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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102)화 (102/218)

102화

“그 작은 생명을 소중히 하는 것이 곧 제국의 정체성과 미래를 소중히 하는 것이란 것도 알고 있었고요.”

다 나온 이야기에 살을 붙이는 것쯤이야 쉬웠다.

“황태자 전하와 오필리어 양을 두고 다툰 것은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스코트로서 오필리어는 본인이 의도한 대로 이중 삼중의 상징성을 띠게 되었다.

어린 아다만티스로서 제국의 정체성. 신수의 이미지에 걸맞은, 신성한 임무와 도덕성. 그리고 작은 생명의 소중함까지.

“오필리어 양이 상징하는 것들, 그토록 중요한 가치는 황실만이 떠맡을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귀족들의 입장에서도 분명히 양보할 수 없는 지점이 있지요.”

기자들은 숨도 쉬지 않은 채 카밀의 말을 받아 적었다.

“예로부터 중부 귀족들에게 중요했던 가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아니던가요.”

그들은 내심 감탄했다.

‘과연……!’

귀족파 대표의 후계자이자 사교계의 백조였던 그 레이디는 어디 가지 않았다. 언뜻 비이성적으로 보이던 최근 행보 역시, 황태자 전하와 마찬가지로 다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이다.

황족인 만큼 제국에 대한 모든 임무를 한 몸에 짊어지고자 하는 황태자. 그리고 제국의 기득권으로서 그 짐을 나누고자 하는 귀족파. 결국 베일리스가를 위시한 귀족들도 황태자가 ‘오필리어’를 통해 주장한, 제국이 나아가야 할 목적에 동의한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동의했을 뿐 아니라 행동(병아리 납치)을 취함으로써 적극적으로 찬동했다.

황족과 귀족들의 화합. 나아가 제국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대통합. 그것이 후작 저택 병아리 소동의 진정한 의미였던 것이다. 기자들은 실로 오랜만에 써 보는 훈훈한 내용에 전율했다.

정말이지 꿈보다 해몽이었다.

“오필리어 양을 만난 일은 분명 제 인생에 다시없을 행운입니다. 그 사랑은 앞으로도 제 인생이 끝날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카밀이 한 말 중에 이것 한마디만큼은 더없는 진심이었다.

‘마무리까지 아름다워!’

“후작 영애, 혹시 지금 모습을 영상으로 저장해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에요.”

카밀은 익숙하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곧, 기자들은 부리나케 후작저를 빠져나갔다. 한시라도 빨리 이 내용을 내보내야 했다.

카밀은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정원 의자에 몸을 기댔다.

“마스코트라! 후훗…….”

물론 오필리어는 제국의 아이콘이 되기에 충분하고도 넘쳤다. 그러나 결코 황실에 빼앗기고 싶진 않았다.

차라리 베일리스가의 상징이 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곡식 이삭을 문장으로 갖는 가문은 무리라고 쳐도, 카밀 개인의 문장은 백조와 밀 이삭이 아닌가. 제법 병아리와 어울리는데.

썩 마음에 들진 않아도, 황태자에 이어 자신과 나아가 귀족파 전체의 이미지까지 세탁할 수 있는 기회였다. 흔치 않은 일이었고, 그녀답게 멋지게 이용했다.

“제법인걸. 누구지? 상징성으로 의미를 부여해 오필리어에 대한 맹목 행동을 정당화한다……라.”

실로 묘수였다.

자신만큼이나 오필리어에게 진심이었던 황태자가 이런 수법을 생각했을 리 없었다. 그쪽 진영에 이만한 일을 해낼 인재로는 카시스 듀프레가 있었으나, 묘하게 진행 방향이 달랐다. 더군다나 그 후작 역시도 함께 병아리에게 빠져 있었지 않나.

카밀은 유리 찻잔에 담긴 캐모마일차의 수색을 감상했다.

“황태자궁에 생각보다 쓸모 있는 사람이 또 있었구나.”

기사 본문엔 분명 ‘필리아 레오’라는 비서를 인터뷰했다고 되어 있었지.

‘……오필리어 레오라.’

무도회가 열린 밤, 레오라 남작 영애 오필리어는 결국 2황자와 춤을 추었다. 카밀은 왠지 속상했지만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소녀의 모습은 마치 밤과 음악이 마법으로 피워 낸 듯했기에.

객들이 아직 아티팩트에 정신 팔려 있을 때, 카밀은 황태자가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본 몇 안 되는 이들 중 하나였다. 그 아이, 오필리어 레오라가 어미를 따르는 아기 새처럼 황태자의 뒤를 졸졸 쫓아가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그게 몹시도 못마땅해, 그녀는 씁쓸한 양조주를 연거푸 들이켰더랬다.

그 뒤로 레오라 가문의 영애에게선 아직 연락이 없었다.

‘레오라 가문이 최근 수도에 올라온 적도 없다고 하고. 대체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걸까.’

직감은 그 소녀와 이 ‘필리아 레오’가 무관하지 않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나아가 제 소중한 병아리 오필리어와도.

“오필리어, 너는 대체…….”

산호색으로 칠한 입술 사이에서 한숨과 같은 중얼거림이 나왔다. 그 부름이 노랗고 부드러운 아기 새를 향하는지, 노랗고 부드러운 머리칼을 가졌던 아가씨를 향하는지 스스로도 명확히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어느 쪽이고 여전히 그리웠다는 점이다.

그립다뿐인가. 갖고 싶었다. 옆에 두고 싶었다. 그런 상대에 대해서는 무엇보다도 속속들이 알아 두는 것이 먼저라는 게 카밀의 철칙이었다.

“시엘로.”

키 큰 정원수 뒤에 숨어 있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 * *

“전하, 전하! 이걸 보셨습니까?”

집무실을 나서서 걷던 클레멘츠에게 카시스가 달려왔다. 저이가 저렇게 다급해 보이다니 기이한 일이었다.

들이밀어진 신문에는 꼭 누군가를 연상시키는 커다란 그림과 함께 눈에 띄는 헤드라인이 박혀 있었다.

[황가의 마스코트]

“……대체.”

“이에 대해 아는 바가 있으십니까?”

“없다.”

오필리어에 대한 기사가 그의 동의 없이 뿌려졌다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회의장을 향해 걸으며 받아 든 신문을 읽어 내려갔다. 그동안 미간에 심각하게 패었던 주름이 점차 펴졌다. 잠시 뒤엔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마지막으로 이 맹랑한 주장들의 출처로 눈을 옮겼다. ‘황태자궁 비정규 비서 필리아 레오’라는 이름이 들어왔다.

‘오필리어로군.’

앞뒤로 한 글자씩 제한 이름이 생경했다. 밤늦도록 이어진 무도회가 곤했는지 꾸벅 존다는 걸 쉬도록 내버려 두었다. 어떻게 그 비몽사몽간에 일어나 기자에게 그런 장광설을 늘어놓았으려나.

생각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전하!!”

회의장으로 들어가 보니, 그를 지지하는 귀족들은 이미 각자 손에 신문 쪼가리를 하나씩 든 채 흥분하고 있었다.

“보셨습니까?!”

“지금 밖에 난리가 났습니다. 온 거리에 전하와 오필리어 님의 초상화가 걸려 있습니다.”

“황궁으로 출근하는데 저에게까지 기자들이 들러붙더군요. 전하의 근황과 추진 중인 정책에 대해 물었습니다.”

동부 출신의 한 귀족은 후발로 기사를 낸 한 신문의 분석 자료를 펴 보였다.

“전하의 정책에 대한 관심과 지지율도 아주 높아졌고, 지금 이 순간에도 치솟고 있습니다!”

클레멘츠는 같이 들어온 카시스를 보았다. 유능한 수석 보좌관은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뒤, 귀족들은 한 목소리로 외쳤다.

“드디어 기회입니다, 전하. 지금이라면 어떤 일이든 추진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감격했다.

“저희는 그저 전하께서 남다른 취향을 가지신 줄 알았지, 감히 그 깊은 의중을 짐작할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실로 놀라운 기지이십니다. 탄복했습니다!”

“대체 전하의 뜻을 이렇게 잘 헤아린 비정규 비서 필리아 레오라는 자는 누구입니까?”

“전하의 비서인데 어찌 저희는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했는지…….”

클레멘츠는 능숙하고 신비로운 태도로 그들의 궁금증을 잘라 냈다.

“이만 회의에 들어가지.”

그가 통제해야만 하는 일상이었다. 대체 누가 함부로 휘저어 이토록 큰 파장을 일으켰나, 처음에는 몹시 날 선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 주체가 오필리어라는 걸 알게 되니, 오히려 기꺼웠다.

어처구니없었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사랑스러웠다. 그가 생각했던 방향은 전혀 아니었지만, 오필리어는 이렇게 또 한 번- 누구도 상상 못 한 방법으로 판도를 바꾸어 놓았다.

그 방법은 독특했고 즉흥적이었으며, 의도는 선했고 결과는 이로웠다.

겪으면 겪을수록 어떻게 이렇게 새로울 수가.

클레멘츠 자신처럼, 태생부터 어딘가 마법적인 출처라도 있는지 의심될 정도였다.

무도회장에서 방까지 데려다주는 동안 그녀의 얼굴은 내내 발갛게 익어 있었다. 말도 안 되게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메디프가 그녀의 저주를 풀어 주겠단 약속을 했단 건 알았지만, 그 녀석과 한 공간에 단둘이 있는 모습을 생각하니 불쾌감과 조바심이 끝도 없이 솟아났다. 결국 두 번씩이나 일정을 취소하고 찾아가야 했을 만큼.

오필리어가 고대 시의 해석을 알아내 그 앞에서 읊었을 땐, 그때처럼 당황한 적이 없었다. 이미 모든 걸 들킨 것만 같았고, 다시 생각해 보면 아직 그렇지 않은 것도 같았다.

이미 관심의 초점은 작은 아기 새에게로 옮겨 갔다. 뭘 하고 있을까. 무슨 생각을 할까, 회의를 하면서도 자꾸만 떠올리게 되었다.

그런데 일에마저 관여하게 둔다면. 정신을 차려 보면 헤어날 수 없을 만큼 깊이 얽혀 버리지 않을까? 은미한 두려움이 그의 신경을 살살 간질였다. 한편으로는 이미 늦었다는 걸 인정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그녀를 믿기로 했다. 기분 좋게 오필리어의 계획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실제로 그가 처한 상황을 뒤집기엔 이게 상책이었다. 그 바람에 온 세상의 주목을 받아 버렸지만, 클레멘츠는 제게 쏟아지는 관심의 파도를 다스려 원하는 곳으로 나아갈 역량이 있었다.

그리고 회의가 끝난 후, 클레멘츠는 황제의 부름을 받았다.

“제정신이냐, 클레멘츠?”

황제는 들고 있던 신문을 냅다 내던졌다. 기세 좋게 날아간 종이 뭉치는 황태자의 머리를 맞히고 바닥에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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