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클레멘츠도 분명 이 사태를 알고 있었을 텐데, 왜 내게 별 말이 없었던 걸까?
으음…….
비록 좋은 의도에서 출발하긴 했으나, 그의 동의 없이 벌인 일이었다. 게다가 결과가 내 예상 범위를 아득히 초과해 버렸으니. 있는 그대로 클레멘츠에게 고백하고 해결책을 강구하는 게 낫겠지?
그렇게 나는 터덜터덜 클레멘츠의 방을 향해 걸어갔다. 왠지 선생님께 혼나러 교무실에 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삐힛…… 히…….(휴우…….)”
문밖을 지키던 시종이 날 들여보내 주었다.
의자에 앉아 책을 넘기던 클레멘츠는 마치 날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내가 들어오자 싱긋 미소 지었다.
“왔느냐.”
“삐이…….”
저 여유로운 태도를 보니, 다행히 내가 괜히 나대서 타격을 주거나 하진 않은 것 같은데……. 어쨌건 털어놓고 상의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뺙삐.(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그는 무릎에 두었던 책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이어 손 위로 올라오라는 듯 내게 팔을 뻗었지만, 아무래도 중요한 이야기니까 정식으로 해야겠지. 원래 모습으로 말이다.
“삐삣.(황금색 송이버섯!)”
“오필리어?”
빛으로 감싸이며 작은 몸이 붕 떠올랐다. 내 스스로 모습을 바꾸는 장면을 클레멘츠는 처음 봤을 것이다.
조금 크게 떠진 보라색 눈이 아름답게 빛났다.
멋없다 못해 저렴한 주문을 들어 버린 클레멘츠는 픽 웃었다. 약간의 비웃음도 각오했는데, 그게 끝이었다. 웃는 눈빛이 왠지 다정하게 느껴져서 시선을 마주치기 힘들었다.
“목걸이를 안 했군.”
“네? 아.”
그의 시선이 목에 닿은 걸 깨닫고 괜스레 목깃을 끌어 올렸다. 오늘은 종일 병아리로 있느라 유렌과 카렌 표 정식 코디를 받지 못한 편한 차림이었다. 문양에 색이 생길 때의 일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만 있을 때는 상관없지만, 하고 다녀.”
“네.”
그의 말이 맞았다. 다른 사람들이 이 문양을 본다고 ‘아니 저것 좀 봐. 황태자 전하께서 저기에 주문 외우고 입 맞추신 거 아니야?’라고 수군거릴 일은 없지만, 내력을 알고 있는 나는 부끄러우니까.
나를 보는 그의 얼굴에 눈웃음이 따라붙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예전에는 대체로 병아리일 때만 잘해 줬지, 인간으로 돌아오면 갑자기 정색하며 거리 두지 않았었나?
그런데 무도회 때부터 마치 병아리 때의 나와 그냥 나를 구분하지 못하는 듯 독점욕을 마음껏 발휘하더니.
지금 저 눈빛은 꼭, 노랗고 보송거리는 병아리를 볼 때처럼 따뜻했다…….
아니, 달랐다. 묘하게 열기가 느껴졌다. 이 열감을 설명하려면 무도회장 2층에서의 그 눈빛을 꺼내 와야 했다.
왠지 낯설었다. 분명 평범하게 마주 보고 있을 뿐인데 가슴속이 희한하게 부풀어 오른 느낌. 슬그머니 눈을 피하니 간단한 셔츠 차림을 한 클레멘츠의 소맷부리에 내가 선물한 커프스 버튼이 보였다.
가끔은 하나 보구나.
한 번도 착용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마음에 안 드나 싶어 약간 의기소침해 있었다. 이렇게 보니 참 잘 어울렸다. 이번엔 마음이 제멋대로 몽글몽글해지고 있었다.
“그래서, 오필리어.”
그가 가리키는 대로 맞은편의 의자에 앉으니, 클레멘츠는 내가 잠시 간과하고 있던 용건을 먼저 꺼내 왔다.
“나도 모르던 내 비공식 대변인이 생겼고, 황제 폐하도 모르게 황실 마스코트가 생겨 있더군.”
“읏…….”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그게…….”
클레멘츠의 말투는 평이했지만, 찔리는 게 많은 나로선 바들바들 떨 수밖에 없었다. 내가 미쳤지. 그게 클레멘츠의 선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황제까지 끌어들이는 꼴인 줄 왜 생각 못 했을까.
“저는 그저 완벽한 황태자에서 병아리 광인이 되어 가는 전하의 이미지를 회복시키고자…….”
“날 위해서 그랬던 건가?”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잘못한 입장이다 보니 시선은 내리깐 채였다. 정확히 말하면 클레멘츠만을 위해서라기보단, 나라의 기둥이 미쳐 가는 꼴을 봐 버린 이 나라와 세계관 전체를 위한 무리수였다고 설명하는 게 옳지만…….
생각하다 보니 억울했다. 내가 왜 그의 기행을 수습했다는 이유로 죄인처럼 고개를 숙여야만 하는가?
너 대체 어쩔 셈이었는데? 응?
“그럼 전하께선 대체 어쩔 셈이셨는데요?”
아, 젠장. 생각이 그대로 입으로 나와 버렸다. 그래도 그는 익숙할 것이다. 나의 삐약삐약 소리에 담긴 내면 심리를 고스란히 생방송으로 들어 버릇 했으니.
“언론이 취재한다는 건 전 제국이 관심을 갖고 있다는 뜻이에요. 전하께선 이미 한낱 병아리를 위해 너무 많은 걸 하셨어요.”
그런 고로 내 입은 멈추지 않았다.
병아리를 위해 사치, 청탁, 뇌물 수수, 결투, 고위 귀족과의 분쟁은 물론…….
“급기야는 2황자님의 환영 연회에서 2황자님보다 더한 주목을 받아 버리셨잖아요. 그 이유를 묻는데 그냥 귀여워서 이러시는 거라고 대답해요? 너무 궁색한 데다 말이 안 되잖아요!”
답답한 마음에 말이 빨라졌다. 클레멘츠는 다소 버릇없는 내 말을 차분히 듣고 대답했다.
“네가 걱정해야 할 부분은 아니었다.”
“아니, 그래도……!”
“잘했다.”
씩씩대며 말대답하려던 나는 그대로 굳었다. 지금 뭐라고 했죠?
“잘해 주었더구나.”
부드럽다 못해 나른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날뛰던 마음이 갑작스레 조용해졌다. 난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그런……가요? 그렇지만 일이 너무 커졌던데…….”
“내가 원하는 노선도, 기대하던 방향도 아니지만 어쨌든 지금의 흐름은 분명 내게 유리하니.”
“다행……이네요.”
막상 선선히 인정받으니 오히려 곤란해졌다. 그런 내게 클레멘츠는 가까이 당겨 앉으며 다가왔다. 잘생긴 얼굴이 좀 더 시야에 들어찼다.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일을 해냈군.”
“그, 그만하세요……. 문제없으시다면 됐어요. 저 나갈게요.”
“어딜 자꾸 가려고 하지? 그냥 있어라.”
흡사, 마음만 먹으면 날 여기 머물게 할 수 있다는 양 느긋하고 오만한 명령이었다. 왠지 반감이 들었지만, 허리를 곧게 세우고 앉았다.
사실이지 뭐. 얘가 여기 주인인데 까라면 까야지 어떡하겠어.
“더 하실 말씀이 있으세요?”
“글쎄……. 레오라가에서 영애에게 이런 교육까지 했을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군. 그저 너의 기지인가? 혹은, 경험인가?”
“음, 그건요.”
논거가 빈약한 레포트에 억지로 살 붙이던 경험이 이뤄 낸 쾌거라곤 말할 수 없었다.
“이런저런 일을 하다 보니…… 말재주가 약간 늘었달까요. 저 시녀였던 거 아시잖아요.”
“그냥 하는 이야기가 아니야.”
“그럼요?”
“저주가 풀린 이후에도 황태자궁에 있을 생각은 없나?”
스카우트 제의? 갑자기?
마치 대기업 건물 앞에서 직원인 척 언론인의 질문에 대답했는데, 발행된 뉴스 기사를 마음에 들어 한 오너가 실제로 직원이 되지 않겠느냐고 물어보는 격이었다.
‘이렇게 젊은 나이에 황태자궁 비서라니, 멋있으세요!’
순진하게 속아 날 치켜세워 주던 기자의 얼굴이 생각났다.
“어…… 비서로요?”
“…….”
그러나 어쩐지, 꼭 집어 물어보니 클레멘츠는 잠시 침묵했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듯한 표정이었다.
역시 정식 채용되기엔 역량이 좀 부족하지, 싶었던 찰나 그가 마지못해 긍정했다.
“……그때의 ‘필리아 레오’라면 다른 비서관들도 만장일치로 동의할 터.”
갑자기 굴러 들어온 기회에 어리벙벙해졌다.
“어떻지? 대답은?”
클레멘츠는 기다리다 못해 재차 물었다.
“어, 생각해 볼게요.”
나는 얼떨결에 생각해 보겠다 대답했다.
빙의 후 내 삶의 궤도는 벨라의 곁, 혹은 레오라 가문의 울타리 안으로 정해져 있었지.
하지만 나라고 한평생 혼우드에서만 살아야만 하진 않았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을 뿐.
정식 수도 생활? 게다가 황궁에서 일까지 한다고? 낯설고 얼떨떨했다.
그래도 클레멘츠는 일단 만족한 듯했다. 제국의 황태자가 나를 (인재로서) 탐내다니! 살다 보니 이런 날이 오는구나.
심지어 클레멘츠는 내게 뭔가 더 보상해 주고자 했다.
“내게 큰 이득을 주었으니, 상을 받는 게 당연하다. 뭔가 원하는 게 있느냐?”
거의 뭐든지 줄 수 있는 분께서 이런 말을 하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제가 원하는 거요? 병아리 계약금을 두 배로 올려 주시는 거?
하지만 바로 돈 이야길 입에 올리는 건 너무 속물 같아 뵈니, 고민하는 척을 좀 하기로 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시선을 비키면서 그에게 열심히 텔레파시를 보냈다.
소시민의 빤한 속마음이 느껴지시지 않습니까? 제 마음이…… 들리시나요?
“아, 이건 어떻지?”
설마 텔레파시가 통했나 싶었……지만 아니었다.
“네가 좋아하는 그 파이. 황궁에 있는 동안 언제든 먹을 수 있게 수도에 2호점을 내 줄까?”
“……!!”
텔레파시 그 이상이었다. 나는 그 순간 행복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네에……!”
“……!”
“너무 좋아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실 수가 있어요? 전하께서 저보다도 제 마음을 잘 아시나 봐요. 아, 정말 너무 좋아요! 제가 정말, 진짜 많이 좋아하거든요. 최고예요. 최고의 상이에요. 감사합니다.”
마음 같아선 벌떡 일어나 클레멘츠를 껴안고 방방 뛰고 싶었지만, 근위대에 끌려갈까 봐 무서웠기 때문에 냉큼 가까이 있는 그의 두 손을 꼭 당겨 잡았다.
하지만 얼마 안 가 그 역시 실수라는 걸 알았다.
그가 눈빛으로 내 손을 쓸었다. 미소조차 사라진 표정이었다. 긴장해서 손에서 힘을 빼니, 이번엔 클레멘츠가 내 손을 움켜 제 손바닥 위에 펴 보았다.
새삼, 저렇게 겹쳐져 있으니 그의 손이 훨씬 컸다.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