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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99)화 (99/218)

99화

“와!”

주문을 외우는 것만으로 모습을 바꿀 수 있었다. 병아리에서 사람으로, 사람에서 또 병아리로.

이제는 내가 선택한 시간에만 병아리로 있을 수 있으니, 거의 저주가 풀린 셈 아닌가.

방에 있을 때는 마음껏 책을 읽거나 편지를 쓰거나 딴짓을 할 수 있고. 클레멘츠를 만날 때만, 정말 고액 알바 출근하는 기분으로 병아리로 변하면 되었다.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너무 기뻐서 메디프와 얼싸안고 방방 뛰었다.

“고생한 보람이 있네요!”

“어때요, 돈을 투자한 보람도 있죠?”

“그럼요! 두 번 낼 돈은 없지만요!”

“당신이라면 언제든지 도움을 요청해도 괜찮아요. 공짜로 도와줄 테니까.”

어쩐지 갑자기 훨씬 부드럽고 그윽하고 달콤해진 목소리였다.

그와 동시에 출입구 쪽에서 익숙한 흉흉한 기운이 전해졌다.

시선을 던지니 클레멘츠가 있었다. 아니, 요즘 왜 이렇게 갑자기 마구 나타나는 거야?

“그만 떨어지지 그러나. 혼처도 정하지 않은 레이디에게 뭐 하는 짓이지?”

순수한 보랏빛을 띤 그의 눈동자가 마치 활활 타오르는 불길처럼 느껴졌다.

“황태자 전하께서 이 누추한 곳을 찾아 주실 줄은 정말로 몰랐는데요.”

메디프는 태연한 태도로 천천히 날 안았던 팔을 풀었다.

“이렇게 갑자기 동생에게 열의가 생기시는 거면, 아예 레오라 남작가에 청혼서를 넣어 볼까 싶은데요. 오필리어 양께서 항상 제 궁에 계시면 더 자주 오실 것 아닙니까?”

클레멘츠는 개소리에 대처하는 유구한 스킬, ‘먹금’을 시전했다. 먹이를 던져 주지 않는다. 즉 상대하기를 그만둔 것이다.

나도 갑자기 헛소리로 다이빙하는 메디프에게 장단을 맞춰 줄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가 빌려준 책이나 주워 들며 가볍게 인사했다.

“오늘은 고마웠어요. 그럼, 다음에 또 뵈어요, 2황자 전하.”

“언제든 다시 와요. 환영하니까.”

메디프는 탑 입구까지 내려와 손을 흔들어 댔다. 클레멘츠는 쳐다도 보기 싫다는 듯 뒤돌아보지 않았다.

자꾸 왜들 이래. 싸웠나?

걱정스러웠지만 가족도 아닌 남이 관여할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그와 나란히 걸으면서 메디프가 빌려주었던 책을 폈다.

고대의 명시들이 현대 제국어로 번역되어 있는 책이었다. 책갈피를 꽂아 둔 곳을 펼치자 메디프가 줄을 그어 둔 부분이 보였다. 나는 그걸 소리 내어 읽었다.

“너의 달콤한 목소리와 웃음소리는 그를 향해 있어.”

“……!”

무덤덤하게 걸음을 옮기던 클레멘츠가 움찔거렸다.

“막상 널 마주하면, 부드러운 불길이 피부 속을 훑어- 아무 것도 보이지…… 으악! 뭐예요!”

클레멘츠에게 책을 빼앗겼다. 다시 가져오려고 손을 뻗었지만, 키 차이를 이용해서 졸렬하게 높이 들어 올리니 닿지 않았다.

“……그냥 읽지 마, 오필리어.”

“왜요!”

약 올라서 부들부들 떨린다.

어쩐지 그도 나만큼이나 숨차 보였다. 얼굴도 붉어져 있었다. 여태 더위를 잘 안 타는 것 같았는데. 한 것도 느리게 걷다가 긴 팔 몇 번 휘적인 것밖에 없구만.

오늘 어디 아픈가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그보단 책을 돌려받는 게 먼저였다.

“돌려줘요! 2황자님 책이란 말이에요.”

“거기.”

클레멘츠는 지나가던 황궁 시종 한 사람을 불러 세웠다. 그는 예의 바른 태도로 즉시 다가왔다.

“이 책을 2황자에게 전하라.”

“예, 전하.”

그렇게 책은 딱 두 줄만 읽고 강제 반납당했다.

“뭐 하는 짓이에요, 전하. 아무리 황태자 전하시라지만 레이디에게 이렇게 무례하셔도 되는 거예요? 예?”

제대로 대답하지 않는 그와 투닥투닥 걷다 보니 어느새 황태자궁이었다.

딱히 할 일도 없어 그의 방으로 졸졸 쫓아 들어갔다. 클레멘츠는 딱히 날 쫓아내지 않고 자리에 앉혔다. 나는 앉자마자 물었다.

“왜 그런 시를 차용하신 거예요?”

그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눈길을 피하더니, 앞머리 몇 가닥을 뒤로 넘겼다. 반듯하고 하얀 이마가 드러났다.

“……오래된 노래에는 그 자체로 힘이 있으니까.”

“왜 힘이 필요했어요?”

그의 눈길이 다시 나를 향했다. 할 말이 많지만 하지 않는다는 듯한 태도였는데, 왠지 수줍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홀린 듯 보고 있으니 클레멘츠가 내 목 뒤로 손을 뻗어 초커를 풀어냈다. 애써 잊으려 했던 기억이 되살아나 눈을 감았다. 부드러운 감촉이 중앙의 문양을 건드렸다.

두근, 가슴께를 건드리는 울림에 놀라 눈을 떴다. 이번엔 입술이 아니라 그의 손가락이 닿아 있었다. 클레멘츠의 손끝이 부드럽고 느릿하게 문양을 덧그렸다.

이렇게 만지면 반짝이는 색이 묻어나지 않을까? 쓸데없는 걱정이 머릿속을 스쳤다.

두근-.

가슴께를 건드리는 낯선 울림이 거슬렸다. 나는 아주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

“네 목소리의 마력을 강화한 거다.”

“…….”

“어디까지나 네 편의와 안전을 위해 해 둔 조치다. 원하지 않으면 도로 풀어 줄 테니 언제든 말하거라.”

왠지 다급한 기색이었다.

“너도 알게 되겠지. 결국은 누가 더 네게 나은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내게 도움을 주겠다는 식으로 말하더니, 마력을 강화해 준 거였구나.

노래 대회 때나 경비병의 일을 생각해 보면 앞으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쨌든 가진 힘이 늘어난다는데 반대할 소시민은 없다. 생존에 유익할 테니까.

“아녜요. 마침 목소리를 유익하게 쓸 데가 있어요. 2황자 전하께서 인간 모습으로 돌아오는 주문을 알려 주셨거든요.”

“그렇구나.”

주문이 무려 ‘황금색 송이버섯’이라는 말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도 묻고 싶은 게 있었다.

“단지 그뿐인가요? 무도회 때 제게 그 시를 읊으신 이유요.”

“…….”

클레멘츠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너는 왜 그걸 메디프에게 물어봤지? 내게 물어봤다면 가르쳐 줬을 텐데.”

말을 돌리는 것 같다. 하지만 어림없지.

“오, 직접 여쭤 봤어도 그 주문이 무슨 뜻인지 알려 주셨을 거란 거네요? 너의 달콤한 목소리와 웃음소리.”

“……그만.”

“막상 널 마주하면, 부드러운 불길이 피부 속을 훑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또다시.

바깥에서 함께 걸을 때처럼, 클레멘츠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황태자의 침실은 사계절 내내 쾌적하도록 온습도 조절 마석이 붙어 있는데.

어느 장미의 꽃잎이 저 색보다 예쁠 수 있을까.

저절로 활짝 웃음이 나왔다.

“전하께서는…… 제가 보기엔 그렇게 솔직하지 못하신 것 같아요.”

“…….”

클레멘츠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흔들리는 눈으로 날 보고 있을 뿐이었다.

“사실…… 좋아하시죠?”

숨 막힐 듯한 정적이었다. 누군가의 심장 박동이 귓가에 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난 살그머니 덧붙였다.

“제 목소리요.”

“…….”

“제가 노래하는 것도, 사실은 썩 괜찮았던 거죠?”

그는 칼로카이리 축제 때 내게, 남들 앞에선 노래 부르지 말라고 했었다. 아닌 척했지만 소심한지라 두고두고 상처였는데.

하지만 시의 첫 구절은 ‘너의 달콤한 목소리’였다. 아무리 목적을 가지고 외운 주문이었다지만, 사실은 내 목소리를 형편없게 느끼는데 그런 시를 고르진 않았을 것이다.

“그럼, 해 봐. 그때 했던 노래.”

그의 대답은 예상과 달랐다. 부정하거나 나가라고 할 줄 알았는데.

“다시 듣고 싶다.”

상상도 못 한 말이었다. 또 한 번 정적이 흘렀다. 이번엔 정색하는 쪽은 나였다.

“사실은 저, 아까 제 책을 빼앗아 가셔서 삐졌어요. 기분 나빠요. 안 부를래요.”

“……미안하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어.”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예요. 제가 너무 시간을 잡아먹었죠? 쉬세요.”

명령을 거절하기 위해 되는 대로 아무 말이나 던지고 일어났다. ‘아직 나는 말 안 끝났는데’라는 티를 팍팍 내고 있는 클레멘츠를 억지로 두고 침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조용히 닫은 문에 잠시 등을 기댔다. 숨을 두어 번 크게 쉬었다. 뜨뜻미지근한 공기는 진정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한 가지 생각만 불쑥 떠올라 가라앉지 않았다.

클레멘츠는 정말로 나를 좋아하는지도 몰라.

암만 아닐 거라고, 착각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독여도 이쯤 되면 어쩔 수가 없었다.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떨리는데 무슨 노래를 부른담.

온갖 증거를 쑤셔 박아 둔 ‘자의식 과잉 상자’는 열어 보기 두려울 만큼 뭐가 꽉 차 있었다. 괜히 고개를 저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그래, 아닐 수도 있으니까. 어쩌면, 맞을 수도 있고…….

그러면? 어떡해야 하지?

모르겠다.

숨을 죽이고 그의 방 쪽을 뒤돌아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 * *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여전히 병아리 500마리가 잠들어도 될 광활한 침대 위에서 병아리 한 마리로서 눈을 떴지만, 이젠 걱정 없었다.

“삑!뺘!(황금색 송이버섯!)”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흰 원피스 잠옷 차림으로 침대에 앉아 있었다.

드디어 저주에 구애받지 않고 인간 형태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역사적인 날이었다.

“대마법사 메디프 블레시드 뒤싱겐 님. 당신은 최고입니다. 탑 오브 탑입니다.”

하고 싶은 일들이 산더미 같았다.

실컷 책 읽기, 벨라와 부모님에게 편지 열 장씩 쓰기, 볕 좋고 경치 좋은 정원 산책하기! 글로리나 부인이나 유렌, 카렌에게 부탁하면 맛있는 먹을거리도 받아먹을 수 있을 터.

“오 예.”

눈 깜짝할 새 세수와 외출 준비를 마쳤다. 바깥에서 읽을 책과 편지지, 필기도구를 챙겨 기세 좋게 문밖으로 튀어 나갔다. 그리고 보무당당히 나아가는데…….

“어떡하지, 이제…… 나는 망했어. 아니 나만 망한 게 아냐. 우리 모두는 이제 망했어. 길바닥에 나앉게 될 거야.”

웬 낯선 사람이 클레멘츠의 집무실 앞에서 중얼거리는 모습을 발견했다. 뭐지, 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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