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모든 귀족들이 한자리에 모인 그때가 기회입니다.”
현 황위 후계자인 만큼 그는 이번 봉마 의식을 주도할 것이다. 책잡히기에 이만큼 좋은 무대도 없었다. 클라우디아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생명의 소중함을 내세우고도, 제 손으로 생명을 희생시키게 되겠군.”
“그렇죠.”
어쨌거나 마수도 생명은 생명이었으니.
“귀족들은 황태자의 진의를 의심하게 될 겁니다. 인기를 위해 그럴싸하게 지어낸 말일 뿐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되겠지요.”
“언론으로 떠올랐으니, 언론으로 가라앉는 것도 쉽겠군.”
그들은 어느새 서로 고개를 끄덕여 댔다. 베일리스 후작은 제법 비열해 뵈는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되면 황태자의 천하도 끝입니다.”
* * *
나파르 아주머니의 파이 가게 2호점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파이 자체의 맛은 보장된 것이었고,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마스코트, ‘레이디 오필리어’의 캐릭터 사업까지 끼워 파니 그야말로 호랑이가 날개를 단 격이랄까.
정해 둔 폐점 시간 2시가 되기 전에도, 재료가 동나서 일찍 문 닫는 날이 허다했다.
아니, 거의 오픈하자마자 다 나간다고 봐도 좋았다.
소문이 퍼지자 너도나도 그 파이를 먹어 봐야겠다고 난리였다. 귀족들은 파이를 사러 가는 하찮은 일에 직접 나설 수 없어 시종을 보냈다. 새벽마다 가게 앞은 직접 사러 온 평민들과, 높으신 나리들의 심부름을 온 시종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내 앞에 놓인 보고서에는 그로 인해 벌어진 작은 해프닝들이 요약돼 있었다.
어디 사시는 백작 부인입네, 무슨 후작님께서 먼저 드셔야 하네, 그럼 그분들이 직접 오지 왜 종 주제에 새치기를 하냐며 일침 날리는 용감한 평민까지. 결국 멋진 나파르 아주머니께선 오로지 먼저 와서 줄 선 순서대로만 파이를 팔겠다고 못을 박았다.
줄이 너무 길어져서 주변 장사를 방해하는 바람에 곧 번호표까지 발부되었다고.
물론 나는 고생할 것 없이, 매일 앉은 자리에 대령되어 오는 파이를 먹고 있었다.
“행복해…….”
보존 마법 상자에 들어 있던 파이는 바삭바삭하고 향기로웠다.
향긋한 찻물을 한 모금 넘기고, 다음 파이를 집어 들며 보고서를 넘겼다.
파이 때문에 귀족들이 일찍 일어나느라 고생이라는 보고도 있었다. 연회, 회동, 살롱 등이 밤늦도록 이어지기에 귀족들의 평균 기상 시간은 늦은 편이었다. 그러나 가게는 오전 8시에 문을 열었다.
사 오는 것까진 종에게 시킬 수 있다. 보존 마법 상자에 넣어 두면 갓 구운 것처럼 바삭하고 따뜻하게 보존된다. 하지만 어떤 궁금증은 졸음까지 이기기도 한다.
유명하다는 파이를 갓 사 오자마자 맛보기 위해선 높은 분이라도 별수 없이 일찍 일어나야 했다. 비몽사몽 툴툴거리다가 맛있는 파이를 먹고 잠을 깰 귀족들을 상상하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아주머니, 부자가 되셨군요.”
보고서에 찍힌 매출액을 보니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조만간 3호점, 4호점 계약도 진행될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야말로 프렌차이즈화. 달콤한 레몬 향기가 제국을 지배할 날도 머지않은 것이다.
나는 그저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왠지 내게도 약간의 지분이 돌아왔다.
“호호. 내가 언제 수도에서 이렇게 크게 장사해 볼 줄 알았나. 다 오필리어 아가씨가 알아봐 준 덕분이니 조금은 가져가요.”
지분율이 작은지라 큰돈은 아니었지만, 꼬박꼬박 들어온다면 분명 레오라가의 가계에 도움이 될 것이다.
어머니 아버지, 제가 해냈습니다. 수도에서 돈 벌었어요.
보고서를 접어 놓고 차를 한 모금 더 마시고 있으니 유렌과 카렌이 들어왔다.
“오필리어 님! 이걸 보세요!”
마스코트 기사가 나간 뒤로는 아침 일정이 좀 달라졌다. 메이드들이 두툼한 편지 봉투 뭉치를 들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오늘의 팬레터인가요!”
“조금 달라요.”
나(병아리 상태의 나지만)를 향한 따뜻한 애정의 말들을 읽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데 익숙해지려던 참이었다.
“그럼요?”
유렌은 대답 대신 테이블 위에 봉투 뭉치를 올려 두고, 한 장을 내밀었다. 뜯어 보니 초대장이었다.
초대장…….
[클라티아 제국 황실의 상징, 사랑스러운 레이디 오필리어를 사브리나 남작가에서 열리는 티 파티에 초대하고자 합니다.]
그다음, 또 다음 봉투도 마찬가지였다. 날짜나 주최 가문, 규모는 제각기 달랐으나 분명 병아리 오필리어를 티 파티에 초대한다는 편지였다.
[꼭 오셔서 자리를 빛내 주셨으면…….]
뿐만이 아니라 직접 이쪽으로 오겠다는 방문 요청들도 있었다.
[가까운 시일 내에 만나서 함께 간식을 먹고 싶습니다.]
“이, 이거 뭐야. 왜 나를 만나겠다고 하는 거지? 무슨 이득이 있다고?”
“후후! 그야 오필리어 님이 지금 워낙 대세시니까요.”
그랬다. 대제국의 최고 화젯거리가 되었으니 이 정도의 관심은 당연한 거였다.
인터뷰를 할 때는 그저 클레멘츠의 행동을 수습한다고만 생각했지,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미 충분히 과한 관심을 받고 있었으니까.
“아…….”
“어떤 방문 요청을 받아들이시겠어요? 고르기만 하시면 저희가 일정을 짜고 준비할게요!”
“티 파티 참석은요? 올리그 자작가의 티 파티는 양식 있기로 유명하지요!”
적극적으로 찬동하는 메이드들. 마치 모시는 아가씨의 사교계 일정을 조율하려는 듯한 태도였다. 주체가 병아리라는 건 잊지 않았겠지? 걱정을 담은 내 눈빛이 살짝 흐려졌다.
“고민을 좀 해 봐야겠어요.”
귀족들은 소문을 좋아했다. 소문의 주인공인 병아리를 직접 보려고, 그리고 그 만남을 또다시 이야깃거리로 삼으려는 거였다.
조금 다른 목적을 가진 이들도 있을 터였다.
클레멘츠, 혹은 카밀과 연을 쌓고 싶었던 이들이 이쪽을 우회로로 삼았을 수도. 자고로 내 새끼를 예뻐하는 사람이라면 호감이 가고 보는 법이니.
‘과해, 이건. 한낱 병아리에게 쏟아지는 관심으론 너무 과하다고.’
제국이 미쳐 돌아가는 것 같았지만, 기폭제를 터뜨린 건 나였으니 할 말이 없었다.
아무 요청에도 응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아닌가. 황실의 마스코트까지 무단으로 창조해 냈다. 클레멘츠에게 유리한 변명을 만들어 주고자 시작했으니, 이왕 한 거 한 발자국만 더 나가자.
어느 한 요청에 응하는 건 형평성에 문제가 있었다. 누구는 받아들이고 누구는 거절하면 서운해할 사람이 생긴다.
그러니 곰곰이 생각한 끝에 결정했다. 황태자궁에서 티 파티를 열자고.
독대 요청이나 초대장을 성의 있게 보낸 이들을 꼽으니 얼추 티 파티의 규모에 맞는 인원이 추려졌다. 문제는 무늬만 귀족 영애인 내가 한 번도 이런 사교 모임을 개최해 본 적이 없다는 것.
골머리를 앓던 나는 명쾌한 해답을 찾아냈다.
‘잘하는 사람에게 부탁하자!’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카밀에게 보냈다. 하지만 그건 실수였다.
“그건 이쪽. 아니, 아니! 조금 더 왼쪽에 놓아야죠. 미감의 균형을 맞춰야 해요. 그게 제일 중요하니까.”
“옙, 옙…….”
“어, 아니! 벽걸이 장식을 기울여서 걸었잖아요. 제 손날을 봐요. 이쪽이 정방향인 것도 모르다니…….
“죄송합니다, 베일리스 영애!”
“하, 됐어요. 음, 이 쿠키는 제하세요. 생김새는 밋밋한데 맛은 너무 튀는군요. 체리를 넣은 꽃 모양으로 다시 굽는 게 좋겠어요. 제가 데려온 파티시에에게 방법을 배우도록 하세요.”
그냥 적당히, 구색을 갖춘 티 파티면 되는데, 카밀은 본인 집에서 여는 파티인 양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카밀은 황태자궁의 궁인들을 위풍당당하게 부리고 있을 뿐 아니라, 최고 효율로 준비하겠다며 베일리스가의 사용인들까지 데려왔다. 거기다 역대급 티 파티로 만들어 주겠다며 개인 소장한 장식품이나, 사비로 고용한 전문가들까지 데려왔다.
그래서 황태자궁은 때 아닌 야단법석이었다.
“삐약.(이, 이거 괜찮으려나?) 뺙뺘아.(이렇게까지 안 해도…….)”
내가 실수했다. 카밀은 날 갖기 위해서 납치도 결투도 불사한 여자다. 그냥 적당히 도와주고 넘어가지 않으리란 걸 예상했어야 하는데.
“아, 나의 오필리어!”
눈코 뜰 새 없이 움직이다가도 조그만 ‘삐약’ 소리에 이쪽으로 다가왔다.
“많이 지루하지? 금세 끝내고 놀아 주고 싶은데, 우리 오필리어를 위한 최고의 티 파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준비할 게 끝이 없네.”
“삐육.(그냥…… 그냥 적당히 해.)”
“아!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
카밀은 두 손으로 날 들어 올려 제 뺨에 부볐다. 헉, 미인의 얼굴이 너무 갑자기 가까워졌어.
“오필리어. 나는…… 너만 행복하다면, 네가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어.”
“삐약?”
닭이 되어도 지금처럼 귀여워하겠다는 뜻일까? 갑자기 고백해 온 진심에 마음이 뭉클해졌다.
“또 누구를 좋아하든 그것이 네 선택이라면 존중해야겠지. 그게 ……는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삐이?”
이어진 말은 혼잣말에 가까웠다. 고개를 갸웃거리자 카밀은 아무 것도 아니라며 내 부리를 톡톡 건드렸다.
“당신은 참 사랑스럽죠. 그 귀한 마음을 부디 합당한 이에게 쓰게 되길 바라요.”
왠지 무도회 날 카밀에게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꼭 내가 누굴 좋아할 거라는, 자신은 그게 좀 섭섭하지만 어른스럽게 받아들이겠다는 뉘앙스와 비슷했다.
설마 뭔가 알아차린 건가? 카밀은 장밋빛으로 볼을 붉히며 속삭였다.
“디저트를 좀만 더 확인하고, 내가 가져온 모이를 먹자꾸나.”
아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