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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110)화 (110/218)

110화

그렇게 며칠 후 열린 티 파티.

“어쩜……!”

“과연…….”

“어쩌면!”

초면인 귀족 영애들이 많았다. 몇 명은 무도회 때 얼굴 정도는 본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은 한마음으로 외쳤다.

“만나 뵈어서 정말 영광이에요, 오필리어 님!”

“……삐약.”

내 머리 위에는 무려 왕관이 씌워져 있었다. 황족도, 뭣도 아닌데 왕관이.

“저 달콤한 울음소리……! 과연, 천상의 새인 아다만티스의 새끼를 연상시키는군요.”

아부가 과하다.

“파티 장소도 어쩜 이렇게 아늑하면서 우아하게 꾸며져 있는지. 이 자리에 있었다는 게 두고두고 자랑거리가 되겠어요.”

“후후. 그런가요? 제가 약간 숟가락을 얹긴 했지만, 사실 티 파티 준비에는 오필리어 양의 고견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답니다.”

그 과한 아부를, 내 옆에 착 붙어 앉아 있던 카밀이 즉시 받아 한바탕 부풀렸다. 자신의 수고와 공로는 전혀 치켜세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머나, 정말요!”

“이를테면 테이블의 이 바이올렛 꽃도 오필리어의 안목이죠.”

과장도 이런 과장이 없다.

카밀은 이미 전체적인 분위기와 더없이 어울리는 세 종류의 꽃을 준비했다. 그리고 솜사탕 위를 걷게 하는 듯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골라 보렴, 오필리어.”

나는 대충 보라색 바이올렛 다발을 향해 종종 걸어갔고, 그렇게 그 꽃이 메인으로 테이블에 꽂히게 되었다.

단지 그뿐인데도 나를 향한 과분한 칭찬이 티 테이블 위를 맴돌았다. 흡사 용비어천가를 듣는 듯한 기분에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하지만…… 달콤한 쿠키와 따뜻한 차를 마시며 병아리를 귀여워하는 아가씨들은 즐거워 보였다. 단지 대세에 편승하려 한다기엔 저 못 견디게 사랑스럽다는 얼굴들은 진심이었다.

그래, 어쨌든 다들 행복해 보이니 된 거 아닐까. 나는 마음 편히 쿠키를 쪼아 먹었다.

“그나저나, 다들 봉마 의식 때 입고 갈 사냥복은 준비하셨나요?”

“저는 저번 달에 주문을 넣어 이제 제작이 막바지예요. 녹색으로 물들인 송아지 가죽을 사용했고, 바지통은 좁게 했답니다. 아버지와 함께 말을 타고 숲에 들어갈 생각이거든요.”

“어머나. 저는 이번엔 할머니를 모시고 천막에 있다가 의식만 참관할 생각이에요.”

봉마 의식……?

사냥 도구, 짐승, 천막, 봉인진 같은 말들이 들렸다.

그러고 보니 아직 오지 않은 이벤트가 하나 있었다. 매년 가을마다 열리는 현왕의 봉마 의식, 엔클레이오 투 바실리아.

초대 황제가 마족들을 봉인하던 의식을 재현했고, 귀족들이 황궁 후원에 떼거지로 모여 치른다는 것 외엔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뭔가 아주 중요한 일이 일어났던 것 같은데.

“작년에 준비되었던 마수는 꽤 무시무시했어요.”

그 말이 왠지 모르게 귀에 꽂혔다. 그리고 나를 은근한 불안에 빠뜨렸다.

석연찮음. 무언가 놓친 듯한 느낌.

도서관에서 메디프가 ‘마브로스 아르팍티카’가 나오는 책을 보여 줬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 * *

“나는 이만 갈게, 오필리어.”

카밀은 아쉬움을 그득 담아 작고 부드러운 병아리를 어루만졌다.

“삐약삐.”

작은 눈을 사랑스럽게 반쯤 감으며 삐약거리는 병아리. 마치 웃으며 잘 가라고 인사하는 것 같았다. 예전 같았으면 지나친 바람이 만들어 낸 제 착각이라 치부했겠지만…….

카밀은 바로 일어나지 못하고 그 조그만 볼을 쓰다듬었다.

‘내게 너의 비밀을 말해 줘. 어떤 표시라도 좋으니 네가 알려 줘. 내가 상처받지 않을 수 있게…….’

물론 오필리어의 정체는 보통 비밀이 아니었다. 신중할 수밖에 없는 입장을 이해했다. 그러나 자꾸만 그 비밀을 오필리어에게 직접 듣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왜일까. 오필리어에게 자신이 뭐라도 된다고 생각해 버렸기 때문일까.

티파티 준비를 도와 달란 편지를 받았을 땐 바보처럼 기뻤다. 필요할 때 자신을 떠올려 주었다는 데 소녀처럼 들떠 버렸다.

실은 저 혼자 이렇게나 좋아할 뿐인데.

“삣삐.”

아련한 얼굴로 돌아서려던 카밀을 가녀린 울음소리가 붙잡았다.

“뺘욱비빅.”

“……!”

얇고 긴 옷소매를 잡아당기더니, 손목과 손 사이에 작은 몸을 끼워 들어가 누웠다. 날개를 꼼지락거려 솜털을 부풀리는 모습에 카밀은 다른 쪽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슬픔은 한순간에 날아가 버렸다. 슬프다니 웬 말인가, 이런 네가 내 앞에 있는데!

“앞으로도 내 옆에 있어 줄 거지?”

“뺘! 뺘아!”

명랑한 그 대답이 긍정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때가 되면 어련히도 잘 알려 줄까. 오필리어가 행복하다면, 카밀은 다 괜찮았다.

한편, 보송보송하기 짝이 없는 광경을 불만스레 쳐다보는 눈동자가 있었다. 창문 너머 멀리서 티 파티 현장을 지켜보던 클레멘츠였다.

평소에 잘 쓰지 않던 여분의 사무실에 오늘의 서류가 옮겨져 있었다. 그는 후회했다. 굳이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는데, 그의 병아리가 잘 해내는지 지켜보려다가 기분만 더 나빠졌다.

오필리어가 다른 사람의 손에 저렇게 몸을 내맡기는 게 싫었다. 아기 새의 매력에 반해 허우적대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녀 자체에 대한 마음을 자각한 후에는 이럴 때의 불쾌감이 두 배는 강해졌다. 당장이라도 난입해 오필리어를 빼앗아 오고 싶은 걸 참았다. 억지로 서류에 집중하길 수차례 반복했다. 질투- 그래, 바로 이 감정이 질투일 것이다.

“차라리 티 파티를 금지시킬까.”

“하지만 오필리어 님께선 즐거워 보이십니다.”

그의 앞에 책상을 두고 업무를 처리하던 카시스가 대답했다. 입바른 소리에 눈을 흘기자 아예 한 술 더 떴다.

“그리고 그분의 자유를 제한하는 건 계약에도 어긋나고요.”

“……알고 있다.”

“너무 스스로를 괴롭히지 마시지요. 황태자비로 맞아들이신 다음에도 사교 모임 한번 못 가게 막으실 겁니까?”

황태자비.

그 말을 듣자 심장이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평소 충성스럽고 사무적이던 카시스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오필리어와 ‘황태자비’라는 말을 연결시키자, 왠지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렸다.

그간 황태자비라는 단어는 그의 의사와 무관하게 다른 여자들에게 붙는 수식어였다. 전혀 결혼할 생각이 없는 카밀 드 베일리스가 가장 유력한 황태자비 후보로 거론되는 것이 얼마나 황당했던가.

하지만 오필리어라면 달랐다.

‘나의, 비.’

클레멘츠는 아주 간신히, 눈썹에 힘을 담아 카시스를 노려볼 수 있었다. 카시스는 얌전히 문서로 시선을 내리며 몰래 웃었다. 실로 오랜만에 어린 시절처럼, 가까운 연상의 형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 * *

티파티 때 느꼈던 불안함은 가만히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마수를 준비한다고? 준비한 마수들은 어떻게 되었더라.

벨라가 저절로 생각났다. 마수는 전부 벨라의 친구나 마찬가지인데.

“오필리어,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느냐.”

복도 창가에 앉아 있자니, 클레멘츠가 다가와서 물었다. 퍽 다정한 기색이었다.

“혹시, 이번 엔클레이오에 참여하시나요?”

“물론이다. 황태자로서 의식 주관을 도울 예정이야.”

“그럼…….”

의식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물으려다, 직접 한번 보는 게 낫겠다 싶어졌다.

“저도 데려가실래요? 저 나름 귀족이잖아요.”

“안 돼.”

“와, 감사합……! 어, 네?”

당연히 수락할 줄 알았는데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왜요? 저 한 번도 엔클레이오를 직접 본 적 없어요. 늘 혼우드 대표로 모나한 백작님만 가셨거든요! 모든 귀족들이 참여하는 건데, 서럽게!”

레오라가로 말할 것 같으면, 기본적인 살림 메꾸기에도 급급한 나머지 이런저런 귀족 행사는 다 빠지는 나날이었다. 어디 한번 나가려면 새 옷과 하인들이며, 마차와 제반 물품이 필요한데 무슨 돈이 있어 다 구하겠는가.

“제가 뭐 옆에 달라붙어 있겠다고 한 것도 아니잖아요. 방해 안 되게, 눈에 안 띄게 사람들 틈에 묻혀 있을게요.”

“……그래도 안 된다.”

와, 너무하네!

제국의 귀족들을 다 모아 놓으면 우글우글할 텐데, 거기 꼽사리 껴 있는 것도 안 된다고?

나를 무슨 가는 곳마다 사고 치는 철부지로 아나. 아니면…… 내가 거기 있을 자격이 안 된다고 생각하나?

처음에 클레멘츠가 나를 볼 때의 시선이 그랬다. 하녀나 다름없는 시녀. 수도와는 영원히 연이 없을 듯한 지방 하급 귀족의 여식. 실제로 원래의 ‘오필리어 레오라’라면 평생 가도록 엔클레이오 따위 구경도 못 했을 것이다.

그는 머뭇거리다가 달래는 듯이 말했다.

“다들 엔클레이오가 오락 행사쯤 되는 것처럼 여기지만, 위험하다. 엄연히 창칼이 날아다니고 맹수가 들끓는 곳이야.”

“마수도요?”

“그래, 마수도. 그러니 더더욱 가면 안 되지 않겠느냐?”

“왜 과보호하세요? 병아리 형태로 가겠다고 우기는 것도 아닌데. 인간인 저는 성인이고 스스로를 보호할 힘이 있어요.”

사실 그런 거 없다. 믿는 거라곤 마력이 담긴 목소리와 뜀박질 잘하는 다리뿐.

하지만 엔클레이오에 참여하는 다른 귀족들은 그마저도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처럼 최소한의 무장만 갖춘다면 나도 다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이미 과보호 모드에 들어간 클레멘츠는 들어먹지 않았다. 아예 말을 돌려 버렸다.

“그날은 파이 가게에 양을 넉넉히 보내 두라고 하겠다. 소설책과 네가 좋아하는 다른 것들도 준비해 둘 테니, 궁 안에 안락하게 있어.”

언뜻 굉장히 잘해 주는 것처럼 들리게 말은 잘하는구나. 제 할 말만 하고 돌아서는 은빛 뒤통수를 노려보다가 결정했다.

메디프에게 물어봐야겠다.

방으로 돌아가 그에게 받았던 편지지에 만나자는 이야길 썼다. 종이학이 되어 날아갔던 편지는 얼마 되지 않아 돌아왔다. 지금 바로 한 건물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흥, 클레멘츠 따위.”

바로 준비하고 메디프가 일러 준 건물을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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