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설마 피하지도 않을 줄이야. 황제는 당황하여 멈칫댔다. 그것도 잠시, 우직하게 서 있는 게 더 반항적으로 느껴진 코넬리우스는 더 화가 났다.
그는 책상 옆의 긴 촛대를 걷어찼다. 황동 촛대가 요란한 소릴 내며 굴렀다.
“짐도 모르는 사이 황실에 마스코트라는 게 생겼더군. 어린 아다만티스라. 황당무계하도다!”
클레멘츠는 무표정으로 신문을 주워 들었다.
평소라면 자존심이 상해 벌써부터 빈정대는 말이 튀어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커다랗게 인쇄된 병아리가 시야에 들어와, 머릿속 한구석이 그 아이의 생각으로 말랑거렸다. 기껏해야 팔락대는 종이에 맞은 거라 아프지도 않았다.
황제의 모든 행동은 그저 권위를 세우기 위한 반사 작용일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차분해질 수 있었다.
“병아리를 끌고 다니며 대체 무슨 우스운 짓을 하나 싶었더니. 이럴 생각이었느냐?”
클레멘츠는 평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기사를 다 읽었다면 아시겠지만, ‘레이디 오필리어’가 병아리의 형태인 데는 합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유치하다 하셔도, 백성들이 무척 좋아하고 있습니다.”
“네놈도 이게 유치하단 걸 알긴 하는구나.”
허나 때로는 유치한 것이 무엇보다 잘 먹히는 법이었다. 부자 모두 그 점을 알고 있었다.
“폐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백성들의 의견은 좀처럼 한곳으로 모이지 않습니다. 그것도, 이렇게 대대적으로 황실 우호 여론으로 흐른 적이 있었는지요.”
“……허어.”
코넬리우스는 헛웃음을 지었다. 아들의 말대로였다. 이미 수천만 크로나를 들여 선전하더라도 보기 어려운 이득을 얻었다. 회의에 모여든 관료들도 저마다 신문을 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회의실에 황제가 입장하자 그들의 눈엔 경외가 서렸다.
오랜 정무 경험으로 황제는 바로 전날에 비해 오늘의 황권이 높아졌는지, 아니면 낮아졌는지를 거의 동물적으로 알아차렸다.
“오히려 지금은 기회입니다. 폐하, 새로 국기를 하나 크게 만들어 궁정에 거는 것은 어떠십니까. 자색 바탕에 아다만티스를 강조한 자수를 놓는 겁니다.”
“그거 참 괜찮은…….”
가슴을 펴던 황제는 동작을 우뚝 멈췄다.
듣다 보니 큰 문제가 있었다. 이토록 큰 이득을 그 자신의 힘이 아닌, 아들의 힘으로 보게 되다니.
스스로의 능력에 자격지심이 있던 황제는 황태자의 공적을 곧이곧대로 치하할 수 없었다.
“겨우겨우 건실한 놈으로 키워 냈나 했더니, 결국은 네 어미를 닮아 술수를 부리는구나. 요행을 바라고.”
클레멘츠는 움찔했다. 그러나 그뿐, 그의 동요는 수면 위로 나타나지 않았다.
‘대체 누가 들을 말을.’
셀레네 황후를 보내고 클라우디아 페리윙클을 들인 황제였다. 뒤싱겐의 핏줄이야말로 술수를 가장 사랑했다.
“어쩌면 너도 네 어미 같은 마녀의 꾐에 넘어갔는지도 모르지.”
‘오필리어는 마녀가 아닙니다.’
그 아이가 저를 꾄다니, 코웃음이 나올 일이었다. 오히려 이쪽에서 그녀를 꼬여 넘겼다. 곁에 두기 위해서.
“너는 네 어미가 어리석었기 때문에 태어나 있는 거다. 널 살려 두고 황태자의 자리를 준 결정을 후회하게 만들지 말거라.”
이미 항상 도로 가져가려 재고 계신 자리가 아닙니까.
메디프의 삶은 허락되었기에, 그 애에게 황태자의 자리도 허락할 준비를 하시는 건 아닙니까.
평소라면 그런 말대답이 나왔을 만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역시나 그의 언짢음을 한 꺼풀 걷어 내 주는 병아리의 존재 덕이었다.
냉정히 파악할 수 있었다. 부황의 모친 타령과 황위를 주지 않겠다는 위협은 그저 관성적인 것이었다. 그를 눈에 담으면 자동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늘 명심하고 있습니다.”
밍숭맹숭한 대답에 황제는 코웃음을 쳤다.
“사리기는. 배짱 없는 놈!”
황제는 흑옥 재떨이에 시가를 비벼 껐다. 아들놈이 평소와 달리 빈정대며 나오지 않으니 더는 트집 잡을 거리가 없었다. 어미까지 언급하며 모욕을 주었는데, 드문 일이었다.
요즘 맏아들은 조금 이상했다. 여자가 있다는 소문이 진짜인 걸까.
“됐다. 네놈의 그 유치한 마스코트 놀음, 어쨌거나 한번 해 보기나 해라.”
“명 받들겠습니다.”
각 잡힌 태도로 숙여 보이는 모습은 더할 나위 없었다. 아들의 말끔히 빗어 넘긴 은빛 머리칼과 치켜 올라간 눈썹 끝을 보던 황제는 휘휘 손짓했다. 더 볼일이 없다면 이만 보내 달라는 요청임을 모르지 않았다.
“너는 내 적장자다, 클레멘츠.”
알현실 문 앞에 도달한 황태자가 멈춰 섰다.
“그러니 네게 모든 권한을 주었다. ……하지만 뒤싱겐 황가의 이름에 먹칠하는 것만은 용서치 않을 거다.”
그는 대답하지 않은 채 문을 나섰다.
* * *
자유자재로 사람으로 돌아오는 법을 알았지만, 난 이미 병아리의 몸에 익숙해져 있었다.
딱히 사람 몸으로 하고 싶은 일이 없으면 병아리로 머무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유렌과 카렌이 챙겨 주기도 훨씬 수월했고.
무엇보다 ‘억지로 병아리 상태인 것’과 ‘언제든 사람으로 돌아올 수 있지만 임시로 병아리로 있기’는 천지 차이였다.
“오필리어 님, 오필리어 님!”
그런 고로 점심을 먹고 방에서 솜털을 가다듬고 있는데 카렌이 뛰어 들어왔다. 커다란 천 가방을 메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이것 보세요. 오필리어 님께 편지가 왔어요!”
“삣?(네?)”
카렌은 활짝 웃으며 다가와 내 앞에 편지를 내려놓았다. 얼떨떨했다. 그동안 편지를 교환하는 사람이래 봤자 벨라와 부모님뿐이었고, 아직 답장이 올 때가 아닌데.
“흠흠. 제가 읽어 드릴게요.”
그녀는 제가 더 설레는 표정으로 연분홍빛 편지 봉투를 개봉했다.
“오필리어 님께. 저는 클랏샤에서 30년째 상점을 운영하고 있는 알랭입니다. 가게와 집만 시계추처럼 들르며 이렇다 할 낙 없이 살던 어느 날, 한 신문에서 오필리어 님을 접하고 정말 오랜만에 크게 웃었습니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진지하고 절절한 내용이었다!
자세를 바로 하고 경청했다.
자세히 보니 카렌의 손에는 봉투가 몇 개 더 들려 있었다. 그녀는 나머지 사연들도 연달아 읽어 주었다.
“칼로니아 왕국에서 온 유학생입니다. 클라티아는 놀라운 나라예요. 오필리어 님처럼 귀여운 마스코트도 있고 말이죠. 제국민들에게 친근히 다가가려는 황실의 모습을 보며 외국인으로서 많은 걸 느꼈달까요.”
“제 5살짜리 남동생의 장래 희망이 병아리로 바뀌었어요. 어쩌면 좋죠? 하지만 오필리어 님은 귀엽습니다. 언제나 응원합니다.”
“오필리어 님 너무 좋아요! 시댁에서 보내 준 산딸기를 조금 넣었는데, 맛있게 드셔 주세요!”
“삐익?”
“아, 오필리어 님.”
내 의문을 알아챈 카렌이 설명했다.
“편지와 함께 선물도 꽤 많이 도착했어요. 하지만 오필리어님께 안전한지 검증해야 하기 때문에 일단 편지만 가져왔어요.”
“삐이.(그렇군요!)”
기쁨의 날갯짓을 했다. 모르는 누군가가 날 위해 편지를 쓰고 선물을 보내 주다니. 내가 날조해 낸 인터뷰 반응이 괜찮다는 뜻이겠지?
뿌듯함을 누리려던 그 찰나.
“이것들도 전부 오필리어 님께 온 편지랍니다!”
카렌이 메고 있던 정체불명의 큰 가방.
툭-.
단추로 여민 입구를 열자 꾹꾹 눌러 담았던 편지 봉투가 흘러나왔다.
연이어 카렌은 상큼한 표정으로 가방을 뒤집었다. 나는 멍하니 부리를 벌렸다. 크기도 색깔도 각양각색인 편지와 쪽지들이 한참이나 우수수 쏟아졌다.
병아리인 내가 다섯 마리는 파묻히고도 남을 편지의 산.
믿기지 않지만 전부 신문에서 ‘황실 마스코트 오필리어’에 대해 읽은 이들의 팬레터였다.
나…… 정말로 스타가 돼 버린 거야?
“후후…… 어떻게 하시겠어요? 이 자리에서 다 읽으시겠어요? 아니면, 하루에 열 편씩 천천히?”
카렌의 회색 눈에서 의미 모를 열정이 번뜩였다.
마음 같아선 밤새도록 읽으며 스타가 된 기분을 즐기고 싶었지만, 나머진 천천히 읽기로 했다.
그때까지도 난 스스로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온전히 알지 못했다.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온 건 병아리 상태로 정원 산책을 나가서였다.
평소엔 ‘맞다, 저런 게 있었지.’ 하는 듯한 눈으로 날 보던 황태자궁 고용인들.
별 뜻 없이 쳐다보면 왠지 자진 납세하듯 주머니에서 쿠키를 꺼내 내놓기도 했지만, 기껏해야 밟지 않게 조심해서 지나치던 게 보통이었다.
그렇던 그들이, 만면에 자부심이 가득했다.
“오필리어 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정원 모서리에 핀 꽃을 꺾으러 가서 마주친 기사가 밝게 웃으며 인사하지 않나.
“더운 날씨에 힘들지 않으십니까? 목적지까지 호위하겠습니다, 오필리어 님!”
걷기 운동 할 겸 혼자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어디선가 근위병이 헐레벌떡 따라오지 않나.
“삐잇, 찌잇.(괘, 괜찮은데요…….)”
“큭, 귀엽…… 아, 아니. 거처까지 모시겠습니다.”
물론 내 말은 통하지 않았고. 근위병은 나를 장갑 위에 애지중지 주워 들었다. 돌아오는 동안 손바닥으로 차양까지 쳐 주었다. 나는 황송해서 가만히 있었다.
“아내와 딸이 오필리어 님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삑. 삣.(예, 예…… 감사합니다!)”
발 도장 사인이라도 해 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러나 염려는 필요 없었는지, 방문 앞까지 날 데려다준 근위병은 흐뭇한 얼굴로 장갑을 벗어 고이 집어 들었다. 아마 저것이 굿즈가 될 예정인 모양이었다.
이, 이래도 괜찮은 걸까? 내가 잠깐 엉덩이 좀 붙인 장갑이 뭐라고.
분명 클레멘츠와 나의 이미지 반전을 노린 건 맞았지만……. 물론 다들 좋게 봐 줘서 기쁘지만!
이건 좀 과하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