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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108)화 (108/218)

108화

오필리어는 몰랐지만, 밖으로 나온 그들을 응시하는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다.

언제나 수족이 되어 황태자를 지키는 그림자 심복들과는 달랐다. 황태자의 그림자들은 미행하는 자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저자는…….”

주군께 보고했으나, 그는 그저 내버려 두라 일렀다. 위협조차 되지 않는 존재. 염탐꾼의 주인이 누군지 알아차린 탓이었다.

묵인 속에 미행을 계속하는 자의 정체는 시엘로였다.

“해 줘야 할 일이 있어, 시엘로.”

“결국 이 몸이 필요하다는 걸 인정하시는군요, 아씨.”

독기를 품고 살아가던 베일리스의 아가씨. 한동안 단꿈에 허우적대는 얼굴로 사람을 허망하게 하더니만. 황실의 마스코트 건으로 기자들이 몰려든 날은 꼭 예전처럼 공허하고 수심에 찬 표정이었다.

“밀착 감시. 어딜 가고 무얼 하든 따라붙어서 조사해 줘. 일거수일투족 모두를.”

“오오, 간만에 피가 끓는군요!’

집요함이 요구되는 스토킹은 시엘로가 자신 있어 하는 분야였다.

“아가씨, 그런데 누구를?”

“누구긴, 나의 오필리어지.”

“…….”

돌고 돌아 다시 병아리인가. 병아리를 스토킹한다니. 시엘로의 커리어가 울고 있었다.

하지만 노는 것보단 낫다는 생각으로, 시엘로는 나름 성실하게 추적에 임했다.

황궁 잠입은 까다롭지만, 이런 종류의 구린내 나는 뒷일에 능숙한 시엘로에겐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실제로 저번에도 버젓이 황태자궁에 진입하여 병아리를 납치하지 않았던가.

“자네도 오늘 당직인가?”

“그치, 뭐. 마누라랑 새끼들 먹여 살리려면.”

물론 시엘로에겐 아내도 자식도 없었다.

휴일 아침. 같이 일하게 된 정원사에게 넉살을 떨고는 거름 담긴 수레를 끌고 이동했다. 사전에 알아봐 둔, 그 병아리의 방이 들여다보이는 위치였다.

[기상 시간은 대충 오전 7시로, 전속 메이드들이 아침 단장을 시켜 주러 오는 시간을 통해 알 수 있음. 직후 황태자의 집무실로 이동하는 걸 보아 황태자의 생활 리듬에 맞춘 듯함.]

밀착 감시를 하다 보니 잠이 부족해 쩍 하품이 나왔다.

[병아리와 별개로 황태자는 최근 관심을 두는 영애가 생겼는데…….]

우연히도 그 여자 역시 이름이 오필리어였다. 시엘로는 수첩에 방금 적어 내린 보고 내용에 두 줄을 찍찍 그었다.

조사 대상은 병아리였지 황태자의 연애 현황 따위가 아니었다. 본분을 잊어선 안 된다. 그는 수첩을 넣고 삽으로 비료를 퍼 설렁설렁 뿌리는 시늉을 했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어 창문 너머를 봤을 때.

‘염병, 저게 뭐야.’

하마터면 수레를 엎을 뻔했다. 무슨 사술인지, 아니면 흑마술인지 모르지만 분명 그 환장할 병아리가 여자로 변하는 걸 보았다. 그것도 황태자가 한창 열 올리고 있는 그 소녀였다.

오필리어 레오라.

‘이걸 어떻게 전한담?’

아담하게 꾸미고 나온 여자와 수도를 전전하는 황태자를 보니 더 확실해졌다.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남자의 모습이었다.

두 눈으로 보고도 도대체 믿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던 황태자가 사랑을 하는 것. 대상은 본인과 정반대의 분위기에 한미한 가문의 영애인 것. 그 영애는 병아리로 변하는 데다 황실의 마스코트인 것.

‘카밀 아가씨가 괜찮을지.’

마음을 완전히 접었다곤 하는데 한동안 그리도 목매던 황태자였다. 간신히 정 붙인 병아리인데,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까?

하지만 거기까진 그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그저 명 받은 일만 하면 될 뿐. 시엘로는 소상히 보고하고 물러났다.

“……그렇구나.”

카밀은 곧게 앉아 중얼거렸다. 그렇구나. 그런 거였어.

“애당초 갑자기 병아리가 튀어나온 것부터 부자연스러웠어.”

고개를 젖혀 창밖의 쾌청한 하늘을 눈에 담았다. 분명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생각 외로 화가 나거나 슬프진 않았다.

벌써 정리한 감정이었다. 클레멘츠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해서 하얀 재만 남은 질투심이 되살아나지 않았다.

이미 사랑하게 된 존재였다. 과거의 집착이 지금의 사랑을 흐려지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레오라 남작 영애를 향한 제 알 수 없는 호감의 이유를 알고 나니 명쾌했다.

이 오필리어가 그 오필리어였다. 둘은 같으니 같은 감정이 갈 수밖에.

다만 가슴 한쪽이 텅 빈 듯 허전했다. 카밀은 손끝으로 심장 언저리를 더듬었다.

그 아이를 곁에 둔 자는 클레멘츠였다. 변신의 진실을 알고 있는 쪽도 그녀가 아닌 클레멘츠였다.

상실감. 소외감.

꼭 푸른 드레스를 입은 오필리어 레오라가 황태자를 따라 사라졌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 * *

황비에게선 싱그러운 정원의 냄새가 났다. 메이드들이 따뜻한 물에 적신 수건을 가져와 흙이 조금 묻은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레 닦아 냈다. 투박한 목장갑을 벗겨 내고, 되는 대로 질끈 묶었던 머리를 풀어 단정히 빗질했다.

테이블 위에는 주요 신문들이 놓여 있었다.

[황태자 전하의 지지 여론, 유례없는 뜨거움.]

인형처럼 앉아 있던 그녀의 내면에서 분노가 끓어올랐다.

메디프가 돌아오는 시점에 맞춰 서서히, 여론이 황태자를 떠나도록 움직이려고 했다.

준비는 넉넉했다. 오랜 세월을 엎드리고 버틴 끝에 드디어 적절한 때가 왔다고 여겼다. 숨죽이고 산 탓에 사람들은 클라우디아에게 야망도 권세욕도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그녀는 남의 자식이 황제가 되도록 내버려 둘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다행히도 황태자에겐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그것을 가리기 급급한 황제의 뜻대로 그녀 역시 오랜 세월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메디프를 황위에 올리기로 결심했으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적을 끌어내려야 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만 되면 꼭, 이놈의 병아리가 끼어들어 모든 것을 망쳐 놓았다.

처음에는 연인인가 애완동물인가로 화제를 끌어모으더니, 볼수록 가관이었다. 베일리스의 여식과의 결투나, 무도회 파트너로 대동까지. 화제성이란 화제성은 다 독식했다. 클라우디아가 퍼뜨리려던 소문 따위는 자연스럽게 묻혀 버렸다.

“소문 들으셨소? 황태자 전하 말이오. 사실 그분은…….”

“아, 황태자 전하 말씀이오? 대체 그 병아리는 어디서 데려오신 거랍니까? 으하하하!”

다들 병아리에 정신이 팔렸을 뿐, 황태자의 출생에 얽힌 음습한 비밀 따위엔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대는 뭐가 좋다고 이렇게 웃고 있었지?”

어느 기사에서 활짝 웃고 있는 베일리스 후작을 보니 더 화가 치밀었다. 클라우디아는 그 신문을 집어 바닥에 내던졌다.

‘아이쿠!’

고개를 숙이고 있던 베일리스 후작은 화들짝 물러섰다. ‘황실의 마스코트’ 인터뷰가 나간 후, 후작가로 몰려든 기자들에게 웃으며 사진을 찍혀 주었다. 베일리스가를 홍보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랬던 게 황비의 노여움을 살 줄이야. 후작은 신문을 꾸깃꾸깃 접었다.

“그게, 그게 아닙니다 전하! 저라고 뭐 황태자나 병아리 따위가 좋겠습니까? 다만 제 딸아이의 장단에 어쩔 수 없이 맞춰 준 것뿐이지요.”

“그대의 여식 말인가?”

“예, 물론입니다. 어휴, 그 애는 도저히 통제가 안 됩니다!”

그 말에 황비는 조금 누그러졌다. 통제가 안 되는 자식을 가진 건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병아리를 진작 죽여 버렸어야 하는데.”

“그…… 그러게나 말입니다.”

기회가 충분히 있었으나, 그때는 이렇게나 방해가 되는 존재일 줄 몰랐다.

갑자기 인기가 치솟는 바람에 접근하기도 힘들어졌다. 클레멘츠 놈은 물론 카시스 후작이며 카밀 드 베일리스며 다같이 싸고돌기에 바쁘니.

살살 눈치를 보던 베일리스 후작이 입을 열었다.

“병아리는 곧 닭이 될 텐데, 이 인기가 뭐 얼마나 가겠습니까.”

공식 인터뷰에서는 평범한 병아리라고 되어 있었지만, 그러기엔 병아리인 기간이 너무 길었다. 아마 희귀종이라는 소문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제아무리 비싸고 귀한 몸이라도 고작 조류다. 잘해야 조금 큰 닭이나 칠면조, 혹은 공작 비슷한 형상일 터.

새가 다 자라면 인기는 자연히 시들해질 테니 걱정할 필요 없다는 게 후작의 의견이었다.

“새 새끼야 알아서 크도록 내버려 두고, 전하와 저희는 할 일을 계속하면 됩니다. 곧 ‘엔클레이오’가 다가오지 않습니까?”

엔클레이오 투 바실리아.

‘현왕의 봉마 의식’이라는 뜻을 가진 황실 연례행사로, 줄여서 엔클레이오라고 불렀다.

그 옛날 초대 황제 유스티온은 거대한 봉인진을 그려 무수한 악마와 마물들을 가두었다. 직접 피를 바쳐 봉인의 구속력을 이루었기에, 이후 뒤싱겐 황가의 피에는 마족을 구속하는 힘이 깃들게 되었다.

이후 황제들은 귀족들을 불러 놓고 제국을 성립시킬 수 있었던 그 봉마 의식을 재현했다. 제국의 정체성을 상기시키고 결속력과 충성심을 다지겠다는 이유였다.

황궁 뒤뜰에 축소판의 봉인진을 그렸다. 이미 전부 가둔 마물들을 다시 봉인할 수는 없으니, 대신 마기를 먹고 변이한 마수들을 희생시켰다.

초기엔 마수 사냥이 겸해졌으나, 지금은 마수 개체 수가 줄어들어 연구소에서 인위적으로 변이시킨 마수를 사용하는 실정이었다. 모여든 귀족들은 대신 황궁 뒤뜰의 숲에서 사냥을 했다.

사냥이 끝나면, 쇠사슬로 묶고 우리에 가둬 실어 온 마수들을 봉인진 위로 끌어냈다. 모든 절차의 마무리로 황제가 피를 내어 주문을 외우며 봉인진을 발동시켰다.

“황태자는 그때만큼은 병아리를 데려오지 않을 겁니다.”

연구실에서 만들어 냈다 하지만 마수가 판을 치고, 사냥 무기를 가진 귀족들이 가득한 자리였다. 병아리에 미쳐 있는 황태자니 그런 위험한 자리에까지 데려올 리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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