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클라티아의 수도 클랏샤는 중대륙의 북단에 위치한 항구 도시였다. 바다 너머에는 신성 왕국과 마탑 등이 위치한 북대륙이 있었다.
도시를 감싼 사파이어 빛 물결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그 순간, 나는 ‘이번 생’에서는 바다를 처음 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와, 바다다!”
예의상 외쳐 줘야겠지. 그 인사에 화답하듯 바닷바람이 강하게 불어 옷자락을 휘날렸다.
“바다는 처음 보나?”
“네, 그런 셈이죠.”
미세 플라스틱과 적조 현상 등등이 없는 바다는 말이에요.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새삼 더 깨끗해 보이는 물결이었다. 우리 강산 푸르게 푸르게.
바람에 클레멘츠의 앞머리가 살짝 뒤집혀, 이마와 눈썹의 선이 은근하게 드러났다. 나를 보는 그의 입술이 살짝 벌어져 있었다.
불공평했다. 거센 바람에 뒤집혔음에도, 마치 전문 스타일리스트가 황금의 노하우로 절묘하게 흐트러트린 듯한 저 모습. 반대로 나는 거지꼴로 산발이 되었을 거라 생각하니 괜스럽게 얼굴이 붉어졌다.
“빠, 빨리 들어가요.”
목적지는 바닷가에 지어진 큰 건물이었다. 배 모양의 엠블럼이 붙어 있는 건물은 클랏샤 항만 사무소였다. 상인의 차림을 한 사람들, 무역 길드의 서류를 손에 든 이들이 바삐 오갔다.
클레멘츠가 걸음을 멈춘 곳은 큰 회의장의 입구였다.
“잠시.”
들어가기 전, 그는 내게 손을 뻗었다.
“……?”
곧고 기다란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넘기고 헤집었다. 바닷바람에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해 주는 거였다. 나는 완전히 멍해진 채 그의 손길을 받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클레멘츠는 병아리일 때부터 날 살뜰히 챙기느라 잊어버린 모양이지만, 지금은 어엿한 성인인 데다 신분도 한참 낮은 내게 이럴 이유가 없었다. 격에 맞지 않은 일이었다.
“됐다.”
고민하는 사이, 그는 마지막으로 보석 머리핀에 끼어 있었던 몇 가닥을 조심스럽게 떼어 냈다. 낮은 시야에 그의 웃는 입매가 보였다.
클레멘츠가 회의장 문을 밀어젖힐 때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안 돼, 이런 칠칠치 못한 모습을 보이다니. 비서 점수 완전 감점이잖아! 자기 머리카락도 관리 못 하다니, 아무리 유능한 사람이라도 제 평가를 깎아 먹힐 일이었다.
낭패감을 억지로 추스르며 안으로 들어갔다.
긴 책상을 둘러싸고 모인 사람들은 바깥에 돌아다니는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차림이었다.
대부분이 상인 같았고, 드문드문 보석을 두른 귀족이나 설계 도면을 다듬고 있는 기술자도 있었다. 귀족들 가운데는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오셨군요, 전하. 오필리어 님.”
“안녕하세요, 듀프레 후작님.”
카시스까지 있는 걸 보면 중요한 일이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긴장이 두 배였다.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황태자 전하. 레이디께서도.”
클레멘츠가 앉을 상석은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적당히 빈자리에 앉으려고 했는데, 왠지 그의 옆자리로 안내되었다. 클레멘츠의 왼쪽엔 카시스가, 오른쪽엔 내가 앉았다.
“전하께서도 오셨으니, 설명을 시작하겠습니다.”
그가 낮게 속삭였다.
“곧 끝날 거다.”
금세 끝나 버릴 테니, 그사이에 어떻게든 알아서 핵심을 파악해 내라는 뜻인가? 과연 최종 면접이라서 그런지 난이도가 꽤 있었다.
좋았어. 그렇다면 두뇌 풀가동이지. 가게를 보면서 달달한 간식을 먹었으니 포도당 충전 상태도 나쁘지 않았다. 내친김에 필기도 하려고 앞에 놓인 펜과 종이를 집어 들었다.
나오는 이야기는 조금 뻔하지만, 해양 무역 투자였다.
외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며, 남쪽과 동쪽 바다 너머 멀리의 나라들과 교역 경쟁이 시작되었다.
원래는 원거리일 경우 텔레포트 마법진을 이용해 교역품을 실어 왔다. 하지만 마탑이 내는 상품이 다 그렇듯 텔레포트 이용료도 비쌌다. 원거리일수록, 이동시키는 양이 많을수록 이용료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마탑에 허다한 로열티를 지불하니 손해를 메우기 위해 수입품의 가격은 비싸지고, 가격 경쟁력이 없어지니 사실상 이득을 취할 수 없게 되어 무역 자체가 동결되는 악순환이었다.
이에 해결책으로 선박을 통한 장거리 무역로를 개척하려고 모인 게 지금의 회의였다.
클레멘츠의 집무실에선 요사이 한참 동안 대륙 간 원거리 무역의 문턱을 낮추겠다고 여러 가지 준비를 했다. 중요한 자리임은 말할 것도 없었다. 정신을 단단히 차려야 했다.
텔레포트가 비싸니까 배를 타고 다니면 된다! 로 끝나면 참 좋겠지만…….
“원거리 항해는 너무 위험하오. 당장 바다 위에서는 배가 어디에 떠 있는지 정확히 알기도 힘들잖소.”
망망대해에서 해류에 의해 끊임없이 움직이는 배. 몇 주, 몇 달을 안전하게 항해하려면 위도와 경도로 이루어진 정확한 좌표를 알아야 한다.
정오에 육분의로 태양의 고도를 측정하면 위도는 비교적 간단히 알 수 있다. 하지만 경도는? 방법이 없다.
난관에 부딪히자 사람들은 심각해졌다. 한참 침묵이 흐르던 끝에 누군가가 말했다.
“무역선에 마법 좌표계를 장착하면 어떻겠습니까?”
“오…….”
“마법 좌표계 역시 비싼 장치요만.”
“그렇지만 텔레포트 비용에 비하면 새 발의 피지.”
좋은 절충안이었지만 이번에도 한계가 있었다.
마법 좌표계는 해당 지점의 절대적인 좌표를 알려 준다. 하지만 육지에서와 달리 깊은 물 위에서는 정확도가 현저히 떨어졌다.
물의 파동이 마력의 흐름을 저해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법 좌표계가 있어도 바다 위에서 무사하고 효율적인 항로를 찾아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마법계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바다에서의 오차를 최소한으로 보정하는 조건으로 상금을 걸어 봅시다.”
“그럼 그들이 어느 세월에 보정법을 찾아내겠소?”
“마법계를 피해 여기까지 왔는데, 또 마법사들에게 돈을 줘야 합니까?”
또다시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슬쩍 옆을 보니 클레멘츠도 이 문제로 고심하고 있는 듯했다. 그 수심에 잠긴 얼굴을 보자니 갑자기 내 역할이 기억났다.
나는 비서관 후보로서 여기 온 거였어! 뭔가 도움이 될 만한 걸 떠올려야 해!
사실 뭔가가 떠오를 듯 말 듯했다. 경도를 계산하는 문제는 지구의 인류에게도 지독한 난제였다. 그러나 21세기의 지구는 이런 문제가 이미 해결되어 있었고, 분명 해답도 이미 들은 바 있었다.
왜냐면, 이거 교양 수업에서 들었단 말이야! 나 이걸로 과제도 했었다고!
그래도 이미 8년 이상 전의 기억이었다. 떠오르지 않는 걸 떠올리려고 이마를 구기고, 몇 줄 필기하던 종이를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을 때.
“오필리어.”
흠칫 마주 본 클레멘츠는 딱히 내게 해결책을 토해 내라고 부르진 않은 것 같았다. 조금 걱정스러운 기색이었다.
“원한다면 먼저 나가 있어도 좋아. 사람을 시켜 휴게실로 안내하게 하마.”
아니! 이렇게 중도에 포기하라고 떠밀면 더 오기가 생기는 법. 내 면접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마주 보았다. 완벽히 둥글게 깎은 자수정 같은 두 눈. 두상 역시 티 하나 없이 둥글고 우월했다. 마치…….
“생각났어요.”
“뭐가 생각났지?”
“경도를 계산하는 방법이요.”
어쩐지 주변이 조용했다. 조금 전까지 죽어라 치고받는 것 같았는데. 갑 중의 갑을 모시고 있다 보니 다들 은연중에 이쪽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다.
“레이디, 그게 어떤 방법인지 저희에게도 알려 주시겠습니까?”
회의를 주관하던 항만 사무소장이 정중히 요청했다. 나는 일어나 회의장 중앙으로 걸어갔다.
“보아하니 디저트나 먹고 연애 소설이나 보던 여자 같은데, 항법에 대해 뭘 안다고.”
“황태자 전하와 동행했다고 기고만장인가.”
막 설명을 시작하려는데 웬 잡소리들이 들렸다. 깜짝 놀라 그쪽을 보니, 저들끼리 눈을 맞추다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렇게 쳐다보면 어쩔 건데?’라는 뜻인가? 너네는 내가 얼굴 봐 놨다.
커다란 테이블 중앙에 있는 종이에 원을 그렸다.
이것은 ‘뷰티 앤 더 비스트’의 세계가 자리한 행성, 로다나였다.
이곳에서도 하루를 24시간으로 나누었다. 즉, 행성이 한 바퀴 자전하는 데 24시간.
“모두들 알다시피 로다나는 둥글고, 하루에 한 바퀴씩 돕니다. 그리고…….”
나는 원 위에 가로로 떨어진 두 점을 찍었다. 하나는 클랏샤를, 하나는 동쪽에 있는 가상의 목적지를 나타냈다.
“그렇기 때문에 시차가 생기죠. 동방의 어느 섬으로 간다고 치면, 그곳에서는 클랏샤보다 빨리 해가 뜹니다.”
“그 정도는 우리도 알고 있소. 이게 경도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겁니까?”
항만 사무소장이 되물었다.
“해가 더 빨리 뜨면, 남중하는 시간 역시 그만큼 빠르겠죠.”
나는 차분히 두 점 사이를 잇는 화살표를 그었다.
“예를 들게요. 만일 그 시간이 꼭 한 시간 차이가 난다면, 두 지점 사이의 경도차는 몇일까요?”
“…….”
찬물을 끼얹은 듯, 회의장 안이 충격에 휩싸였다. 이내 그 충격은 기대감과 흥분으로 바뀌었다.
“15도! 15도입니다!”
“맞아요.”
어떤 이들은 종이에 나처럼 동그라미를 그려 가며 계산하다가, 곧 이해하곤 연신 고개를 끄덕여 댔다.
어려운 계산을 할 필요도 없었다. 원은 360도, 그걸 24로 나누면 15도. 단순한 산수였다.
“왜 이 생각을 못했지?”
기반이 없을 때는 어렵지만, 결국 발견해 내고 나면 진리는 단순하다.
“여러분이 준비하실 것은 마법 좌표계나 상금이 아니라, 클랏샤의 시간으로 맞춰진 시계 하나입니다. 항해지에서 정오가 되면, 육분의로 위도를 측정함과 동시에 클랏샤와의 시차를 확인하시면 돼요.”
“오!”
“오오……!”
별 기대 없이 피로감에 젖어 있던 사람들은 이제 전율하며 박수를 쳐 댔다. 음, 전율이 일겠지. 그대들은 내 선조들의 위대한 지혜를 방금 날로 먹었으니까.
시차를 계산하면 경도를 알기는 단순하지만, 옛 지구의 시계는 배의 흔들림 때문에 바다에서 제대로 동작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