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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105)화 (105/218)

105화

클레멘츠 역시 그 점을 인지한 건지, 한참 작은 내 손을 느릿하게 이곳저곳 돌려보았다. 닿는 감촉은 차갑고 딱딱했으며, 표면은 매끈거렸다. 손가락 마디마디와 손바닥에 난 금, 길이와 두께의 비마저 낱낱이 파헤칠 기세였다.

눈빛이 묘했다. 수려한 미간을 좁히고 집중해서 내 손을 만지고 관찰했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 더 중요한 일이 없는 사람처럼.

그는 꼭 내 손이 신기한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무척 조심스러웠다. 건드리면 깨질 것을 다루는 양.

‘왜 저래?’

문득 굉장히 남사스럽단 생각이 들었다. 머뭇대며 손을 빼자 별 저항감 없이 떨어졌다.

“……가 볼게요.”

왠지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또 갑작스럽게 집요한 눈길을 보내고 있을 것 같았다. 아, 진짜. 왜 저러는 거냐고.

“사람 헷갈리게…….”

“무슨…….”

입을 꾹 다물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있어 봤자 이해할 수 없는 상황만 잔뜩 생길 듯했다.

* * *

원할 때 인간이 될 수 있게 되니 삶의 질이 비약적으로 올라갔다.

“음, 냄새 좋고.”

손안의 작은 찻잔에선 오렌지 꽃 향이 은은히 섞인 훈김이 올라왔다.

황궁에서 지낸 삼 개월간, 인간 형태로 돌아왔던 날은 손에 꼽았다.

병아리일 땐 쓸데없이 광활하고 모든 게 커다랗기만 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즐기니 마치 별 다섯 개짜리 호텔에서 느긋이 오전 시간을 보내는 듯한 느낌이었다.

푹 자고 일어난 몸은 개운했다. 주름 하나 없는 실내복은 보송보송하게 몸에 착 감겼다. 아름다운 햇살이 가득 찬 방은 이제 보니 내 취향에 꼭 맞았다.

“행복해…….”

막상 이렇게 되자, 남은 시간이 내년 봄까지라는 게 오히려 아쉬워졌다. 병아리 아이돌 행세도 익숙해지니 나름 괜찮은 것 같고. 무엇보다 호화로운 황궁 생활을 하며 돈까지 받는 기회가 흔하겠는가?

“큰일이군. 편하게 돈 벌던 기억을 잊으려면 오래 걸릴 텐데.”

재계약을 제의해 볼까? 클레멘츠도 내심 내가 계속 남기를 바라던 눈치던데.

인간 특유의 간사한 마음으로 어떻게든 날로 먹는 삶을 영위할 수 없을까 고민하던 차였다. 잔뜩 기합이 들어간 메이드들이 들어왔다.

“어서 준비하죠, 오필리어 님!”

“네, 네?”

“황태자 전하께서 함께 갈 곳이 있으시다고, 외출 준비를 도우라 명하셨어요.”

안 돼, 내 5성급 호텔 바캉스!

그렇지만 바깥나들이도 꽤 괜찮았다. 그러고 보니 클레멘츠가 먼저 같이 나가자고 하는 경우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변신은 이제 내 마음대로 할 거라고 다짐했는데, 숙련된 메이드들의 손길로 정식 외출 준비를 마치니 이것도 또 하나의 변신이었다.

몸에 걸쳐진 건 짧은 소매가 사랑스럽게 부풀어 있고, 허리선이 높게 들어간 분홍색 드레스였다. 가벼운 옷감은 약한 바람에도 예쁘게 살랑거렸다.

이번에도 옷과 같은 천으로 만든 목걸이가 문양을 가리도록 감겼다. 가볍게 화장을 한 뒤, 붉은 보석이 마가목 열매처럼 달린 머리핀을 꽂았다.

유렌과 카렌은 이 모든 일을 손이 보이지 않는 속도로 해치웠다. 그러곤 날 보며 저들끼리 뜻 모를 눈물을 훔쳤다.

“그래, 맞아요. 이것이…….”

“우리들의 진정한 적성이었어요.”

애조 미용이 아니라 사람 미용 쪽이 더 적성에 맞았던 걸까?

“…….”

로비로 나가니, 앉아서 기다리고 있던 클레멘츠가 날 발견했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았다. 정지 화면인 줄 알았다.

“가요.”

그러자 그는 일어나 내 손을 잡았다. 병아리를 만질 때와 달리 든든한 힘이 나를 이끌었다. 마차에 탄 뒤에야 물었다.

“그런데 어디 가는 거예요?”

“일전에 네게 약속했던 걸 지키러 가는 거다.”

“약속했던 거요?”

“파이 가게 2호점.”

아앗!!

이 외출에 대해 뜨뜻미지근했던 내 열의가 한없이 불타올랐다.

“당장 갑시다!”

“가고 있잖으냐.”

클레멘츠는 잔잔하게 웃었다.

“통행량과 근처 상권을 고려해 몇 가지 위치를 봐 두었다. 네 마음에 드는 곳을 고르거라.”

“와, 좋아요!”

마차는 번화가에 도착했다. 초여름 축제가 끝난 수도의 거리는 한결 깔끔해져 있었다.

미리 골라 뒀다는 가게들은 다 목이 좋았다. 어지간한 수익은 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인생 파이 존잘님인 나파르 아주머니께 가능한 푹신한 돈방석을 선물해 드리고 싶었다.

“으으음…….”

최종 후보지인 둘 중에서 쉽게 정해지지 않았다. 하나는 중앙 광장과 살짝 떨어진 이 층이라, 여유롭게 파이를 먹으면서 번화가를 감상하기 좋았다. 하나는 그야말로 상점가의 핵심에 위치해 접근성 하난 최고였다.

“으음……. 좀만 더 생각해 보고요.”

“아유, 천천히 결정하십시오, 아가씨.”

건물주인 듯한 사람은 왠지 나에게까지 과하게 굽실거렸다. 그는 앉아 있는 우리에게 정성껏 우린 차와 간식을 가져다 날랐다.

“더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뭐든 분부해 주십시오.”

클레멘츠가 손짓으로 그를 물리자, 건물주 양반은 행복한 표정으로 물러갔다. 역시 과하게 공손하다.

“델 나파르는 이미 만나 보았다. 수도에 2호점을 내고 매일 황태자궁에 선납품을 하는 조건으로, 초기 비용과 점포 임대를 지원받는 데 동의했지.”

“잘됐네요, 잘됐어요!”

우리 클레멘츠. 일을 잘한다는 건 알았지만 이런 일도 척 하면 척이었다. 연신 고개를 끄덕이자 그도 흐뭇해하는 듯했다.

그나저나 정말로 대망의 파이 가게 2호점은 어디가 좋을까. 매의 눈으로 가게 이곳저곳을 다시 살피고, 통유리 너머의 전망을 노려보았다.

클레멘츠는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 보석 같은 눈을 바라보던 나는 뭔가 깨달았다.

이건 혹시 또 하나의 시험이 아닐까?

며칠 전, 클레멘츠는 나에게 제안했었지. 저주가 풀리고 나서도 황태자궁에 머물 생각이 없냐고.

그게 비서로 근무하라는 제안이고, 계기는 황실의 마스코트를 창조해 낸 내 인터뷰였다면.

파이 가게 2호점 입지를 손수 고르라는 것 역시 내 역량을 시험하려는 의도일 수 있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굳이 같이 나와 볼 필요가 있나?

물론……. 나를 좋아해서, 괜히 휴일에도 같이 있고 싶어 불러냈다는 가능성도 있긴 했다. 하지만 어제와 달리 조금의 홍조도 비치지 않는 클레멘츠의 멀건 낯을 보니, 역시 다 내 착각이었나 싶어지는 거다.

나는 산딸기 주스를 비운 유리컵을 내려놓았다.

결정했어.

“여기로 해요.”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접근성이 좋은 대신 분위기는 살짝 아쉬운 가게였다. 하지만 뭐 어떤가. 나는 이미 매의 눈으로 클레멘츠의 니즈를 파악했다 이거야. 그건 바로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거다.

“이 위치에 이만한 테이블을 놓는 거예요. 테이블마다 장미 꽃병을 놓고, 조명은 따스한 색깔로…….”

마치 약장수처럼 인테리어에 대해 이런저런 의견을 내놓았다. 클레멘츠는 저만치 물러가 있던 건물주를 불러 내 말을 받아쓰게 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홍보 문구는 이렇게 하면 돼요. ‘황태자궁 공식 인증, 레이디 오필리어의 최애 간식’.”

“……최애?”

“가장 사랑한다는…… 뜻!”

“…….”

건물주 양반은 벌써부터 행복해하며 맞장구를 쳤다.

“탁월하십니다, 아가씨! 그럼 가게 바깥에는 레이디 오필리어가 대표 메뉴인 레몬 크림 파이를 들고 있는 초상화를 걸까요?”

“네!”

“아예 가게 내부에 오필리어 님을 닮은 인형을 주문 제작해 놓는 것도 좋겠습니다.”

역시. 사업 좀 해 본 사람인지 대화가 무척 빨랐다. 몇 마디 더 나누자 어느새 그럴싸한 영업 계획서의 초안이 완성되어 갔다.

점포를 나서기 전에 덧붙였다.

“아, 운영 시간은 오전 여덟 시부터 오후 두 시까지. 초과 운영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예? 하지만…….”

2호점이 정착하기까진 나파르 아주머니가 직접 관리 감독하시기로 되어 있으니, 그분의 생활 리듬을 존중해 드리고 싶었다. 거기다 따님분이 수도에서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가게 문을 일찍 닫으면 둘이서 충분히 시간을 보낼 수 있겠지?

“……오오, 알아들었습니다! 예에, 아가씨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의도를 알 길 없는 건물주도 곧 냅다 수긍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려 댔다. 뭔가 한정판 개념으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한정된 시간 동안만 팔면 그만큼 희소가치가 올라갈 테니까.

좋은 게 좋은 거지. 마주 따봉 제스쳐를 해 보이곤 돌아섰다.

“나파르 아주머니께서 새벽형 인간이시거든요.”

슬쩍 진실을 이야기해 주니 클레멘츠가 웃었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하거라.”

요즘 그가 웃는 얼굴을 자주 보는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뭐, 기분이 썩 괜찮아 보이는 걸 보니 이 정도면 합격이겠지?

“다른 곳도 한 군데 들르지.”

“또 2호점과 관련된 곳인가요?”

“아니, 이번엔 내 일이야.”

“좋아요!”

그의 일과 관련된 곳에 나를 대동한다는 건 역시, 황태자궁에 취직시킬 만한지 보겠다는 거 아닐까? 이를테면 최종 면접!

황태자궁 비서가 되면, 귀엽게 뒹굴거리는 게 일인 계약 병아리보다야 피곤할 터였다. 이런저런 일도 많고. 하지만 요 몇 시간 잘 생각해 봤는데, 당분간 새 직업으로 삼기엔 썩 괜찮을 것 같았다.

마침 내 본체는 벨라루시아 아가씨의 시녀 자리를 잃어 실직 상태였던 걸 떠올리면, 딱 알맞고 운 좋게 스카우트 제안이 온 셈이었다.

그렇다면 이쪽도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지! 어떻게든 도움이 되는 모습을 또다시 보여 주면, 더 좋은 조건으로 들어갈 수 있을지도?

그런 다짐을 가지고 클레멘츠를 따라간 곳은, 수도의 중심부에서 꽤나 멀리 떨어진 외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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