가 생겨났다.
오필리어 같은 여자에게 악감정이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마음이야 어쨌든 그녀가 선택한 건 황태자의 곁이었다. 클라우디아 황비가, 그의 어미가 가만있을 리 없었다. 상황은 이미 메디프의 손을 벗어났다.
하지만 온전히 입장이 갈라지기 전, 한 번이라도 얼굴을 봐 두는 거야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그는 안주머니에서 펜을 꺼내어 즉석에서 답장을 적어 내렸다. 쪽지는 접혔던 자국대로 다시 접혀 학이 되어 날아갔다.
연구동에 도착한 그는 로브를 입고 연구실로 들어섰다.
“전하, 오셨군요. 죄송하지만 변이율 분석 자료를 한번 검토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엔클레이오를 앞두고 마수 준비조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런 상황에 아카데미와 마탑을 거친 우수한 인재가 영입되었다. 게다가 황자였다.
연구원들은 천군만마를 얻은 듯한 든든함을 느끼는 걸로 모자라, 그에게 퍽 많은 부분을 의지했다.
“그러죠. 어디로 가면 되죠?”
“이쪽으로…….”
정신없이 일하던 메디프는 누군가 그를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섰다.
“전하, 여기 계셨군요.”
하지만 기대한 얼굴 대신 보이는 건 황비궁의 심복이었다.
“무슨 일이지?”
심부름꾼은 들고 있던 상자를 대뜸 황자에게 떠안겼다. 상자 안에선 삐약거리는 소리가 났다.
열어 보니 안에는 한 떼의 병아리들이 들어 있었다. 푸르게 물들이거나, 뒤싱겐이나 페리윙클가의 문장을 찍은 병아리들이었다. 메디프는 눈살을 찌푸렸다.
“황비 전하께서 직접 특별한 새들을 골라 보내셨습니다.”
“…….”
“황실의 마스코트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잖습니까. ‘레이디 오필리어’ 말입니다. 이때를 틈타 전하께서도 작은 새와 함께하는 모습을 대중 앞에 보이신다면, 금세 주목을 끄실 수 있을 거라 말씀하셨습니다.”
“하.”
자연적으로 푸른색을 띠는 병아리는 없다.
‘이런 새를 옆에 두는 게 좋아 보일 거라고, 어머니는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시는 건가.’
인위적으로 염색하고 모양을 낸 병아리들은 고통스럽게만 보였다.
“황자님?”
“이런 거 안 할 거니까, 더 이상 보내지 마시라고 전해라.”
“그, 그렇지만!”
“상자는 두고 가.”
심복은 상자를 내려놓고 허리를 숙였다.
상자 안의 측은한 병아리들을 살피려던 메디프는 인기척에 멈칫했다.
“2황자 전하!”
가벼운 걸음걸이에 짧게 굽슬거리는 금발이 흔들렸다.
이런 건 보여 주고 싶지 않았는데. 메디프는 조금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오필리어.”
* * *
황궁의 중앙에 접견실과 정무 공간이 있다면, 클레멘츠의 황태자궁은 반쯤 격리된 채 동쪽에 있었다. 홀홀 서편으로 걸으면 메디프의 2황자궁과 황비궁이었다.
메디프가 오라고 한 쪽은 그보다 뒤편. 황궁의 전경에서 잘 눈에 띄지 않으며, 엔클레이오가 열리는 후원과 가까웠다.
“황궁에 이런 곳이 있었군요.”
“황실이 필요로 하는 여러 연구 업무를 맡는 건물 중 하나예요. 우리끼린 연구 A동이라고 부르고.”
별다른 장식 없이 하얀 건물이었다. 주변에는 하얀 로브를 입은 사람들이 간간이 지나다녔다.
메디프 역시 흰 로브를 걸쳐 입고 있었다. 다만 끝단의 자수나 천의 재질이 조금 더 고급스러웠다. 가슴에는 늘 달고 다니는 마탑 마법사의 배지가 달려 있었다.
그가 마법사라는 거야 늘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누가 봐도 틀림없는 마법사 같았다.
조금 헝클어진 연푸른색 머리는 마치 그가 청마법사라고 광고하는 듯했다. 안쪽의 검은 셔츠는 하얀 로브와 대비되었다. 길게 빠져나온 소매에 반쯤 가려진 손은 머그잔을 들고 있었다.
“음, 일하는 중이셨나요?”
“그런 셈이죠. 제가 마법사인 건 싫어하시면서, 기회가 오면 빠짐없이 부려 먹으시는 어머니 덕분에.”
“아하하…….”
여기서 어머니란 황비였다. 흑막을 까는 데 함부로 맞장구치면 안 된다. 메디프는 들고 있던 음료를 한 모금 마시고 마저 대답했다.
“엔클레이오 준비를 돕고 있었어요. 은근히 잡일이 많죠.”
“아, 저도 마침 엔클레이오에 대해 여쭈러 온 참이에요.”
“그래요?”
거기까지 말하고 나는 어디선가 나고 있는 삐약삐약 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게 뭐예요? 헛, 어머나, 귀여워!”
상자 속에 가득 든 병아리라니. 때 아닌 심장 폭격이었다.
“그런데 병아리가 파랗네요? 이 병아리는 등에 문양이 찍혀 있고…….”
솜털의 결 때문에 윤곽이 뭉개진 문양들.
뒤싱겐 황가의 아다만티스 문장과, 꽃과 지팡이의 페리윙클 가문 문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